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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1. 고읍리(古邑里)

   고읍리는 본래 정동면의 전역(全域)과 함께 사천군(泗川郡) 지역으로서 고려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 읍기(邑基 : 郡縣의 관청이 있는 곳)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세종(世宗) 을축년(乙丑年 : 1445년) 봄에 사천읍성(泗川邑城)을 쌓고 읍기를 천도(遷徒)해감으로써 자연히 구읍(舊邑), 읍촌(邑村), 고읍촌(古邑村), 고읍동(古邑洞) 따위로 불리었다. 읍이 없어진 후 정동면은 본래 상주내면(上州內面)과 동면(東面)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다가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상주내면과 동면을 통합하여 읍동면(邑東面)이 되면서 면소재지(面所在地)가 되고, 고읍(古邑)을 비롯하여 예수(禮樹), 화암(花巖), 풍정(豊井), 수청(洙淸), 대곡(大谷), 장산(獐山), 감곡(甘谷), 학촌(鶴村), 소곡(所谷)의 10개리(里)로 개편 관할하였다.

<본동 연혁 및 동사신축기문>

   1931년에는 종전의 읍동면을 다시 정동면이라 개칭하였고, 이에 앞서 1920년경 면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사.고선(泗川~固城線)의 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이 도로가 면소(面所) 밖으로 벗어져 나갔기 때문에 입지(立地)의 조건상 불편한 위치가 되어 1934년 면소를 지금의 대곡리 숲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읍리는 그 옛날 읍기에서부터 면소재지를 거쳐 오늘과 같은 한적(閑寂)한 마을로 변모하였다.

  동쪽에는 널따란 들녘을 경계로 대곡리와 수청리, 남쪽은 사천강(泗川江) 건너 예수리, 서쪽은 국도 3호선(晋.三線) 건너 사천읍 사주리, 북쪽에는 역시 사천읍과 본면 화암리가 자리잡고 있다.    고읍리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부락으로는 사천의 황금평야라 일컫는 고랑들(고랭이들) 가장자리에 웃말(上村, 웃땀)과 아랫말(下村, 아래땀), 최근에 분동(分洞)된 동계(東溪)1 마을 등 세 개의 농촌과 그리고 진.삼선 국도변에 아파트촌인 동계2 마을 등 모두 네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사천시도상(泗川市圖上) 정동면의 생김새가 마치 한 마리의 멧돼지(山猪)가 머리를 곧추세워 서향(西向)으로 힘차게 내닫는 형상인데, 동쪽에는 숱한 봉우리들이 키를 재듯 중첩되어 있고, 서쪽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두 산줄기가 널따란 들녘을 에워싸고 있으니 여기가 고읍리이다. 고읍리란 지명은 고읍동과 동계동을 편입한 법정이동(法定里洞)의 명칭으로서, 그 유래는 문자 그대로 오랜 역사의 누적이 깔려 있는 읍치(邑治)의 중심이었던 까닭에서 따온 지명이다. 이렇듯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누려왔던 고읍리는 정동면에서 뿐 아니라 사천에서 가장 먼저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는 사실은 구전(口傳)이나 여러 정황(情況) 등으로 미루어 봐서 분명한데, 언제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도읍(都邑)을 정하고 살기 시작했는지 현재로서는 그 자취를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 하지만 사천강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변이나 구릉지대에 숱한 선사유적(先史遺跡)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고고학상(考古學上)에 있어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이미 목숨줄을 대고 살기 시작하였지 않나 추정된다.    그것은 이 시대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로는 먼저 농업의 정착화(定着化)로 집터는 전시대(新石器時代)보다 그 규모가 크고 집단으로 모여 살았기 때문인데, 고읍리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먹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적에 안심하고 삶의 터전을 닦을 수 있는 곳은 무어니해도 산골이나 갯가보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널따란 들판이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고읍땅은 그 어느 곳 보다 물 좋고 기름진 선상지(扇狀地)의 땅이여서 일찍이 삶의 터를 일구었을 것이다.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1) 고읍의 웃말(上村)과 아랫말(下村)    북쪽에는 사천의 옛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인 부봉산(浮蜂山)이 우뚝 솟아 있고, 남쪽에는 나직막하면서도 유연한 곡선(曲線)으로 내달은 서낭당산(城隍堂山)이 널따란 사천들(古浪들)을 그림처럼 둘러있고, 그 산자락 밑으로 산 그림자 비친 사천강 냇물이 미그러지듯 흘러간다.    사천읍에서 남으로 사천교(泗川橋) 못미쳐 왼손편에 아파트촌 한가운데를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나타난다. 동쪽으로는 동계마을을 지나서 이 산 저 산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청아(淸雅)한 산새들의 울음소리 들으며, 산이 뿜어 내는 향기와 들에서 물결치는 볏잎의 풋풋한 냄새를 맡으며 널따라고 잘 포장된 들길을 한참 걸어 올라 가노라면 아랫말, 웃말할 것없이 온통 단감밭으로 뒤덮힌 전원(田園)마을이 나타난다.    여기가 고읍리 중심마을이요, 사천에서 제일 먼저 읍(邑)이 열렸다는 읍치(邑治)의 중심이 된 마을이다. 멀리 동남쪽 하늘 높이 솟아오른 봉대산(鳳帶山)과 흥무산(興霧山)에서 갈려 나온 산등성이들이 남북으로 둘러 있는 분지(盆地)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한적(閑寂)한 마을이다. 이 중에 웃말(웃땀)이 옛 읍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며, 지금은 아랫말(아랫땀)이 웃말보다 더 큰 마을이 되었고, 총사(洞舍)는 물론 면소재지였던 마을이다. 그리고 동사 옆에는 사회복지법인 은하어린이집이 소재하여 꿈나무들의 요람이 되고 있다.      ● 마을의 연원(淵源)    향토사적(鄕土史的)으로 유구한 역사성을 지닌 고읍촌에 언제부터 언떤 성씨(姓氏)들이 처음으로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잡았던 것일까. 지금으로선 아무런 기록이나 구전(口傳)으로 전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경상도 지리지 : 慶尙道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 의하면 사천에는 토성(土城)이 넷이니 목씨(睦氏), 이씨(李氏), 황씨(黃氏), 오씨(吳氏)인데 이들 4성은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고 씌여 있다. 이에 토성이란 관향(貫鄕)을 사천으로 하는 토착 상류계급(上流階級)에 속한 선주성씨(先主姓氏)를 뜻한다. 그러므로 고읍이 옛 읍일 때 4성중 어느 성씨가 먼저라 할것 없이 모두 이곳에 입향하여 촌락을 형성 했으리라 추정된다. 얼마 전가지만 하여도 사천목씨가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한두집 밖에 살지 않으며, 현재 강씨(姜氏), 구씨(具氏), 김씨(金氏), 문씨(文氏), 박씨(朴氏), 이씨(李氏), 장씨(張氏), 정씨(鄭氏), 최씨(崔氏) 등의 성바지가 촌락을 형성하고 총 가구수 88세대가 모두는 아니지만 전통 미맥(米麥)생산 외에 단감의 과원(果園)을 처음으로 일구어 부촌(富村)으로 살고 있다.      ● 마을의 지명들    앞서 고읍에는 웃말과 아랫말로 형성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취락의 구성상 그 방위에 따라 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웃말을 웃땀, 아랫말을 아랫땀이라고도 했는데, ~땀의 뜻은 본래 연못 담(潭)에서 온 것으로 주로 평야계(平野系)에 속한 지명이라 하겠다.    부락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널따란 고랑들을 비롯하여 굽은 등, 뒷들, 백지골, 솟내, 옥터(옥배미), 작답(作畓), 조산(造山) 따위의 땅이름들이 있다. 이중에 고랑(古浪)들은 마을에서 동서북으로 드넓게 펼쳐진 들녘을 이르는 말로서, 더러는 고래들이라고도 하였다. 아마도 고래등 처럼 크고 넓다는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굽은 등(嶝)은 구분딩이라고 하는데, 웃말과 아랫말 중간 지점에 자리한 야트막한 구릉(丘陵)을 두고 일컫던 지명이다. 경지정리때 없어졌다. 그리고 솟내는 굽은등 앞에 있었던 못(池)으로 옛날에는 병풍지(屛風池)라 했는데, 이것 역시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조산 또한 웃말과 아랫말 중간 지점에 있었던 인공(人工)의 산이었다. 곧 마을 지세의 결함을 방비하거나 보충 혹은 변경할 수 있다는 논리(論理)에 기초한 풍수(風水) 비보(裨補)로써, 마을의 안정을 꾀하는 방책으로 인위적 조산(造山)을 말한다. (다음의 고읍땅은 行舟形 참조)    옥터는 웃말 동쪽에 있는데 옛날 읍기가 고읍에 있을 때 죄인을 가두어 두는 옥사(獄舍)가 있었던 자리이다. 지금은 모두 논밭으로 변하여 옥터 또는 옥배미라 일컫는다.      ● 면소(面所)의 소재지였던 마을    이른바 ‘옥산구악읍기야(玉山舊嶽邑基也)’란 말이 있는데 이는 사천의 옛 안산(案山)인 옥산(玉山 : 지금은 산체가 모두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섬) 밑자락이 읍기(邑基)가 있었다는 뜻이며, 이곳이 지금의 웃말이다. 웃말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말(下村)에는 면제(面制)에 의한 면소(面所)가 있었으니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이다. 고읍리의 아랫말은 서기 1914년부터 읍(정)동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로서 면(面)의 행정 중심지였으나,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경 사천~고성간의 도로(국도 33호선)가 개통되고 동부의 많은 산간지역을 관할해야 할 면으로서는 이곳 고읍이 입지(立地) 조건상 도로가 외각으로 벗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한 위치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1934년경 최도경(崔道卿) 면장 당시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대곡숲으로 면소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찰주재소(警察駐在所)는 면소재지에 있게 마련인데 정동면의 경우는 그 당시 지금의 장산리(獐山里) 노천(魯川)마을에 있었다. 그러다가 대곡과 노천을 잇는 나무다리(木橋)가 어느 해(연대 미상) 홍수로 인해 유실(流失)되는 바람에 면소보다 먼저 현 위치인 대곡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2) 고읍땅은 행주형(行舟形)    흔히 마을 터를 고를 때는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마을 뒤편에 산이 있고 앞쪽에 내가 흐르는 지역을 고른다. 여기에 마을 전체가 남향(南向)한 양지(陽地) 바른 곳이면 더욱 좋은 터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고읍을 둘러 있는 산들 중 사천의 옛 주산(主山)이면서 진산(鎭山)으로 신성시(神聖視)해 온 현 부봉산(浮蜂山)이라던가 주산과 대응하는 안산(安山)인 옥산(玉山)이 있었고, 그 앞에는 사천강(泗川江)이 흘러내려, 배산임수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지세(地勢)의 외관(外觀)에 의해 그 감응(感應) 여부를 판단하는 양기(陽基) 풍수(風水)의 형국론(形局論)에서 고읍 땅은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전한다. 풍수에서 양기란, 죽은 자의 안택은 음택(陰宅)에 대해 양(陽)은 산 자의 주택지 또는 도성 읍촌(都城邑村)에 해당되는 술어이며, 대개의 주군 도읍(州郡都邑)은 이런 양기 풍수에 입각하여 건읍(建邑)되었다고 하며, 고읍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읍이 된 것이다.    따라서 행주형이란, 지세의 외관에 의해 그 성국(成局)의 형상 여하에 따라 이름 지어진 한 유형(類形)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실은 배(舟)가 물위에 떠 가는 형상을 의미 한다. 곧 도읍이나 마을의 터를 ‘떠나가는 배’로 여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여러 믿음과 금기(禁忌)가 생기고 대비책도 마련되는 것이다.    물위에 떠서 장차 떠나려고 하는 배에는 항상 사람과 물건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 형국에 읍이나 마을이 들어서면 그 융성과 발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곧 많은 사람과 물산(物産)이 모여 흥청거리는 풍요(豊饒)의 중심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큰 부자가 끊이지 않으며, 또한 배는 그 가운데 부분이 가장 안정되어 있듯이 사람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 올수록 잘 산다는 속설(俗說)도 전한다.    더욱이 이곳 행주형 지세의 읍기 또는 마을에 키, 돛대, 닻, 배말뚝, 뱃사공 그리고 뱃머리 등 배의 순항(巡航)에 필요한 여러 부대 시설물을 갖추게 되면 아주 대길(大吉)이지만, 그 중의 하나만 구비해도 좋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으면 이 배는 안전을 얻지 못해 전복하던가 또는 유실될 우려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땅에 우물을 파는 일은 마치 배밑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으므로 절대로 삼가지 않으며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행주형의 땅에는 배의 안전과 순항을 위한 여러 시설을 갖추고자 한다. 그래서 풍수의 법술도 자연적 성국을 발견한다는 것에서 일보 나아가서 인위적으로 길국(吉局)을 만드는 데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 인위적 풍수법의 대표적인 것이 진호(鎭護)를 위한 풍수탑(風水塔)이며 결함의 보허(補虛)를 위한 조산이고 방살위호(防殺衛護)를 위한 염승물(厭勝物)인 것이다. 그래서 행주형의 땅에는 그 주변에 있는 적당한 산, 나무, 언덕 등은 곧잘 배의 시설이나 장치로 관념(觀念)돼 온 것이다.    예컨대 고읍 땅도 행주형으로서의 결함을 보허하기 위해 조산(造山)이라던가 배말뚝, 그리고 돛을 상징하는 이팝나무, 굽은 등, 대밭 자리가 있었다. 이 중에 배말뚝은 동서로 2개가 서 있었는데 1970년대를 전후하여 고읍지구 경지정리(耕地整理) 때 모두 제거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팝나무 한 그루 뿐이다. 닻과 배말뚝은 배 모양의 땅이 어떠한 홍수와 풍랑에서도 표류하지 않고 정박(碇泊)할 수 있도록 안정시키는 경우를 상정(想定)해서 설치하였던 것이다.      ● 이팝나무    고읍리의 웃말과 아랫말 중간지점인 북쪽 들 가운데 서 있다. 본래는 풍수상에 지세의 결함을 보허(補虛)하기 위해 만든 조산(造山)이 있었으나 1970년대 경지정리로 조산은 없어지고 이팝나무 한 그루만 조금 높다란 부지에 서 있고 이곳이 배 모양의 형상이기 때문에 돛의 구실을 한 나무라고 한다. 수령 약 600년 가량되는 이 나무는 둘레 3.5m, 높이 10m 안팎으로 잎이 무성할 때는 약 107m2 내외의 그늘이 지면 꽃이 잘 피면 풍년이 들고 잘 안피게 되면 흉년 들었다는 속설이 있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일컬어 ‘헌누더기나무’라고도 하는데 꽃이 만발 할때쯤 멀리서 바라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팝나무>

  이 나무는 물푸레나무과(木犀科)의 교목(喬木)으로 잎은 둥글고 넓은 타원형 혹은 둥근타원형으로 봄철에 빛이 희고 향기로운 꽃이 핀다. 한창 필 때에는 눈이 쌓인 듯 하는데, 그래서 주민들은 헌누더기나무라 했는지 모른다. 꽃진 뒤에 핵과(核果)가 열리며 정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현재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주민들의 아낌을 받고 있다. 옛날에는 당산제(堂山祭)라 하여 해가 바뀌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당산(堂山.造山) 제단 일대를 깨끗이 청소하고 황토를 펴고 이 나무에 솔가지를 꺾어 왼새끼에 매달아 금줄을 쳐 놓고 마을의 안녕과 평안 그리고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3) 동계(東溪)1 마을    사천들(고랑들) 남쪽 가장자리에 있는 아늑한 전원(田園)마을. 진.삼선(晋.三線) 국도에서 왼손편 동쪽으로 약 1km 지점이며 마을은 들녘과 내를 향하여 조금 높다란 둑(堤防) 하나로 서쪽은 동계2, 동쪽은 동계1 마을이다. 정동면 20개 행정이동(行政里洞)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지역인 국도(3호선)변의 서쪽이 주거공간으로서 날로 발전하게 되자 1990년 4월 남북으로 가로지른 배수로(排水路)의 제방을 경계로 동계1과 2로 분동(分洞)하였다.

   동계1은 그 위치상 동남북 세 곳에 마을들이 꿈꾸듯 조용히 엎드려 있으며 이 중에 남쪽 마을은 해태음료(주) 사천공장 들머리에 있고, 마을 회관이 자리한 중심마을이다. 동쪽 마을은 들길 따라 고읍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길가 왼손편에 최근 새로 조성된 집단 이주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북쪽 마을은 남쪽 마을 못미쳐 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천강의 냇물이 상류쪽에서 남쪽 마을 윗편을 굽이돌아 흘렀기 때문에 우기(雨期)때가 되면 홍수 피해를 자주 당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 하천(河川)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약 2km에 달하는 사천강의 직강공사(直江工事)가 이루어지면서 그로부터 수해를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 때 상류쪽 둑이 터지는 바람에 엄청난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서쪽으로눈을 돌리면 높고 낮은 아파트촌의 건물이 지척에 보이고 그 뒤 멀리 지리산(智異山)의 길게 뻗어나간 산준령(山峻嶺)이 아슴하게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600년전 이 마을에 역(驛)이 들어 서면서 신역(新驛)이라 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동계역이라 고쳤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래서 역이 있었다는 뜻으로 역촌(驛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총 가구수는 102세대로 이 가운데 거의 절반이 되는 49세대가 비농가이다. 농촌 마을로서는 이렇게 비농가가 많은 까닭은 생활의 중심권이라 할 수 있는 사천읍과 인접한 탓도 있겠으나, 앞서 말한 이주단지의 조성으로 산업경제의 도시 인구가 전입해 살기 때문이다. 널따란 황금벌에 수원(水源)이 풍부하고, 게다가 사천읍이 인접하여 근교농업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농가는 전통 미맥(米麥)을 위주로 시설채소 및 양송이 등을 재배해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고소득 작목인 단감의 재배기술이 보편화 되어 마을 이르는 곳마다 과원이 조성되어 새로운 소득원으로 부촌(富村)으로서의 꿈을 다져나가고 있다.      ● 지명 유래와 동계역(東溪驛)    흔히 주민들 가운데서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명을 호칭할 적에 정확하게 동계라 하지 않고 뎅기라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동녘의 동(東)자를 뎅이라 그릇 발음한데 불과하다. 그러면 동계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 유래를 살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세종대왕 연보(世宗大王年譜)> 세종 19년(1437) 11월조에 의하면, “경상도의 함안현(咸安縣)의 신역(新驛)은 파수(巴水)로 하고, 사천현(泗川縣)의 신역은 동계(東溪)로 고쳐 부르기로 하다”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약 560년 전부터 역이 설치되므로서 비로서 동계라는 지명이 생겨났지 않나 여겨진다. 그리고 역이 있으므로서 역촌(驛村)이란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동계(東溪)라는 지명은 그 입지(立地) 조건으로 보아 전연 걸맞지 않은데도 왜 동계라 일컬었던 것일까. 마을에 사는 고로(古老)들에게 물어 보아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다만 사천강의 한 물줄기가 옛날에는 이 마을 한가운데를 흘러내렸는데 마을 위 동쪽에 깊은 소택(沼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동계의 <東>자는 떠오르는 해(日)가 나무(木)에 걸렸으니 곧 동녘이지만 크다는 뜻이 되겠고, 계(溪)자는 시내계(谿)와 동의어로써 큰 물이 흐르는(川澗水注) 시냇가에 있다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동계 마을에는 맑은 시냇물이 사시장춘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사천에는 두 역이 있어 하나는 관율(官栗)이요, 또 하나는 동계역이다. 역(驛)이란 이미 신라,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관용(官用) 또는 군용(軍用)의 대표적 육운(陸運)의 교통 통신 기관으로 가장 확실하고 상세한 정보(情報)연락 수단으로서 아주 중요시 했다.    특히 조선시대의 역은 전국적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는데,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는 대개 30리(里)마다 역을 두어 역마(驛馬)를 배치하여 공문(公文) 전송(傳送) 이외에 공무 여행자에게 역마를 제공하고 그 밖에 진상(進上), 토산품의 공납물(貢納物) 수송 등을 담당케 하였다. 역마의 이용을 위해서는 그 허가증인 마패(馬牌)가 발급되었다.    관리들의 품계(品階)에 따라 마패 수의 차등(差等)이 있었으며, 발급되는 마패에는 소정의 수대로 마필(馬匹)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각 역에는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의 관리와 공역(公役)을 담당케 했다. 또 역에는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의 셋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동계역은 대로의 찰방역(察訪驛)인 소촌역(召村驛 : 종 6품역)에 소속된 소로에 해당되는 역이었다.    그리고 역을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역위전(驛位田)이 지급되었는데, 대로는 20결(結 : 논밭의 단위), 중로는 15결, 소로는 5결이 지급되었고, 역의 장(長)은 2결, 부장(副長)은 1결 50부(負), 급주졸(急走卒)은 50부를 주었으며, 마전(馬田)은 대마(大馬) 7결, 중마(中馬) 5결 50부, 소마(小馬)가 4결이었다. 소로역인 동계에는 대마 1필(匹), 역마 2필, 복마(卜馬) 3필이 있었고, 역리 5인 역노비(驛奴婢) 10인 안팎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어떤 집안의 성적호구장(成績戶口帳)을 보면 대대로 역리를 세습(世襲)한 경우가 있는데 그 사례를 예거하면 다음과 같다. 즉 사천현 상주내면 동계리 제3통(統) 3호(戶)에 적(籍)을 둔 김병순(金秉舜. 年48, 本 金海)이란 분은 1876년 당시 진주 소촌역(召村驛)의 역리였는데, 그의 증조(曾祖) 유관(有寬), 조고(祖考) 성택(聖澤), 부조(父祖) 철득(哲得), 이렇게 4대가 내리 역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4) 동계(東溪)2 마을    국도 3호선을 중심으로 서쪽편의 사주리(泗州里)와 마주한 마을. 마을이라 이르기보다 최근에 현대식 고층건물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전원(田園) 아파트촌이라 일컫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나 싶다.

  정동면의 최서단에 위치한 이 곳은 옛날에는 대동(大東) 및 풍국정미소(豊國精米所 정부양곡도정공장)와 수십채의 인가(人家)가 도로가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산업화 과정에서 1970년대에 사천군이 도시계획을 수립하면서 동계지역을 준공업지대로 지정한 적이 있었다. 이로부터 처음 들어선 공장이 현 해태음료(주) 사천공장의 전신인 창원물산(蒼園物産)이 행정상으로는 예수리이지만 동계1 마을 위쪽에 들어섰고, 그 다음이 현 한보아파트(1차) 자리에 남창농산(南昌農産)이 들어섰다. 이들 공장은 노동집약적인 형태로 양송이 및 물엿 등을 가공 생산했는데 경영불합리로 마침내 도산(倒産)하고 말았다. 그 뒤 들어선 기업이 서강유업(西江乳業)이었다.    이곳이 쾌적한 생활 공간으로서의 전원 아파트단지로 발전하게 된 시기는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때문에 농촌인구의 감소 추세와는 달리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초래하였고, 이에 따라 1990년 4월 동계 부락에서 분동(分洞)하여 동리명을 동계2라 하였고 정동면의 20개 행정리동(行政里洞)중 하나가 되었다. 이로써 면내에서 마을사가 가장짧은 동네이면서 가구수는 가장 많은 신흥마을로 탈바꿈 하였다.    오늘날 동계2는 입지(立地)의 조건상 배후에는 넓은 늘녘이 있어 주위 환경이 쾌적할 뿐 아니라, 생활권이 중심인 사천읍이 근접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 근린(近隣) 농공단지(農工團地)와 삼성항공(三星航空)이 들어섰고, 또 진사공단(晋泗工團)이 조성됨에 따라 앞으로 더욱 발전할 전망이다.    현재 각 아파트의 입주 현황을 보면 삼전아파트가 42세대, 대흥아파트 102세대, 유정아파트 1, 2차 합쳐서 117세대, 한보아파트 1차 149세대, 2차 350세대 그리고 일반 가구 35세대 등 모두 총 844세대(입주예정 포함)가 살고 있다. 이 밖에 정동농협 서부지소를 비롯하여 성모(聖母)의원, 대흥목욕탕, 주유소, 약방, 슈퍼마? 등의 편의시설이 즐비하다.      ● 도로(道路)가의 선돌(立石)    고읍과 동계1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편 첫 머리에 <동계 마을> (1985. 6. 30 立)이라 새긴 표석(標石)과 <사회복지법인 은하어린이집(1.4km)>이라 쓴 안내표지판이 서 있는데 그 옆에는 높이 1m쯤 되는 방형(方形) 빗돌이 또 서 있다. 주민들 말에 의하면 이 선돌은 옛날 동계역이 있을 때 하마비(下馬碑)로 세운 것이라며 본래는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200m쯤 되는 거리 길가에 서 있던 것을 1960년대 후반 동계 일대의 경지정리로 이 곳에다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선돌이 주민들 말처럼 만약 하마비라면 비면에 <하마비> 또는 몇자의 글이라도 새겨져 있어야 하는데 그냥 자연석을 조잡하게 쪼아 만든 선돌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하마비란, 조선시대에 있어서 계급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갈 때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이를테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새긴 돌비석을 말한다. 따라서 성현(聖賢)이나 상급관청, 또는 명사 고관(名士高官)의 탄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있슴을 볼 때 그들 선열에 대한 경의(敬意)의 뜻으로 하마 하는 것인데, 동계역 주위에는 그럴만한 곳이 없다.    어떤 이는 동계역 북쪽편에 사천문표(泗川文廟)가 보이기 때문이라 하지만 이것 역시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동계에는 이와 같은 선돌이 마을 주변에 두 개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슨 뜻으로 세웠던 것일까. 그 해답은 동계의 지세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고읍 땅과 함께 동계 역시 양기(陽基) 풍수상 ‘행주형국(行舟形局)’이기 때문이다. 행주형국이란, 앞 절에서도 말했듯이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싣고 장차 떠나려고 하는 배의 형상을 의미한다. 곧 마을의 터를 ‘떠나가는 배’로 여기기 때문에 고읍과 동계는 모두 행주형인 것이다. 이 형국에는 키, 돛대, 닻, 배말뚝, 배사공을 구비하면 아주 좋은 것이지만 그 중의 하나만을 구비하여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으면 배가 뒤집히든지 표류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매우 불길하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주형 형상의 마을은 배의 안정과 순항(巡航)을 위한 여러 인위적 염승물(厭勝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계 마을의 여러 개의 선돌은 돛대와 닻 그리고 배말뚝의 역할을 했으리라 미루어 짐작된다. (고읍땅은 行舟形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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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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