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4. 풍정리(豊井里)   정동면(正東面) 10개 법정이동(法定里洞) 중의 하나. 사천읍 동쪽방향 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북으로는 사천의 주산(主山)인 부봉산(浮蜂山)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동서로 가로누워 있고, 크고 작은 산봉우리와 깊숙한 골짜기로 산천읍 구암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으로는 동서로 한없이 뻗어나간 산업의 동맥인 사고선(泗川~固城線)의 국도를 경계로 고읍, 수청리와 마주해 있다.   동으로는 산고곡심(山高谷深)을 이룬 합곡산(合谷山)이 우뚝 솟아 손에 닿을 듯 하고 당산(堂山)너머 면 소재지인 대곡리의 아름다운 숲이 보이며 서쪽으로는 부봉산의 산줄기가 서남으로 흘러 내려 그 능선따라 화암리와 인접해 있다.

  풍정리는 수청리와 함께 본래 사천군의 동면(東面)과 경계한 상주내면(上州內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풍동(新豊洞)과 상정동(上井洞) 그리고 화암리의 옥정동 일부를 병합하여 읍(정)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풍정리를 구성하는 행정이동(마을)은 여타 이동과는 달리 풍정 단일마을로서 부봉산의 바로 밑자락을 깔고 앉은 아랫말(下村)이 중심 부락이다.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웃말(上村) 그리고 들녘을 향해 돌기(突起)하였다가 몇해 전 송두리째 없어진 옥산(玉山)터에 아파트촌(삼성항공 사원아파트)이 관할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장짓골이라 하여 장령동(掌令洞)에 사람들일 모여 살았으나 현재는 폐촌(廢村)이 되어 이름만 남아 있다.

  주역(周易)에서 풍정의 풍(豊)은 크다(大)라는 새김으로, 정(井)은 기르다(養)는 뜻이라고 한다. 곧 크게 길러내는데 다함이 없다라는 뜻의 풍(豐)이고, 정(井)은 지혈출수(地穴出水)의 우물 정(井)자로서 신풍(新豊), 상정(上井) 등에서 따온 지명이다. 다시 말하면 수원(水原)이 풍부한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풀이 한다. 그런데 신풍동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풍정(豊井)과 음운(音韻)이 똑같은 풍정(風亭)이란 지명이 나온다. 한데 음이 같은 풍정이란 이름은 어디에서 따온 것일까?   향토사적(鄕土史的)으로 사천 고을의 옛 읍기(邑基)가 지금은 없어진 옥산 부근에 있을 때에 당시 향교(鄕校. 鄕學堂)의 기지(基地) 또한 지금의 풍정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조선 세종대(世宗代)에 이르러 사천읍성(泗川邑城)이 축성(築城)되어 읍기를 옮겼는데 이 무렵 향교도 이건(移建)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천향교(泗川鄕校)의 연혁사(沿革史)를 보아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향교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계승된 전국 각 고을마다 1교(校)식의 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며 이를 교궁(校宮), 재궁(齋宮)이라고 일컬었다. 뿐만 아니라 대개의 향교는 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이라하여 문묘(文廟)라고도 하는데 많은 건물 가운데 하나가 풍화루(風化樓)이다.   풍화루는 향교에 외삼문(外三門)을 들어 서면 맨 앞에 위치하는데 이는 유화지도(儒化之道) 이를테면 교육이나 유풍(儒風)의 힘으로 풍속 또는 향풍(鄕風)을 순화(醇化)하고 잘 교화(敎化)시키는 다락(樓)이란 뜻이다. 때문에 향교가 풍정에 소재할 당시 풍화후의 풍(風)과 누정(樓亭)의 정(亭)자를 따서 ‘풍정(風亭)’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風亭이 新豊洞으로 개칭되고 1914년 신풍동의 풍(豊)자와 상정동(上井洞)의 정(井)자를 적취(摘取)하여 오늘의 豊井이 된 것이다.   풍정부락의 연원(淵源)을 살펴보면, 고려 충정왕대(忠定王代 : 1349~1351)에 지평(持平) 최용생(崔龍生 : 全州崔氏의 始祖 文成公 崔阿의 아들)이란 분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 조선시대의 觀察使)로 있을 때, 내시의 무리들이 당시 원(元)나라의 총애를 받았음을 믿고 우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을 미워하여 그들의 죄악을 방서(榜書)를 붙여서 나라 안의 모든 백성에게 보였는데, 어향사(御香使)로 온 내시(宦者) 주원지첩목아(朱元之帖木兒)가 왕(충정왕)과 공주에게 호소하여 안렴사로 임명한 것을 저지시키고 대신 김유겸(金有謙)을 안렴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로인해 최용생은 사주(泗州 : 泗川) 땅으로 유배(流配)되어 이곳 풍정에 입향(入鄕)함으로서 그 후손들에 의해 부락 형성의 효시(嚆矢)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지금부터 약 550년전 삭녕최씨(朔寧崔氏) 부사공 연파(副使公珚派)의 7세 손인 충순위(忠順衛) 최자문(崔自雯)이란 분이 길지(吉地)로 알려진 풍정에 시거(始居) 정착(定着)함으로써 터전을 닦았다고 전해 온다.   이들 두 조선(祖先) 중에는 대대로 높은 품계(品階)의 벼슬을 지낸 분과 효행(孝行)이 많았고, 특히 삭녕최씨의 제11세 두남(斗南 : 입향조 自雯의 玄孫)은 임진왜란 때의 충효(忠孝)로 유명하다.   현재 풍정 부락에는 상기 두 최씨 말고 밀양박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연일정씨, 경주김씨, 파평윤씨, 분성배씨, 진주강씨, 경주이씨, 인동장씨, 순흥안씨, 진주정씨 등 다양한 성바지들이 들어와 세수인의(世守隣誼)하여 공수친목(共修親睦)을 다지며 오순도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아랫마을 동쪽 소타물산(小他物山) 산자락에는 전주최씨의 옥산재(玉山齋)가, 저전산(楮田山) 밑자락에는 삭녕 최씨의 분암(墳庵)인 유원재(有源齋)가 건립되어 해마다 제향(祭享)한다.

  • 부봉산(浮蜂山)과 옥산(玉山)   아늑하고 평화로은 풍정 아랫말 뒤에는 부봉산(201m) 한일자(一字形)로 가로 누워 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형상을 지니는 이 산은 사천, 진주, 고성의 세 고을을 가르는 봉대산의 줄기가 서북향으로 치달아 종립(嵷立)한 산으로 읍지(邑誌)에는 지리산(智異山)의 내맥(來脈)이라 기록돼 있다.   이 산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면 사천 일원은 몰론이거니와 저멀리 남해와 하동, 그리고 진주시도 한눈에 들어온다.   사천의 옛 망루격(望樓格)인 서낭당산(城隍堂山)과 마주한 부봉산은 읍기(邑基) 배후에 있었던 까닭에 사천의 주산(主山, 또는 後山)이라 일컬었다. 주산이란 산의 형국(形局)이 풍수지리상(風水地理上) 이른바 진산(鎭山)에 해당하는 내룡 맥절(脈節)의 지상(地相)이기 때문이다.

<부 봉 산>

  그런가 하면 주산은 내룡 맥절 중에 혈(穴) : 용맥 중에서 가장 생기가 몰린 곳) 뒤에 높게 솟는 산을 칭하는 것으로서 대개의 주군도읍(州郡都邑)과 성시(城市) 그리고 부락이나 묘지에는 이러한 형태의 산이 있게 마련이다. 도읍의 경우에는 이 산이 그 고을을 지켜(鎭護)준다는 의미에서 제사(祭祀)를 지냈을 뿐 아니라 고을의 진산(鎭山)으로서의 신성시(神聖視)해 온 산이기도 하다.   <사천읍지> 산천조(山川條)를 보면, 이 산의 옛 이름이 두음벌산(豆音伐山)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벌이 나는 형상이라 하여 부봉산이지만 옛적에는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러면 ‘두엄벌’이란 무슨 뜻을 갖는 것일까? 어느 국문학자의 말을 빌리면 ‘豆音’과 ‘伐’로 합성된 이 말은 음운학상(音韻學上)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의 고대어(古代語)로서 즉 이두(吏讀)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라시대 이후 한문 글자의 음(音)과 새김(訓)을 풀어서 한문을 우리말식으로 적어 쓰던 맞춤법인데 여기서 ‘둠(豆音)’의 새김은 둥글다라는 원(圓)과 사위(四圍) 즉 사주(四周)라는 뜻이고, ‘벌(伐)’은 친다는 뜻과 함께 벌(閥)과 벌(垡)의 동의어(同義語)로 어떤 세력이나 집단의 뜻이라고 한다. 때문에 한자는 (‘豆音’ 또는 ‘豆無’) 그리고 ‘伐’로써 표현되는데 한 지역을 수호(守護), 진안(鎭安)하는 군대나 우두머리를 두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로써 볼 때 조선 초기의 사천진(泗川鎭)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지않나 생각된다. <태종실록 : 太宗實錄> 15년(1415) 9월조에 의하면 여말선초(麗末鮮初)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략을 막기 위하여 남서해안 일대에 특별 군사지역으로 설정하여 경상도에는 창원(昌原)을 주진(主鎭 : 從二品관)으로 삼고 동에는 울산진(蔚山鎭), 서로는 사천진(泗川鎭)을 설치하여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 正三品관)로 하여금 판현사(判縣事, 행정을 맡아 보는 일)를 겸하게 하였다.   군사적 의미의 두음벌산(부봉산) 정상에는 토석(土石)으로 쌓은 유구(遺構)의 일부가 거의 붕괴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산성(山城)으로 쌓은 흔적인지 아니면 제단(祭壇) 주위를 범접(犯接) 하지 못하게 쌓은 담인지는 고증할 길이 없다. 다만 오늘날에도 이산을 일컬어 ‘떰불’ 또는 ‘뚬벌산’이라 하는데 이는 ‘두음벌’의 방언으로서 아직 옛 산명(山名)이 살아 있음을 말해 준다.   풍정마을 입구 대로변 남쪽에 조그맣게 생긴 옥산(玉山)이 있었다. 주산이던 부봉산의 한 줄기가 서남으로 흘러 내려 동쪽에는 소타물산(小他勿山), 서쪽에는 남라등(南羅嶝)이 자리잡았다. 또 남라등의 뫼뿌리가 동남으로 휘돌아 몽실하게 솟아오른 것이 옥산이다. 이 산을 풍수에서는 안산(案山)이라 일컬었으며, 역시 산의 형국이 주산과 대응하는 지상(地相)인 까닭에서이다.   안산에 대하여는 이미 전술한 바 있거니와 양기(陽基)의 집터나 음택(陰宅)의 묏자리의 맞은 편에 있는 산을 말하는 것으로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산과 함께 풍수학상 네 요소의 하나이다. 여러 산이 중첩되어 있을 때는 내안산(內案山), 외안산(外案山)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무(玄武.主山)에 대응하는 산에는 조산(朝山), 안산(案山)의 양자가 있어 조산보다는 약간 낮은 산을 안산이라고 한다. 조산은 앞서 말한 혈처(穴處) 앞에 있는 산으로 풍정마을이 혈처라면 소타물산이 조산이 되는 것이다. 주산(부봉산)을 대하는 모습이 흡사 손님이 주인을 뵙는 듯, 신하가 임금을 알현하듯 하여 혈에 올라서 바라보면 그 형태가 단정하며 뭇산에서 두드러지고 자연스럽게 주산(현무)에 조공(朝貢)하는 듯한 것을 말한다.

<옥 산>

  풍정마을(혈) 앞쪽에 있으며 소타물산(조산) 보다도 낮은 산이 옥산이자 안산이다. 안산은 일반적으로 낮고 작은 산이 좋다고 했는데, 옥산이 실지로 그렇했다.   사람이 앞에 놓고 사용하는 책상처럼 현무의 책상에 상당하는 것이 안산이다. 그 형상은 옥계(玉几), 옥대(玉帶), 횡금(橫琴), 그리고 면궁(眠弓 : 시위를 매지 않은 활)처럼 생겼으면 더욱 좋다고 하는데, 이들 가운데 옥(玉)자를 따온 것이 옥산이다.   조산보다도 오히려 안산에 중점을 두는 것은, 주산에 대해 마치 인간의 일상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의식주 및 생필품 등 생활에 대한 중요성을 갖기 깨문이라 한다. 요컨대 조산이 권위를 유지하는 데에 안산은 없어서는 안될 장식품이고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란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천의 옛 읍기(邑基)가 옥산 맞은편에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옥산구악읍기야(玉山舊嶽邑基也)’라는 말에도 볼 수 있다. 비록 구래(舊來)의 풍습에서 전래한 것이지만 사천의 주산, 안산으로서의 부봉산과 옥산이 반드시 읍지(사천조)에 등재(登載)돼 온 까닭을 조금은 알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이 고장의 선인들이 가장 직접적인 생활 이상(理想)의 표현으로 그렇게 믿어 온 민속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옥산에는 수느리대(箭竹)가 많이 나 활대(弓柄)로 쓰여졌을 뿐 아니라 토산품(土産品)으로 공납(貢納)하였다고 씌여 있다. 또한 구전(口傳)에는 태고(太古)적 창출(創出)될 당시의 전설과 이외에 산 위에 장군수(將軍水)라는 우물이 있어 보통사람은 먹을 수가 없었으며 장수(將帥)들만 오르내리며 물을 마셨다는 속설(俗說)도 전한다. 장군샘이 있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병마사의 사천진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같이 음양조화(陰陽調和)로서 사람들의 신앙대상인 옥산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즉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10여년동안 처음에는 사천비행장(泗川飛行場) 확장공사에 따르는 취토(取土) 및 채석장(採石場)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각종 건설공사에 쓰이는 골재(骨材)를 본격 생산함으로써 모름지기 산은 사라지고 말았다.

  때문에 옥산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다만 기록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처럼 없어진 빈 자리에는 7천5백여평(坪)의 공간부지를 남겼다. 이를테면 그 거대한 산덩어리와 넓은 공간은 시대적 요구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현재 옥산터에는 사천에 삼성항공(三星航空)이 들어오자 이와함께 1994년 7월 삼성아파트(아파트 4동, 복지관 및 상가 각 1동, 총 344세대 입주)촌이 우뚝 솟았다. 이로서 아파트촌은 주위 환경과 어우려져 새로운 양태의 풍치(風致)를 자아내고 있다.

   •효자(孝子)와 풍정(豊井) 숲   풍정리 아랫말(下村) 서남대로변의 남라등(南羅嶝)과 지금은 없어진 옥산(玉山)간에 있었던 수림(樹林)이다.   옛날에는 ‘동지서남(洞之西南)에 유대림수(有大林樹)’란 실기(實記)와 같이 그 당시에는 수해(樹海)를 이루어 울울창창하기 비할 데 없는 큰 숲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사천~고성간 국도(33호선)가 뚫리면서 숲은 두 동강 났고, 이로써 숲으로서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현재 성홍주유소 서쪽 언덕빼기에 있는 조그마한 숲이 그 일부이다.   기록에 의하면, 선조 14년(1581, 辛巳) 풍정에서 태어난 최두남(崔斗南)이란 분은 삭녕인(朔寧人)으로 자(字)는 추지(樞之)인데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12살의 나이로 아버지 참봉공(參奉公.振寧)을 모시고 이 숲속에서 피란을 하였는데 난중에도 지성으로 봉친(奉親)을 하였다. 하루는 어떤 일로 밖에 나갔다가 그만 왜적(倭賊)에게 잡혀 가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왜장(倭將)이 보고서 이르기를 ‘저 아해(兒孩)는 필다자손(必多子孫)의 귀상(貴相)이니 장차 본국(왜국)으로 데려 갈 것이다.’고 하며 둔진(屯陳 : 현 船津里城)으로 끌고가 쇠줄에 매어 놓고 지키는 것이었다.   어느 하루는 두남이 왜적들이 술에 취해 모두 잠자는 틈을 타서 왜장의 장검(長劍)을 빼앗아 매어 놓은 쇠줄을 끊고 성을 넘어 수리(數里)를 달리는데, 왜병 대여섯명이 술에 취한 채 뒤쫓아 오는 것이었다. 이때 두남이 몸을 날려 적을 반격하고 앞서오던 놈을 격살(擊殺)하니 나머지 놈들은 어떨결에 모두 도산(逃散)하였다고 한다. 그길로 급히 아버지곁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아들 잃은 슬픔에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사경(死境)이 되었다가 아들을 보고 기뻐하였음은 물론 그때 두남(斗南)의 나이 15살이었고, 아버지를 더욱 잘 모셨다고 한다.   난(亂)이 끝난 뒤 이와 같은 효행(孝行)이 상문(上聞)한 바 되어 복호(復戶)의 은전(恩典)이 내렸을 뿐 아니라 증 장악원정(贈 掌樂院正)의 직함이 내리고 이에 더하여 첨추(僉樞 : 僉知中樞府使)에 가증되었다. 여기에 복호의 복(復)은 면제하는 뜻이며 호(戶)는 호역(戶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호란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한편, 첨추공(僉樞公)의 숙부인(淑夫人) 진주성씨(晋州鄭氏)는 이구산(尼丘山) 아래 성제동(聖齋洞 : 현 洙淸里의 한 골짜기)에 제단(祭壇)을 쌓아 놓고 도천기산(禱天祈山)하여 아들 여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실패 없이 장성시키니 이들에서부터 자손이 번창하였다. (제10편 전설 및 일화 참조)

  • 풍정마을의 보호수(保護樹)   풍정 아랫말 경로당 앞뜰에 아름드리 회화나무(槐木) 두 그루와 그 사이에 키가 조금 작은 느띠나무 한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얼마전에는 수령(樹齡) 600년쯤 되는 포구나무(팽나무의 方言)가 한쪽 지간(枝幹)이 없는 상태로 기형(畸形)을 이루고 생립(生立)해 오다가 마침내 수명을 다한 듯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봄에 잎이 무성하면 풍년이 들고, 동시에 피지 않으면 가뭄이 들고 우환이 많다는 전설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의 외경(畏敬)의 대상이자 마을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아낌을 받아온 나무들이다. 현재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축되는 회화나무 두 그루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마을에서 제일 연로(年老)하신 분의 말을 빌리면 일제(日帝) 때에 지금의 괴목보다는 더 오래된 느띠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배를 모우기 위해 일인(日人)들이 베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무를 벤 후부터 마을에 언짢은 일들이 자주 생겼다 한다.   해방 후 주민들이 그 그루터기에 불을 질러 없애고 바로 옆에다 심은 것이 지금의 느띠나무이다. 회화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喬木)으로 목재는 가구(家具)나 땔나무와 숯으로 쓰이며 꽃과 열매는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또한 느띠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역시 낙엽 활엽 교목으로 대개의 마을에는 당목(堂木 : 神木)으로서 한두 그루는 서 있게 마련이다.   여름이면 이 나무들의 시원한 그늘 밑에는 한낮에는 땀을 식히며, 밤에는 모깃불을 피워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정담(情談)을 나누기도 하였다. 옛날부터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 깃들어 있는 나무라 하여 신성시(神聖視) 되어 왔으며 이 나무들을 통하여 동민의 두레의식과 화합을 도모해 오기도 하였다. 현재 이세 그루의 수간(樹幹) 밑에는 5m 원단(圓壇)이 축조되어 시군(市郡)나무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서짓골(書齋谷, 서재골)   풍정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서당(書堂)이 있었다 하여 서짓골이다.   이 나라 삼천리 방방곡곡이 다 그러했듯이 근대적 교육기관인 학교교육이 있기 이전에는 각 고을의 마을마다 한문(漢文)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서당이 언제 없어졌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풍정부락에는 서당 말고도 한문사숙(漢文私塾.글방)이 있었다. 고종 때는 한학자(漢學者)로 이요헌(二樂軒) 최덕묵(崔德黙)이란 분이 축서설(築書室.뒤에 的尼齋라 함)하여 후생(後生)들 수학(修學)에 힘을 기울여 왔고, 또 한말(韓末) 때는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의 문인(門人)이던 춘암(春岩) 최효습(崔孝習)이 대양재(大養齋)에 소거(所居)하여 후진양성과 유도진흥(儒道振興)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정우(庭右)에는 그를 기리는 기적비(紀蹟碑)가 서 있다.      • 장령동(掌令洞)의 유래   풍정 아랫말에서 동북쪽의 깊숙한 골짜기에 있던 마을. 아주 먼 옛날에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일가가 입향(入鄕) 정착(定着)한 곳이라 전해지며 지금은 민가(民家)없는 빈 골짜기로 이름하여 장지골 또는 장명골이라 일컫는다.   장령동이란 지명의 유래는 장령(掌令) 벼슬한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앞서 풍정리의 연원에서도 말했듯이 고려 충정왕 때의 사람으로 지평(持平) 최용생(崔龍生)이란 분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按廉使)로 있을 때에 내시(內侍, 宦者) 주원지첩목아(朱元之帖木兒)에게 무고를 당하여 억울하게 이곳으로 유배되어 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장령이란 품계(品階)는 고려 때의 간대(諫臺) 즉 사헌부(司憲府 : 고려와 조선 때 정사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하여 기강과 풍속을 살피는 관청)의 정4품(正四品)의 관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 밑에는 지평(持平 : 正五品), 그 위로는 집의(執義 : 從三品) 그리고 두 계단 뛰어서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이다.   그런데 고려사에 의하면 ‘(전략) 지평 최용생을 경상도 안렴사로 삼았다가.......’로 기록돼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의 유배지가 이곳 장령동인 것으로 감안하면, 안렴사로서의 품계에 걸맞는 장령으로 승진되었거나 또는 유배지에서 죽은 후 지평에서 장령으로 증직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직명은 고려를 거쳐 조선 태조(太祖) 때는 시사(侍史 : 正四品)로 고쳤다가 태종(太宗) 1년(1401) 관제개정 때에 장령으로 환원시켰다. 제도(諸道)에 분대(分臺)를 파견할 때는 장령을 겸직으로 수여하기도 하였다.   장지골에 사람이 살지 않은 것은 지금부터 수십년 전의 일이다. 이 골짜기는 하도 골이 깊어서 옛날부터 수량이 풍부하여 1945년 이전에 축조한 소류지(小溜池)가 있었는데 그 후 1960년에 몽리면적 30ha의 저수지(貯水池)를 다시 축조하여 풍정마을의 상수원 및 젖줄이 되어오고 있다.      ○ 갯 돌 <바위> : 풍정 웃말 어귀에 있었던 바위. 마을의 지세가 범형국이라 해서 바위를 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곧 개는 범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마을이 가멸(살림이 넉넉해 진다는)해 진다는 뜻에서 마을 입구 좌측에 세웠는데 수년 전에 도난당하였다.   ○ 거문골 <골> : 풍정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당 산 <산> : 풍정 남쪽 대로변에 있는 산으로 완만하게 동서로 향해 가로누어 있다.   ○ 동잠동 <마을> : 풍정 동북쪽 장지골 막바지에 있는 마을로 앞의 못을 막아 골이 험하게 되어 인가(人家)가 없어졌다 함.   ○ 동삿골< 골> : 장지골의 입구에 있는 골짜기   ○ 메팀이 골 <골> : 장지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메만한 금붙이가 나왔다 함.   ○ 백갈둠벙 <둠벙> : 풍정 앞에 있는 둠벙. 큰 웅덩이를 파서 그 물로 농사를 지었는데 경지정리로 없어짐.   ○ 북싯골 <골> : 풍정 아랫말 북쪽 부봉산 산자락에 있는 골짜기. 일명 수북동(洙北洞) 또는 북수동(北洙洞)이라고도 일컬었으며 사천강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조옹골 <골> : 장지골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합다리 <다리> : 풍정 아랫말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다리로 지금은 없어졌다.   ○ 합타리 새미 <우물> : 합다리 밑에 있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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