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2. 예수리(禮樹里)

  정동면(正東面)의 최고봉인 흥무산(興霧山)을 주봉으로 많은 산들이 줄기를 이루며 서향으로 뻗어 나갔다. 힘찬 산파도를 이루며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은 이구산(尼丘山), 그 아래로 굴곡을 지으면서 물결처럼 굽이쳐 나간 서낭당산(城隍堂山)의 산줄기가 끝에 다다라서는 고깔처럼 몽실하게 솟아오른 운곡산(雲谷山)의 자태는 흡사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었다.    예수리는 이들 산줄기 중 서낭당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어나간 산줄기와 봉우리 북서향(北西向) 비탈 아래 사천강(泗川江)을 따라 자리잡은 마을들로 이루어진 법정이동(法定里洞)이다.    예수리를 구성하는 행정마을(行政洞)은 동으로부터 예수(禮樹), 염광(鹽光), 바느실(針谷), 반룡(盤龍)의 4개 부락이 사천읍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예수리도 역시 조선조(朝鮮朝)때 사천군 상주내면(上州內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동계동(凍溪洞) 일부와 반용동 (盤龍洞), 옛 雲谷), 반곡동(盤谷洞, 기왓골) 등을 병합하여 예수리(禮樹里)라 하였다.    예수리란 이명(里名)은 옛적부터 예(禮)를 숭상하는 마을이라 하여 예촌(禮村) 또는 예수정(禮樹亭)이라 한데서 禮자와 樹자를 그대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면(面) 소재지인 대곡(大谷)에서 남서향(南西向) 약 2km 지점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서낭당산 산줄기 너머 수청리, 서로는 국도 3호선을 경계로 사남면 월성리와 사천읍 사주리, 남으로는 서낭당산의 능선따라 사남면 화전리, 북쪽은 사천강 건너 고읍리가 자리잡고 있다.    강건너 고읍리에는 1930년경 사천강의 강줄기를 곧게 내는 바람에 예수리의 일부 땅이 갈라져 나갔다. 현 해태음료(주) 사천공장 지역이 예수리 땅이다.    고을을 지켜 준다는 서낭신(城隍神)의 단묘(壇廟)가 있었던 서낭당산 산정(山頂)에 오르면 사천 일원은 물론 풍광(風光)이 명미(明媚)한 한려수도(閑麗水道)의 검푸른 남쪽 바다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조선 초기 태종(太宗) 때 테메식 산성(山城)을 쌓아 사천의 망루(望樓)로서 사천진(泗川鎭)을 친 곳이었고, 왜구(倭寇)에 대비하여 횃불을 지피던 봉수대(烽燧臺)와 군창(軍倉)이 있었던 산이다. 또한 산줄기 서쪽 비탈에는 가야시대(伽倻時代)의 무덤유적이 산재한 곳으로 사천식(泗川式) 토기류가 출토된 바 있다.    현재 서낭당산 산정에는 옛 신묘가 있었던 터에 조그마한 선황사(仙隍寺)가 들어서 있으며, 산 정상까지 포장도로가 개설돼 옛 문화유적의 자취를 찾으려고 이곳을 찾는 등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 예수(禮樹) 마을    사천읍에서 남으로 사천교(泗川橋)를 지나서 곧바로 왼손편 강변길을 따라 동쪽으로 1.5km쯤 올라가면 들 가운데 아담한 숲이 나타나고 여기서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산기슭에 아늑한 예수마을이 눈앞에 와 닿는다.

    배후에는 해발 209m의 유서(由緖)깊은 서낭당산이 길다랗게 곡선을 이루며 동서로 뻗어 있고, 앞으로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사천강의 봇(洑)물이 울창한 숲의 검푸른 그림자를 담은 채 조용히 흘러 내린다. 그 옆으로 강줄기 따라 펼쳐져 있는 논들에 안겨 있는 이 곳은 전형적(典型的)인 우리 농촌 풍경의 정취(情趣)를 느끼게 한다.      여름이면 마을 앞 냇가에 나가 물장구 치며 목욕하고 버들피리 꺽어불며 소먹이던 시절, 달밤이면 모래 바닥 좁다 하고 씨름하고 뛰놀던 소년 시절, 누구나 찾아와도 어머니의 품속 처럼 포근한 안식(安息)과 추억을 안겨 주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인근 마을인 고읍리가 사천의 읍기(邑基)와 면소재지 그리고 동계역(東溪驛)이 있었던 관계로 고성, 진주, 삼천포 등지로 통하는 거리의 요지(要地)였다고 전하다. 그러나 1909년경 진주~삼천포간에 대로가 뚫리고 면사무소마저 대곡리로 옮겨 가는 바람에 그로부터 한갓 구석진 벽촌(僻村)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산등(능선) 사이의 좁은 골짜기, 맑은 새소리 울리는 울창한 송림(松林)과 시냇물, 마치 유명 사찰(寺刹)로 찾아 올라가는 진입로에 접어든 기분이다.

  풍치(風致) 좋은 예수마을은 산등성이 너머 바느실(針谷)의 자연부락을 포용하는 예수리의 중심마을이다. 옛적에는 사천강의 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는 탓에 우수기(雨水期)가 되면 때때로 강물이 넘쳐흘러 수없는 재해(災害)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꼬불꼬불 갈 지(之)자로 흐르던 사천강을 약 2km쯤 되는 직강(直江)으로 정비한 후로는 수재당할 염려는 가시게 되었다. 따라서 마을 앞에 수중보(洑)가 설치되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이로부터 물대면 논이묘, 물 빼면 밭이 되는 문전옥답(門前沃畓)을 일구어 놓은 것이다.    예수마을에는 일제(日帝)의 잔재(殘滓)인 엄폐호(掩蔽壕 : 보이지 않게 가려 놓은 구덩이나 시설물)가 아직도 동서 산기슭 두 곳에 남아 있다. 이 시설물은 철근 콘크리트로 된 입구의 높이 4.5m, 건평 50평 규모의 아치(ARCH)형인데 1940년대 초반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당시 일군(日軍)의 사천군용비행장(泗川軍用飛行場)을 닦으면서 이곳에다 유류(油類)와 탄약(彈藥) 등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지금은 주민들이 창고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사천교 위 반룡산 밑자락에 2개가 더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부락의 연원(淵源)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했던가. 뒤로 가파른 산세(山勢)를 등지고 물빛 고운 사천강가에 자리잡은 이 예수마을에 그 옛날 언제부터 선인(先人)들이 찾아 들어와 생활의 터전을 잡기 시작하였는지는 여느 촌락과 마찬가지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이 없어 부락의 내력을 소상히 엮어 내기란 실로 막막하다.    그러나 마을 서쪽 산비탈에 5, 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가야고분(伽倻古墳)이 발견되고, 뒷산에는 먼 옛날부터 고을의 수호신(守護神)인 서낭신(城隍神)을 모시는 단묘(壇廟)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사천의 중심인 고현지(古縣地.古邑里)가 인접하고 있다는 점 등을 상고(詳考)해 볼 때, 그 어느 곳보다 먼저 선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문헌상에 나타나는 사천의 토성(土城)인 이씨(李氏), 목씨(睦氏), 황씨(黃氏), 오씨(吳氏)의 4성(姓)이다. 이들 성바지는 모두 사천을 관향(貫鄕)으로한 토성이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그 누군가가 삶의 터전을 일구어 마을을 열었을 것이다. 특히 마을 뒷산에는 대대로 이곳에 살아온 목씨네 선대의 묘가 즐비하고 또 사천목씨선산제단비(泗川睦氏先山祭壇碑)는 이를 말 해 준다. 현재 김씨(金氏-金海), 박씨(朴氏-密陽), 이씨(李氏-泗川), 강씨(姜氏-晋州), 진씨(陳氏-驪陽, 최씨(崔氏-朔寧), 임씨(林氏-安東) 등 어느 성씨가 먼저라 할것 없이 입주하여 부락을 형성하고 예수와 바늘실 합쳐 50여 가구가 오손도손 모여 살고 있다.      ● 서짓골(서재골, 書齋谷)    예수의 동쭉 웃땀(上村)에서 서낭당산으로 오르는 조그마한 골짜기. 옛적에 골안에 글방인 서재서당(書齋書堂)이 있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천읍지>(1832년 간행) 산천조(山川條)에 의하면, “이구산(尼丘山) 밑에 성인동과 성재동이 있으며 동중(洞中)에 단(壇)이 있고 동외(洞外)에는 궐리, 예촌, 예수정 그리고 강당촌(講堂村)이 있다.”라고 씌여 있다.    위 글에서 예촌, 예수정, 강당촌 등은 동외(洞外)에 있다고 하였으니 곧 서낭당산 밑에 있었음을 뜻한다. 강당촌이란 강의(講義)나 의식(儀式) 따위를 하는 큰 마무방이 있는 마을의 뜻인데 즉 서짓골을 지칭한다. 서재(書齋)란 책을 갖추어 두고 글을 읽고 쓰며 공부하는 방 또는 서당(글방)을 말한다. 서당은 이 나라 방방곡곡이 다 그러했듯이 근대적인 교육기관인 학교육이 있기 이전에는 각 마을마다 촌락 공동체의 한문(漢文)을 가르치는 글방이 있었다. 글방에서는 입문서(入文書)인 천자문(千字文)을 시작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통감(痛鑑) 등으로 차차 그 정도를 높여 수학(修學)케 했는데 예수리의 이 서당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 예수(禮樹)숲 (일명 五印숲)    사천교(泗川橋)에서 반룡마을과 예수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강변길을 따라 한참 위로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서낭당산과 바느실로 향하는 산길이 나 있고, 그 위쪽 들가운데 아담한 숲이 있으니 주민들은 흔히 오인(五印)숲이라 일컫는다.

  느티나무, 팽나무, 냇버들 등 주로 낙엽 교목으로 이룩된 이 숲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시달리다 못해 많은 나무들이 고사(枯死)되거나 또는 사나운 태풍에 뿌리채 뽑혀서 넘어지고 게다가 농경지로 침식(侵蝕)당하여 지금은 겨우 300평 남직한 땅위에 20여 그루의 노거수(老巨樹)가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꽤 큰 숲으로서 풍치(風致)가 매우 아름다워 원근(遠近)에서는 이름난 명소로 알려져 왔다.    수령 약 300여 년으로 추측되는 거목들 밑동에는 커다란 공동(空洞)이 생겨나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할 나무들이 많다. 그런데 이 숲이 언제부터 조성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마을에서 제일 연로(年老)하신 분들의 말을 빌리면 어렸을 때 이 숲의 나무들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다만 예수마을의 지세(地勢)가 공결(空缺)하기 때문에 식수비보(植樹裨補)로서 임목(林木)을 많이 심어 그 기(氣)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숲을 조성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옛날에는 마을이 황양(荒凉)한 들판처럼 외부에 완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무엇인가 썰렁하고 부족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이런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선 인위적이라도 숲, 담, 울타리 등을 조성하여 마을을 다소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려는 습속(習俗)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동수(洞藪)라 일컫는 예수숲을 조성하여 앞서 말한 풍수상의 허결(虛缺)함을 보허(補虛)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예수숲은 이른 봄부터 초록빛 새잎이 돋아나면 맑은 새소리 지저귀는 아름다운 숲으로 변한다. 주민들의 안식(安息)과 높이 공간으로서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이 소풍놀이 와서 그네줄 달아매어 그네뛰고 놀던 장소가 되어 주기도 한다. 여름 내내 땀흘리며 들일하다 잠시 쉬던 곳이며 예전에는 인근 주민들이 천렵(川獵)과 회취(會取)를 하기 위해 자주 찾던 숲이기도 하였다.    예수숲을 오늘날 ‘오인숲’이란 일컫게된 까닭은 다음의 일화(逸話)에서 비롯되었다. 즉 구한말(舊韓末) 때인 1901년경을 전후하여 사천군수 윤순백(尹順伯)이 당시 일제(日帝)의 침략 야욕(侵略野慾)이 우리나라에 뻗치게 되자 기울어 가는 국운(國運)을 근심한 나머지 그의 주선(周旋)으로 인근 고을인 진주(晋州), 곤양(昆陽), 단성(丹城), 고성(固城) 등 4개 군의 관장(官長)을 초빙하여 각기 지니고 온 인신(印信.인장 또는 관인)을 이 숲속 나무가지에 걸어놓고 수령(守令)으로서의 당면과제를 서로 진지하게 의논(議論)한 곳이라 하여 후일 오인(五印)숲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군수 윤순백은 본래 진양(晋陽)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해서 어릴적부터 글을 배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 들자 기골(氣骨)이 장대하고 용력(勇力)이 남다른 데가 있어 불우한 가정을 도우고자 관문(官門)에 몸을 담았다고 전한다. 처음 진주감영(晋州監營)의 일개( 捕卒)로서 발신(發身)하여 그로부터 날로 기민(機敏)한 포도(捕盜) 수완을 발휘하게 되었고, 어느새 명포교(名捕校)로서의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가 중년(中年)에 이르렀을 때는 관리들의 도색질이 심하고 민심이 날로 어지러워 도적떼가 곳곳에 일어나서 백성들을 칼로 찌르고 못살게 하며, 또한 해골을 파내어 불을 지르고 재물을 빼앗으니 한가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는 종묘(宗廟)를 근심하고 수령(守令)은 고을의 다스림을 염려하니 이때 그는 의(義)에 격분되어 몸을 날려 도적의 괴수(魁首) 수백명을 체포 또는 죽이니 이로써 나라에 보국(報國)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공이 컸었다. 이 때문에 그는 나라에서 특별히 은전(恩典)을 입게 되었다 하며, 단성현감(丹城縣監 : 1895년 山淸郡으로 편입됨)을 필두로 운봉(雲峰), 사천, 남해 등 여러 고을의 수령직을 역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사천읍 성지공원에 오르면 수양루(洙陽樓) 뜰 아래에 고색이 짙은 8개의 빗돌의 좌우로 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행군수윤후순백애민선정비(行郡守尹侯順伯愛民善政碑)이다.      ● 예수교(禮樹橋)    고성 무량산(無量山)에서 원출(源出)한 연장 26km에 달하는 사천강(泗川江)에는 길고 짧은 10여개의 교량이 놓여 있는데 그 중에 정동면에서만 6개나 되며 이중에 하나가 예수고이다.    예수리와 고읍리를 잇는 길이 72m에 교폭 5m, 교량의 높이 7m의 규모로 1972년 말에 준공된 이 다리는 여느 다리와는 달리 예수마을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宿願事業)의 하나로서 특히 부녀회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한 결과란데 그 의의가 있다.    사천강이 직강(直江)으로 정비되면서 마을 앞에는 사천들과 예수리 들판에 물을 대기 위해 강바닥에 높은 둑을 쌓고 물을 가둬두는 보(洑)가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 예수교가 가설되기 이전에는 예수와 고읍마을 두 주민들은 이 보를 통해 서로 내왕하였으며 또한 유일한 통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우수기에 강물이 불어나면 통행이 안될 뿐 아니라 설사 건넌다 해도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그런 때는 약 2km 하류쪽에 사천교를 우회해서 가는 길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양지역 주민들은 먼길을 걸어서 돌아다니는 것보다 때로는 4~5분이면 거뜬히 건너는 봇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특히 어린 아동들의 등학교가 문제였다. 그래서 보를 지나다가 더러는 실족하여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불상사가 발생하곤 하였다.    이렇게 통행에 불편한 문제를 안고 여러 해를 거듭해 오다가 어느해인가 정월 대보름을 맞게 되었다. 이때도 그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모든 주민이 함께 참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세시적(歲時的) 마을행사가 열렸고 아울러 마을의 오랜 숙원사업의 하나인 교량가설의 구체적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렇다고 당시로선 뾰족한 좋은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을의 부녀회장으로 있던 최옥두(崔玉斗)는 비록 가냘프고 여린 여자들의 힘이지만 우리 부녀회가 힘을 모아 자금 마련에 앞장서겠다고 나선 것이 그것이다.    이로써 부녀회는 최회장을 중심으로 공동체의식 아래 조직적 공동사업을 펼쳐 나갔다. 그 첫 사업으로 산을 오르내리면서 낙엽을 모아 땔감으로 시장에 내다 파는 한편 묘목밭의 제초작업, 공사장의 자갈채취 등 부녀회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꾸준히 자금마련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약 50만원(지금의 가치로 약 8, 9백만원 상당)이란 기금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미담사례가 한 기자(記者)에 의해 지상(당시 부산일보)에 보도되자 당시 김상조(金相朝) 사천군수는 곧 예수마을을 방문하게 되었고, 교량가설에 그것도 남성이 아닌 마을의 부녀회가 앞장서 일하는데 대해 크게 감명 받은 김군수는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뜻 군비 40만원을 지원키로 약속하는 한편 방송기기 구입비조로 금일봉까지 전달하고 갔다.    기대에 부풀었던 주민들은 군에서 지원금이 내려오면 마을에서 마련한 기금을 보태어 위선 다리의 양쪽 옹벽부터 먼저 시공키로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언짢은 일도 있게 마련이어서 군에서 지원금을 받기도 전에 그만 김상조 군수가 통영(統營)군수로 전출해 가버리고 그 후임으로 고창섭(高昌燮)군수가 부임해 온 것이다.    주민들은 새로 부임해 온 고군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지원금은 영달되지 않았다. 그것은 전임자의 약속과는 달리 교량가설의 지원비가 한푼도 없다는 것이며 다음 기회에 군에서 다리를 가설해 준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군수를 만나려고 여러 차례 군수실을 방문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만 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을에서는 교량가설추진위원회(위원장 林漢相)가 발족되어 관계요로에 진정하는 등 적극성을 띄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71년 5월로 접어들고 제 8대 국회의원 선거날일 다가왔다. 이에 앞서 당시 당선이 유력시 되던 민주공화당 출신의 최세경(崔世卿)후보에게 매달려 보기로 하였다. 만약에 당선이 된다면 고려해 보겠다는 약속과 함께 선거 결과는 최후보의 당선이었다. 이로부터 예수리의 교량가설은 당초 마을 부녀회의 끈질긴 노력과 함께 근 5년여만에 빛을 보게 되었고 자유건설(自由建設)의 외상수주로 마침내 예수교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 서낭당산(城隍堂山)    예수마을과 바느실 뒷산.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이구산(尼丘山)에서 뻗어내린 해발 209m의 완만한 산등성이로 형성된 산이다. 봉우리에 올라 뒤를 바라보면 북으로 얼마 안되는 지점에 산천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사천비행장과 사천만이 역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조망(眺望)을 이루며 동쪽과 남쪽은 우람한 이구산과 구룡산(九龍山)으로 둘러 싸여 있다.

  사천의 주산(主山)이면서 진산(鎭山)으로 신성시(神聖視)해 온 북쪽의 부봉산(浮蜂山)과 마주한 이 산에는 옛날부터 사천 고을을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이 있다고 믿어온 산으로 예로부터 정통적 연례행사(年例行事)로서 <사천서낭지신(泗川城隍之神)>을 모시는 서낭당(城隍堂)의 단묘(壇廟)가 있던 곳이다.    옛날에는 각 고을마다 수령(守令)의 제례(祭禮)를 비롯한 읍치(邑治)의 제의(祭儀)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였다. 즉 3단1묘(三檀一廟)라 하여 사직단(社稷壇), 서낭단(城隍堂), 여단(厲壇) 등의 3단과 문묘(文廟)인 1묘가 그것이다. 먼저 사직단이나 여단, 그리고 문묘 등의 제례를 들 수 있겠으며, 조선 전기 이후 이들은 국가의 제의로 표준화되어 해마다 연례행사로 수령이 관속들과 더불어 제례를 담당하였다. 이들 외에 농경 제례의 일부로서 읍치 소재의 서낭당이나 신당 등에서 치르는 대규모 제의가 행해졌던 것이다.    이 중에 사직단이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곡신(穀神)인 직신(稷神)을 제사 지내는 단(檀)을 말하며, 여단이란 여신(勵神 : 불의의 재난이라든지 형벌을 받아 죽는 사람의 혼령을 厲鬼 또는 여신으로 정의했다)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말한다. 그리고 1묘란 동양의 대성인(大聖人)인 공자(孔子)를 비롯해서 그의 학문을 전승했던 여러 유현(儒賢)들을 제사 지내는 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의 향교(鄕校) 안의 문묘(文廟)를 뜻한다.    그런데 위 3단 1묘중 사천의 서낭당은 어느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일까. <고려사 절요(高麗史節要)> 성종(成宗) 15년(996) 가을 7월조에 의하면, 8대 현종(顯宗)의 아버지 왕욱(王郁 : 고려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 사수현(사천)에 귀양살이하다 죽었는데 일찍이 아들 순(詢.뒤에 왕위에 올라 顯宗이 됨)에게 금(金) 한 주머니를 비밀히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금을 술사(術師)에게 주어 현(縣 : 邑基가 지금의 古邑에 있을 때)의 서낭당(城隍堂) 남쪽 귀룡동(歸龍洞 : 지금의 사남면 우천리 陵花峰)에 장사 지내고 장사할 때 반드시 시체를 엎어 묻게 하라”는 대목이 눈에 띄인다. 이것으로 보아 사천의 서낭당은 이미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서낭당산에는 조선조 태종(太宗) 때 사천진(泗川鎭)을 설치하고 비로서 테메식 산성(山城)을 쌓아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략에 사천의 버팀목이 되어 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이 서낭산성은 석성(石城)으로 현의 남쪽 2리에 있는데, 높고 험하여 주위가 558보(步)이며, 성 안에는 샘이 하나 있고 연못이 둘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고 하였다. 이 산성은 조선 초기 읍기(邑基)의 중심인 고현지(古縣址)가 산성밑에 있었으므로 고읍성(古邑城)이라고도 불리운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은 형상이다.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 침곡소류지(針谷小溜池)    예수마을 뒷산 넘어 동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바늘실의 막다른 자시고개 산기슭에 있는 저수지. 저수지 바로 위 산비탈에는 사천관광농원이 자리하고 또 북쪽에는 서낭당산성으로 오르는 산도(山道)가 나 있다. 소류지란 작은 저수지인 보(洑)를 말하는 것으로 관개용(灌漑用)의 물을 하천이나 계곡물을 끌어 들여 담아 놓은 못을 가리킨다. 곧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골안 맨 윗쪽에 둑을 쌓고 흐르는 시냇물을 막아두는 봇물이다.    1963년경에 총 공사비 55만원(지원비 20만원, 水利契 20만원, 경작자 자부담 15만원)으로 만들어진 이 소류지는 둘레가 약 250m정도 되는 소담한 저수지로서 아래에 있는 바늘실, 고래실, 구름실, 와앳골 등 많은 천수답(天水沓)의 젖줄 구실을 해 주고 있다.    이 소류지가 생기기 이전에는 가뭄이 심하게 들면 예수리 골 안의 천수답이 짝짝 갈라지고 나락이 타들어 사람들은 비를 기다리다 못해 마른하늘을 우러러 보면 한숨을 내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일정(日政)때부터 식량증산을 위해 현 위치에 공사를 시작하여 저수지의 기초를 닦았던 것인데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와중에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8.15해방과 함께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역주민들은 저수지의 필요성만 절실히 느껴 왔을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식량증산의 일환으로 비로소 공사비의 일부를 지원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저수지가 조성되면 침수를 우려한 경작 주민들의 반발로 착공(着工)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수리계(水利契. 계장 林漢相)를 조직하여 침수구역의 부지를 매수하는 등 여러 가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고 나서 오늘날의 저수지가 이룩된 것이다.

● 사천관공농원(泗川觀光農園)    사천읍에서 남으로 3km 지점에 있는 산골의 농원. 서낭당산으로 들어가는 예수리 산61-1번지에 위치하고 선황사(仙隍寺)가 마주 보이는 아늑하고 한적(閑寂)한 도시 근교의 관광 농원이다.    사천교를 건너서 곧바로 왼손편의 잘 포장된 예수부락 진입로를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오인(五印)숲 못미처 다시 오른편의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바느실(針谷)과 서낭당산으로 오르는 입구가 나타나는데, 그 맞은편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1990년 농수산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1992년 9월에 개원한 이른바 관광농원으로서, 사천읍 성지공원(一名 山城公園)과 본면의 문화유적지로 아주 유서깊은 서낭당산성(도지정 제132호)과 연계하여 조성한 주말 가족단위의 휴양지로서 총면적은 1만2천평 규모이다.    농원에는 관상수와 계단식 과원이 조성되어 당도(糖度) 높은 사천단감의 생산은 물론 사슴, 흑염소, 토종닭 등을 사육하고 있으며, 농원 앞에는 낚시도 즐길 수 있는 맑고 깨끗한 침곡소류지가 푸른 하늘의 그림자를 물속 가득 채우고 있다.    남해안고속도로를 벗어나 자동차로 15분, 사천공항(泗川空港)에서 7분 거리인 이곳은, 서낭당산의 맑은 정기와 산골의 한적한 정취를 조용히 느끼게 하는 도시민의 휴식처로서 누구나 찾아와도 안식(安息)과 추억을 안겨주는 마음의 고향 같은 농촌풍경의 문화공간이다.

<굼실>

(2) 반룡(盤龍)마을    사천교를 건너 예수마을로 접어드는 진입로를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남서 쪽으로 야트막한 구릉(丘陵)과 반룡산(盤龍山) 밑자락을 깔고 앉아 옹기종기 모여사는 두 마을이 나타난다. 반룡부락이다.

<왯골>

  서낭당산(城隍堂山)의 산줄기가 서쪽으로 흘러 내려 몽실하게 둘러 있는 산 밑에 형성된 들녘을 따라 올라가면, 산자락 끝에 북향으로 자리잡은 아늑한 동쪽마을이 나타나고 이 곳에 다시 밑으로 들길을 따라 서쪽으로 들어가면 양지바른 언덕 비탈진 곳에 서쪽마을이 나타난다.    이 두 마을을 일컬어 반룡(盤龍)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동쪽마을을 반룡동, 서쪽편의 마을을 반곡동(盤谷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역시 반룡이란 지명으로 하나되어 예수리에 속하고 정동면의 20개 행정이동(行政里洞) 중 하나가 되었다.    반곡동은 흔히 ‘와앳골’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사천성(泗川城) 싸움에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에 대패(大敗)한 왜적무리가 사천들의 질퍽한 수논(水畓)을 거쳐 사천강을 간신히 건너 선진성(船津城 : 당시 왜적의 本陣)으로 도망치다가 이곳에서 추격당해 많은 사상자를 낸 곳이라 전한다. 그래서 왯골이라 했다던가.    왯골에는 두 가지의 설(說)이 있는데, 하나는 위에서 말한바와 같거니와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곳에 기와를 굽던 기와굴(가마)이 많이 있었다 하여 기왓골(瓦谷), 와앳골, 따위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후자설이 옳지 않나 생각된다.    마을 어귀 사천강 옆에 자리잡은 반룡산(盤龍山)에는 나무숲이 울창하여 몸집 작은 산새들의 경쾌한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여오는가 하면 봄, 여름 왜가리와 해오라기의 철새 서식처(棲息處)로 떼지어 날아다니는 광경은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정취(情趣)를 느끼게 한다.

  ● 부락의 연원(淵源)과 지명유래    반룡부락도 그 입지(立地)의 조건상 예수마을과 마찬가지로 먼 옛날부터 선인들이 들어와 살았다는 흔적만 들어났을 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막막하다.    그런데 반룡 부락은 전술한 바와 같이 야트막한 구릉 밑자락을 깔고 앉은 동쪽 마을과 진.삼국도를 배후로 한 서쪽 마을로 구성돼 있다. 옛 고로(古老)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동쪽 마을은 임진왜란 때 영산신씨(靈山辛氏) 일가(一家)가 처음으로 입향(入鄕)하여 정착(定着)하였다고 한다. 그 연유는 왜란이 일어나자 창녕(昌寧)에서 창의(倡義)한 신압(辛砷)이 당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거천으로 별장(別將)이 되어 진주성(晋州城) 싸움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그때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은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외(城外)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는데, 그 후임으로 신압이 현감으로 부임해 온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편, 서쪽 마을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기와를 굽던 마을이라 하여 지금도 흔히 와앳골(瓦谷)이라 일컬는데 어떤 성씨가 먼저 들어와 정착하였는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마을 아래쪽 반룡산 기슭에 밀양박씨(密陽朴氏) 문중의 제각(祭閣)인 계승각(繼承閣)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씨네의 일가가 대대로 살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은 지명의 유래인데 반룡(盤龍)이란 땅이름은 문자 그대로 풍수상의 지세(地勢)가 마치 소반(盤) 위의 용(龍)이 사리고 있는 형상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부락 본래는 동서 두곳으로 나누어져 야트막한 산자락 밑에 있는 동쪽 마을을 반룡동(盤龍洞)이라 하였고, 서쪽 골안인 진.삼국도변 좌측에 있는 마을을 반곡동(盤谷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이후부터 반룡으로 일원화(一元化)되어 반곡이란 이름은 사라졌다.    그런데 반룡과 반곡이란 두 지명은 오랜 옛날부터 전래해 온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는 구름실(운골, 굼실, 雲谷), 기왓골(와앳골, 왯골, 瓦谷) 따위로 불리어진 것이 그것이다. 일테면 반룡의 전신은 구름실이 되며, 기왓골의 후신은 반곡인 셈이다. 오늘날에도 흔히 반룡부락의 두 지역을 구분해 일컬을때 굼실이니 또는 와앳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왓골은 사천교에서 남쪽으로 언덕길 왼손편 구릉 너머에 있는 마을로서 오랜 옛날부터 골 안에 기와를 굽던 곳이어서 기와굴(가마터)과 기와집(瓦家)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가마터가 있던 주변에는 기와조각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주위의 논밭을 굴모티(가마굴이 있던 모퉁이라는 뜻) 전답(田畓)이라 한다. (瓦谷-盤谷)    구름실(굼실)은 기왓골 맞은편 구릉 밑에 사천강을 굽어보고 있는 마을로서 본래는 지금의 염광(鹽光)마을을 포함하는 동쪽 골안 일대를 망라하여 일컬었었다. 사천목씨(泗川睦氏) 가보(家乘譜)에 의하면 서기 1800년을 전후하여 매오(梅塢) 목윤평(睦允平)이란 분이 운곡(雲谷)에 살다 죽었는데 그의 묘도비(墓道碑)가 마을 어귀(현 반룡부락 입구 松林)에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반룡, 반곡의 지명은 대충 어림잡아 1800년대 후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안개가 끼는 날이면 짙은 안개나 연기가 골안을 가득 채우고 몽실하게 솟은 여러 산자락을 휘감는다. 그래서 운곡(구름실)이라 했다던가. 운곡에는 옛적 산비탈에 조그마한 암자(庵子)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하루에 길가던 중에 암자의 노승(老僧)을 찾아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갔다는 다분히 <고문진보>에 실려있는 글과 흡사한 고사(故事)가 전한다. 이를 소개하면,       “소나무 아래에서 아이에게 물었더니 스승은 약을 캐러 갔다고 말한다. 다만 이 산 속에 있기는 한데 구름이 짙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       위의 글은 무본(無本)이라는 중이 산속에 사는 도사(道士)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면서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 사천강의 수리시설(水利施設)    사천에서 가장 길고 크다하여 사천강(泗川江)이라 일컬는다. 정동면의 한가운데를 관류하며 골안 들녘으로 흘러 내리는 수많은 골짜기의 시냇물이 한데 모여 상류 객방(客坊)에서부터 학촌, 장산, 수청, 고읍, 예수의 논들을 적셔주면서 사천읍 용당리를 마지막으로 사천만에 흘러 들어간다. 경상남도 준용하천(準用河川)이다.    연장 26km나 되는 이 하천에는 수많은 교량과 수리시설의 보(洑)가 설치돼 있을 뿐 아니라 생활용수의 취수원(取水源)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반룡부락의 골 안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탓에 옛날부터 사천강을 앞에 두고도 항상 천수답(天水沓)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뭄이 심하게 들면 사람들은 비를 기다리다 못해 마른 하늘만 우러러보며 한숨 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한해(旱害)대책의 일환으로 1978년 이영우(李永宇)면장 당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업비 1천75만5천원(지원75%, 주민부담 25%)으로 냇가에 양수(揚水場)을 설치하고 수리시설을 완비함으로서 골안 들녘이 모두 한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3) 염광(鹽光)마을    예수 부락에서 서남쪽 고래실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서낭산의 산줄기가 바늘실(針谷)을 감사고 서쪽으로 흘러 내려 마치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처럼 몽실하게 솟은 두 봉오리 밑자락에 자리잡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형성된 이 마을은 한센씨병(Hansen氏病, 나병) 환자들의 정착촌(定着村)으로 정동면의 20개 행정이동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산비탈 외진 곳에 한센씨병환자 한 집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天主敎) 어느 교회(敎會)에서 주선한 나병환자 몇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살았으나 생활이 어렵게 되자 그만 다른 곳으로 흩어져 갔다고 한다. 그 뒤 1960년대 후반경,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주소를 둔 대한기독교(大韓基督敎)의 제1교회(長老敎會)가 이곳의 임야(林野)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교회를 짓고 한센씨병 환자들의 정착촌을 만든 것이 오늘의 염광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구름실(雲谷)의 지역으로 고래실이라고도 하는데 고개를 넘으면 진입로인 진.삼국도가 나타난다. 염광(塩光)이란 성경(聖經)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이 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현재 총 가구수 40여호에 120명의 주민 대부분이 예수리교회를 중심으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생업은 양계(養鷄)와 양돈(養豚)을 위주로 하여 더러는 소도 기르며 밭농사도 짓는다. 교회는 처음 1969년에 지었다가 신도수가 늘어나자 1986년에 다시 지었다.      ● 고분유적(古墳遺蹟)    바늘실(針谷)의 서쪽 그러니까 염광마을에 드리워져 있는 예수리 산 64번지에는 A.D. 5, 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가야시대(伽倻時代)의 고분유적이 발굴된 바 있다. 이 무덤유적은 젖봉모생새를 한 완만한 봉우리 산비탈에 농경지(農耕地)를 개간(開墾)하면서 처음으로 지상에 노출된 것으로 1977년 12월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학술조사반에 의해 6일간에 걸쳐 긴급 발굴.조사한 곳이다.    동대학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발굴한 무덤은 7기(基)로서 이중에 독무덤(甕棺墓.옹기로 만든 관) 1기가 포함돼 있다. 무덤의 유구(遺構)는 가야시대에 있어 권위를 상징하는 왕이나 수장(首長)급의 고분(古墳)유구와는 달리 대체로 단조로운 민묘(民墓)로서 경주(慶州)나 창녕(昌寧)지방의 민묘류처럼 분구(墳丘)가 있었던 흔적이 없을뿐더러 축조방식도 수혈식(竪穴式)의 돌널무덤(石棺墓) 같은 구조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얇은 돌널(板石)을 서로 맞춰 짠 돌널무덤의 형식을 취했는데, 완원소성(還元燒成)의 토기와 철기(鐵器) 및 황금(黃金) 사용 시기까지 석관묘제(石棺墓制)의 유풍(遺風)을 뽄딴 무덤이라 결론지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4점인데 토기류(土器類)와 치레걸이(裝身具) 등 껴묻거리(副葬品)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중에 토기류는 치레걸이에 비해 대체로 적은 편인데 그 종류로는 목항아리(長頸壺) 4점, 굽다리접시(高杯) 9점, 손잡이 접시(把手杯) 2점, 뚜껑(篕) 5점, 토제가락바퀴(土製紡錘車) 1점 등이 나왔다. 굽다리 접시는 투창(透窓) 하나가 세로로 길게 뚫여 있어서 전형적 가야토기(伽耶土器)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이에서 보듯이 예수리의 고분인(古墳人)들은 일찍이 사물국(史勿國)이란 조그마한 나라를 세우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재래의 유습(遺習)을 그 자리에서 지키며 외래문물(外來文物)의 수입과 토기류를 제작하여 삶을 누려온 토착인(土着人)들의 분묘라 할 것이다.    특히 출토유물 가운데 수평구연목항아리(水平口緣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의 출현은 이 지역이 5, 6세기경 가야세력권에 포함되는 지역임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것은 오늘날 문헌사학에서 말하는 5, 6세기의 대가야연맹(大伽耶聯盟)의 세력권이 고령(高靈)을 맹주(盟主)로 하는 낙동강 서안(西岸)의 지리산 주변과 섬진강(蟾津江) 유역에까지 미쳤으며, 이는 고령계토기(高靈系土器)의 분포권과 굽다리접시와 수평구연목항아리를 표지(標識)로 하는 이른바 사천(泗川), 고성식(固城式) 토기의 분포권임에서 더욱 그러하다.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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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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