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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6. 대곡리(大谷里)

사천읍에서 동쪽으로 고성(固城), 통영(統營)으로 행하는 국도 33호선을 따라 4km지점에 이르면 길가에 면사무소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대곡리 또는 한실이라 일컫는 정동면의 행정중심지이다.

<1972년도 상공에서 본 전경>

  주위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분지(盆地)로 된 골 안 배후에는 넉넉한 곡선(曲線)으로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처럼 솟은 봉우리들, 그 중에 임금이 노닐고 머물었다는 어정산(御停山)은 악의(惡意)가 없을 뿐더러 한점 적의(敵意)도 없다. 안으로 들어 갈 수록 깊어지는 골짜기, 윤기(潤氣)를 머금은 검푸른 송림이 산을 덮었고 산자락을 타고 내린 실가닥의 시냇물은 젖줄의 근원이 되고 있다. (大谷貯水池)   높푸른 하늘 밑에 산자수려(山紫秀麗)한 이구산이 앞을 가로막고, 그 아래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사천강이 굽이쳐 흐른다. 호미등(虎尾嶝) 산자락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어 분지 한 가운데를 가리고 있는 동수(洞藪)...... 시선가는 곳마다 한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자아낸다.

  대곡리는 본래 사천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한실 또는 대곡동(大谷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곡동과 신계동(新溪洞.신기땀)을 합하여 대곡리라 해서 읍동면(邑東面)에 편입된 10개 법정이동(法定里洞)의 하나이다. 그 후 17년만인 1931년에 읍동면이 다시 정동면(正東面)이라 개칭되고 1934년경에는 최도경(崔道卿)면장 당시 고읍의 면소(面所)를 이곳 숲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1년 뒤 도로변의 현 위치로 다시 옮겼고, 지금의 면 청사는 이영우(李永宇)면장 재임시(在任時)인 1985년에 지은 건물이다. 한편 경찰파출소인 주재소(駐在所)는 대곡의 동쪽 노천(魯川, 魯內洞)에 있었는데, 진입로(泗川江의 中流)인 목교(木橋)가 큰물로 인해 유실되자 면소보다 앞서 대곡리 현 위치로 옮겼다. 이로써 대곡리는 정도면 10개 법정이동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에 이러렀다.   동쪽에는 청법산(淸法山 : 고래로 불리워진 장밭갓, 6.25때인 1950. 8. 12. 정동 전투시 이 능선에 인민군의 주저항선<主抵抗線>이었던 곳의 산등성이를 경계로 장산리(獐山里), 남쪽은 사.고선(泗固線)의 국도 건너 수청리, 서쪽은 호미등과 합곡산 너머 풍정리, 북쪽에는 어정산의 주능선을 경계로 사천읍 구암리와 진주시 금곡면(金谷面)이 자리잡고 있다.   대곡리(大谷里)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부락으로는 골안 한가운데를 흐르는 실개천을 중심으로 산등성 밑자락에 양지바른 서쪽 지역을 <양달땀, 또는 범골>이라 하며 정동초등학교와 농촌지도소 정동면상담소가 자리하고 반대로 길다랗게 청법산에 드리워져 있는 동쪽 지역을 <응달땀>이라 일컬는다. 햇빛이 <양달땀>보다 늦게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골안밖에 행정관서가 몰려 있고 국도변인 동쪽을 <청널땀>, 서쪽 산기슭의 취락을 <신기땀>이라 불리운다.   <청널땀>에는 정동면사무소, 사천경찰서 정동파출소, 정동면보건지소, 정도우체국, 정동농업협동조합, 향토예비군 정동면대 등의 공공기관과 그 외 면내 각 사회단체가 소재한다.   본면 소재지인 대곡리는 차에서 내려 부락에 들어서면 소득높은 부촌(富村)답게 일찍이 기초환경 개선을 위한 마을안길 확장, 포장으로부터 도로개설, 지붕개량, 하수도 정비 및 복개, 마을단장 등의 사업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농촌 모범마을로서 오늘에 이르렀다.   면내에서 인심 좋고 잘 사는 마을로서 동네가 크게 번창한 까닭은 지역적 여건과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는데다 복합영농과 산지개발을 위한 주민들의 억척스런 개척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널따란 골안은 물론 깊숙한 골짜기에 이르는 곳마다 일구어 놓은 약 30ha에 달하는 과원에는 고소득의 작목인 단감이 가지마다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절로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 부락명의 유래   대곡리(大谷里)란 지명은 본래 <한실>이란 우리 토박이말을 한문자(漢文字) 표기(表記)로 일컫는 땅이름이다. 지금도 흔히 <한실>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한실>의 <한>은 크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곳의 지형이 산으로 둘려 싸인 분지(盆地)인데다 골안 배후에는 저수지가 목을 차지하고 그 너머 십리거리의 산골짜기가 깊숙하게 뻗쳐 있다. 때문에 골안이 넓고 크며 깊으다는 뜻에서 <한실>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한글학회가 펴낸 지명사전에 의하면 우리나라 지명 가운데 가장 으뜸을 차지하는 것이 대곡이란 지명이다. 그 숫자는 무려 200개가 넘는데 이와 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곡이란 땅이름이 생겨난 까닭은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그것은 우리 고유의 옛 지명에서 <한>(韓, 翰, 午)은 큰(大), 많은(多)의 뜻을 지닌 고대국어 <한>의 한자 음훈차표기(音訓借表記)로 즐겨 써 왔음에서 알 수 있겠다. 예컨대 한밭은 대전(大田), 한강은 한강(韓江)으로 한티와 큰 재는 대치(大峙)로 한산(翰山)은 대산(大山)으로 표기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또 <한>에 대해 국어사전에서 살펴보면 干, 汗, 翰, 韓으로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 때에 군장(君長, 君主)을 일컫던 말이라 풀이해 놓고 있다. 대곡(大谷)의 우리말인 한실(韓谷, 翰谷)은 그 언제부터 유래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위의 내용등으로 미루어 아주 먼 옛날부터 내려 온 <한실>의 한문자 표기임은 이로써 알 수 있다.      • 부락의 연원(淵源)   대곡 부락도 면내 여타 부락과 마찬가지로 언제부터 사람의 그림자가 얼렁거렸는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막막하다.   부락 연원에 대해 그 연대(年代)는 헤아릴 수 없으나 전래하는 땅이름이 말하듯이 사천 고을이 열리면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지 않았나 하고 짐작되는 설(說)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역시 알 길이 없다.   오늘날의 부락 형성은 이 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여러 성바지 가운데 사천이씨(泗川李氏)는 자기네의 선조가 먼저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하고, 다른 한편에는 진주강씨(晋州姜氏)가 먼저라고 주장한다. 사천이씨는 관향(貫鄕)이 사천일 뿐 아니라 먼 옛날부터 사천의 토성(土姓)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곳에 먼저 입향(入鄕)하여 정착(定着)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강씨문중(姜氏門中)의 가보(家譜)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癸巳年, 1593년) 진주성(晋州城) 싸움에 의병장(義兵將)으로 역전(力戰)하다 전사한 강대유(姜大有)의 어린 아들 인입(仁立)이 진주에서 난을 피해 이곳에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정씨(鄭氏-晋州), 최씨(崔氏-朔寧) 순으로 입향하여 부락을 형성해 왔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난리가 일어나거나 어떤 피치못할 사정으로 목숨줄을 부지하기 위해 살 수 있는 고장을 찾아 들 적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은 무어니해도 갯가보다 골이 깊은 산골짜기였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대곡부락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그 어느곳 보다도 산 좋고 물맑은 야산(野山) 굽이들을 감돌 때마다 펼쳐져 있어 안으로 갈수록 깊어지는 골짜기와 골안 들판을 반겨 삶의 터를 일구었을 것이다.   현재 대곡부락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120여 가구에 410명이며, 주요 성바지는 최씨(崔氏)가 가장 많고 다음이 강씨(姜氏)이며 그다음으로는 이씨(李氏), 김씨(金氏), 하씨(河氏), 정씨(鄭氏), 오씨(吳氏) 순으로 되어 있다.      • 대곡서당(大谷書堂) 교육   옛날의 교육은 이 나라 방방곡곡이 다 그랬듯이 기초적인 초등교육 기관으로서의 서당이 대곡 부락(대곡리 40의 1번지)에도 있었다.   대곡서당은 오늘날 생존해 계시는 마을의 고로(古老)들에게 의하면, 1880년경에 설립하여 약 60년간을 운영해 오다가 신학문(新學問)이 들어오고 그후 1931년 대곡 부락에 정동공립보통학교(正東公立普通學校)가 설립되자 문을 닫게 되었는데, 대곡서당 이전에는 인근 마을 서재에서 글을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이들 서당에서 공부를 마친 분들 중에는 경서(經書)를 비롯한 깊은 학문에까지 통달한 문사(文士)가 나와 문명(文明)을 떨친 분들이 더러 있었다고 전한다.   서당은 훈장(訓長), 접장(接長), 학도(學徒)로 구성됨이 원칙이나 지역에 따라 훈장이나 접장의 학식(學識), 덕망(德望)의 격차가 심했다고 한다. 서당의 종류에는 첫째 훈장자영(訓長自營)서당, 둘재 유지독영(有志獨營)서당, 셋째 유지합동(有志合同)서당, 넷째 촌락합동(村落合同)서당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 고장에서는 네 번째의 촌락합동서당으로 마을 전체가 합동으로 훈장을 두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친 학당이었다.   1931년 당시 대곡서당의 마지막 스승인 훈장 또는 접장은 농산 정기하 선생(農山 鄭基夏 先生 - 晋州鄭氏)으로 鄭相東 大人(考)이었고, 이 외도 강구석(姜龜錫), 최인정(崔寅政), 김성기(金成基) 등 세분의 선생이 있었는데 이 분들은 대곡서당에서 뿐 아니라 타지 서당에도 초빙되어 순회교육을 맡았다고 한다.   서당의 유지비를 보면 촌락합동 서당을 두는 곳에는 다소 훈장의 양미(糧米)라도 지출할 만한 기본자산이 있었으나 대개는 일정한 기본자산이 없었다. 그리고 훈장가족의 생활비는 학부모가 부담하되 여러 가지 물질로 제공했으며 훈장이 객지로 초빙되어 갈 경우에는 그 의복, 식사까지 수강생(受講生) 가정에서 매월 돌아가면서 담당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서당(서재)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7~8세로부터 15~16세의 아동들이 그 중심이 되었으나 때로는 20세 안팎으로부터 25세 이상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학력(學力)의 정도는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흔히 정도가 높은 상급학도로 하여금 하급학도를 가르치게 하여 스승의 노고를 덜게 하였음은 물론이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강독(講讀 : 읽기), 제술(製述 : 글짓기), 습자(習字 : 쓰기) 세가지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독은 처음에 <천자문(千字文)>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 <소학(小學)> 등으로 올라갔고, 서당에 따라서는 <춘추(春秋)>, <예기(禮記)>,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읽히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드물었다고 한다.   <동몽선습>은 조선시대 초기 박세무(朴世茂 : 明宗 때의 文臣)가 어린이의 교과목으로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여기에는 유교(儒敎)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윤리로 치는 오륜(五倫)의 뜻이 담겨져 있다.   둘째, 제술은 일반적으로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사율(四律), 십팔구시(十八句詩), 작문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벽촌의 서당에서는 전혀 제술이 없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셋째, 습자는 처음에 해서(楷書)를 많이 연습시켜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행서(行書), 초서(草書)를 익히게 했다.   서당의 교수방법은 처음에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한 자 한 자씩 가르쳤다. 다음은 단자(單字)를 붙여 음독(音讀)하는 것을 가르치고 다음에 구독(句讀)의 문리(文理)를 가르치고 또 그다음에 일장(一章)의 대의(大義)를 가르쳐서 마지막에는 자독자해(自讀字解), 즉 학습자 스스로 풀이하여 읽도록 했다. 특히 강의에 있어서는 학습자의 능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놓고 종일 숙독(熟讀)시켰으며, 훈장과 학생은 그 읽은 수(讀數)를 세웠다. <讀>이란 이미 배운 글을 소리높이 읽고 그 뜻을 질의 응답하는 교수방법이다.   서당에서 학동들이 배운 글을 읽을 때, 그 글 읽는 소리가 매우 시끄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웃으로부터 아기우는 소리, 다듬이질 소리와 함께 삼호성(三好聲)이라하여 반발을 사는 일은 없었다. 강(講)은 대개 순강(旬講), 망강(望講), 월강(月講) 등으로 나누었는데 서당 교육에서는 일강(日講)을 위주로 하였다.   강에는 또 배강(背講)과 면강(面講)이란 것이 있었다. 배강은 암송(暗誦) 낭독이고 면강은 교재를 보면서 읽는 임문(臨文)강독이다. 강은 날마다 학생의 실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고 그 날의 학습량은 숙독하여 그 읽는 수를 세었다. 보통 1회의 독서량은 백번(百講) 정도 읽혔다. 이렇게 하여 각자 소질대로 진도(進度)는 각기 달라 제 나름대로 실력을 연마해 나간다. 이 때에는 밤공부(夜講)를 장려하여 자정(子正)이 넘도록 글을 읽게 하였다.   옛날 서당교육은 철저한 수재교육이었다. 전날 배운 글을 강해서 해독하고 완저히 외지 못하면 다음 대목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 날 한 시에 서당에 입학해도 총명하고 부지런하면 진도가 자꾸 나갔고, 투미한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면 뒤쳐져서 복습만 되풀이 했다.   책 한 권을 다 떼면 <책걸이(冊禮, 책씻이)>라 해서 한턱내는 영광을 입는 반면에, 눈물이 책 아래쪽 절반을 젖어서 문드러지는 수모를 당했다. 일반적으로 <책걸이> 할 때면 서당 훈장에게는 약주와 음식대접을, 친구들에게는 떡을 해서 먹였다. 오늘날의 사은(謝恩)잔치인 셈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책 한 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학부모가 음식을 마련하여 그 영광을 같이 나눈 풍습이었다. 그래서 지금 70대 이상되는 노인들은 옛날 유년(幼年)시절의 서당에 다녔던 추억을 잊지 못한다.      • 초등교육의 중심지   정동면의 중심이 되는 대곡리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31년 9월 1면1교(一面一校) 시책에 따라 오늘날의 정동초등학교(正東初等學校)의 전신인 정동공립보통학교(正東公立普通學校, 뒤에 尋常小學校가 됨)가 설립되어 면(面) 서부의 일부 부락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수학하게 됨으로써 근대식 학교교육의 시발점이 되었고, 그후 신월국민학교(新月國民學校)가 설립되자 면내 중심학교로서의 구실을 해 왔다.   이에 앞서 당시 사천군내에는 삼천포, 사천, 곤양의 3개면이 1911년 6월에, 사남이 1920년, 곤명.서포가 1924년, 용현이 1926년, 그리고 축동이 1928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니까 9개면 가운데 정동면이 가증 늦게 설립된 학교로 그 이전에는 지역적 여건에 따라 사천공립보통학교에 다녀야 했다. 지금도 고읍리, 예수리, 화암리의 3개 부락은 일부 지근거리를 제외한 나머지 마을들은 모두 사천초등학교나 동성초등학교의 학구로 되어 있다.   1991년 9월 1일 회갑(回甲)되는 제 60주년 개교기념일에는 면내 전지역은 물론 서울, 부산, 제주도 등 경향(京鄕)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문(同門)들이 운집하여 모교(母校)의 발전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었다. (당시 총동창회장 정상동(鄭相東), 제5회)   그리고 한가지 덧붙일 것은, 1947년에 설립된 시원국민학교가 이후 46년간을 운영해 오다가 젊은층의 도시로의 진출로 아동수가 줄어들자 1992년 정동국민학교의 분교(分校)로 전락하였고, 1994년에는 마침내 문을 닫았다. 현재 잔여 아동수는 모두 60여 명으로 정동초등학교가 운영하는 학교버스로 통학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 대곡 저수지(大谷貯水池)   대곡 부락 뒤쪽, 깊숙이 파고 들어간 산골짜기의 목덜미를 깔고 앉은 저수지. 검푸른 산, 푸른 하늘의 그림자를 물속 가득 채우고 초록빛 잔잔한 잔물결이 일렁이느 맑은 저수지, 그 물가 나무숲에서 청아(淸雅)한 울음소리로 쉬고 있는 사새들.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투명하게 맑아짐을 느낀다.   저수지란, 물을 가둬두는 옛날의 언제(堰堤) 즉 보(洑)를 말하는 것으로 관개용(灌漑用)의 물을 하천이나 시냇물을 끌여들여 담아놓은 인공(人工)의 못(池)을 가리킨다. 곧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오목 들어간 산 밑에 둑을 쌓고 흐르는 냇물이나 계곡물을 막아두는 봇물이다. 저수용량에 따라 저수지와 소류지(小溜池)로 구분하기도 한다.   1937년 부락 뒤 범머리(虎頭)와 개고개(狗峠)의 노루목을 막아 만들어진 이 저수지는 둘레가 약 900m정도이고, 둑의 길이는 130m, 높이 30m쯤 되는 아담한 저수지로서 몽리면적(蒙利面積) 54ha에 이르는 면내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다. 아래에 있는 들녘과 과원의 젖줄 구실을 해 줄 뿐 아니라 우기(雨期)에는 홍수를 조절해 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아늑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초록빛 은빛으로 일렁거리는 이 적지 않은 호수는 갈수기(가을철)에는 봇물이 안고 있는 많은 과원과 잘 정리된 논밭을 적셔주어 풍년농사를 짓게 해준다. 그러나 지난 해(1994년 여름)에는 심하게 가뭄이 들어 50여 년만에 처음으로 호수가 마른적이 있었다.

  • 대곡(大谷)숲   흔히 마을 터를 고를 때는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마을 뒤편에 산이 있고 앞쪽에 내가 흐르는 양지바른 지역을 고른다. 예의 대곡 부락도 마찬가지로 세월도 아랑곳없이 푸르름에 감싸여 우뚝한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또 앞에는 태고(太古)적부터 쉼없는 사천강이 흐른다.   이런 지령(地靈)의 정기(精氣)에 감화되고 향토성(鄕土性)이 순박(淳朴)하여 일찍이 정동면의 행정 중심지로 택지(擇地)된 곳이 대곡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덕(地德)이 빼어난 길지(吉地)라 할지라도 공허(空虛)한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을 질서가 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것의 한 표현이 자연환경에 대한 질서 부여이다.   마을이 황량(荒凉)한 들판처럼 외부에 완전히 개방되어 있으면 무엇인가 썰렁하고 부족한 느낌을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등 다를바가 없다. 이런 허전함을 채우기 위하여 인위적이라도 숲, 담, 울타리 등을 조성하여 마을을 다소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곧 마을 지세(地勢)의 허결(虛缺)함을 방비하거나 보충 혹은 변경할 수 있다는 논리에 기초한 풍수 비보(裨補)로서 마을의 안전을 꾀하는 방책이다. 마을 앞이 허전해서 마을 안의 재복(財福)은 바깥으로 무작정 흘러나가고 마을 바깥의 재액(災厄)은 무방비 상태로 침입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형에 조산탑(造山塔), 수구맥이 선돌 등을 세운다든지 동수(洞藪)라 일컫는 숲을 조성하여 비보(裨補)하는 경우이다.   옛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대곡부락의 지세가 곡식 따위를 까불러 고르는 그릇모양의 키(箕, 챙이) 형상인데, 부락 배후의 깊숙한 골짜기를 타고내린 시냇물이 부락 한가운데를 지나 바깥으로 흘러감에 따라 골안의 복된 운기(運氣)도 모두 이 소하천을 통해 함께 나간다고 믿어온 것이다. 그래서 이에 따른 대응 논리를 기초로하여 조성된 것이 바로 동수(洞藪)라 일컬는 대곡숲이다.   면 사무소의 뒤편 서북쪽에 부락을 가리고 있는 이 숲은 수령 약 150년쯤 되는 육송(陸松)의 소나무숲으로서, 용트림하듯 억센 등걸을 과시하듯 우람한 가지들은 사방으로 내 뻗치어 서 있다. 그래서 부락의 허한 곳을 보정(補整)해 줄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나 기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것 자체가 부락의 표상이 되어 온 숲이다.   예전에는 고읍에서 이전한 면소의 건물이 숲속에 있었으나 1934년 당시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고, 한가지 흠이 있다면 정동농협의 창고가 들어 서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곡숲은 언제나 아이들의 숨결이 있고, 장년들의 이상이 있으며, 할아버지들의 체온이 머물러 있다.   속설(俗說)에 의하면 이 숲을 조성하고 난 후부터 대곡 부락의 기운이 모름지기 뻗어나 가가호호(家家戶戶)가 날로 번창하여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살 만한 땅’으로서의 부촌(富村)이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과 오가는 외지인들의 휴식처로 각광받는 이 숲에는 체육시설이 설치돼 있으며, 1985년경 당시 사천군의 수목군락지(樹木群落地, 140여그루)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숲을 우리 모두는 더욱 소중하게 아끼고 가구어 나가야 하겠다.      • 안산(案山 : 장밭갓)   대곡부락 앞쪽에 있는 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청법산(淸法山)에 솟아 있는 산마루를 안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산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면 소재지는 물론 사천 들이 한눈에 들어 온다.   옛날부터 이 산을 <안산>이라 한 것은 산의 형국(形局)이 풍수지리상 이른바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지상(地相)이기 때문이다. 안산이란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을 말하는 것으로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산(主山)과 함께 풍수학상 4요소의 하나이며, 여러 산이 중첩하여 있을 때에는 내안산(內案山), 외안산(外案山)으로 구별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현 삼성항공(三星航空) 사원아파트 자리에 솟아 있던 옥산(玉山)이 옛 사천 읍기(邑基)의 안산이었다. (豊井里 主山과 案山 참조)      ○ 갓새미골<골> : 안산 밑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물맛 좋은 샘이 있었는데 대곡저수지에 합쳐졌다고 함.   ○ 공동묘지<묘> : 대곡 부락 북동쪽 깊숙한 산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   ○ 무등대<산> : 자앙골에 있는 산. 무당이 춤추는 형상이라 함.   ○ 꽃밭등<등> : 무등대 건너편에 있는 등성이. 꽃을 바구니에 담아 춤을 출 때의 형상이라 함.   ○ 넉시골<골> : 대곡 저수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도토리새미골<골> : 대곡 부락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도토리새미가 있음.   ○ 새보들<들> : 대곡 남쪽 사천강가에 있는 들. 들판 위쪽에 새로 보(洑)를 만들었기 때문에 새보들이라 함.   ○ 소매골<골> : 대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수방등<등> : 대곡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   ○ 아래땀<마을> : 한실의 아래쪽 마을로서, 관공서가 몰려 있는 곳.   ○ 여시바구<바위> : 대곡 서쪽 범골에 있는 바위.   ○ 죽바우들<들> : 신기땀 동쪽에 있는 들판.   ○ 청널보<보> : 대곡 부락 동쪽 청법천(淸法川, 泗川江)에 있는 보(洑). 1930년대에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로 있던 최연국(崔演國)이 만들었다고 함.   ○ 작답들<들> : 대곡 저수지 밑 서쪽 호미등(虎尾嶝) 산자락에 있는 들. 저수지가 생겨서 새로 작답(作畓)한 들.   ○ 지방바위<바위> : 태고쩍 천지개벽 때 해일로 인해 바닷물이 대곡산 상정 바위까지 미치니 마치 낚시대의 지방같이 보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   ○ 갯돌<바위> : 대곡숲에 우람하게 서 있는 개모양의 바위로 무게가 백근(斤)이 넘으며, 옛날 진주정씨의 어느 장사(壯士)가 웃면에서 지게로 져다 같다 놓은 것이라 전한다.   ○ 여시바구<바위> : 장밭갓(안산)에 솟아 있는 바위로, 마을을 훤히 내려다 보고이었다. 옛날부터 마을에서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큰 재앙이 일어난다 하여 자라는 나무로 보이지 않게 가려 놓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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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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