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弟3節 정동(正東)이란 지명유래   정동면(正東面)인 <正東>의 명칭 유래를 대충 살펴보면, 본래에 두 면(面)이 있어 하나는 일출방(日出方), 즉 해뜨는 동녘에 있다 하여 동면(東面)이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서녘 지역으로서 옛 읍기(邑基)가 있었던 까닭에 상주내면(上州內面)이라 일컬었다. 그러니까 동면 지역은 면소재지의 대곡리(大谷里) 이동(以東)인 산악 지역으로 북으로 진주시, 동으로 고성군, 남으로는 사남면과 경계하고 상주내면은 풍정리와 수청리를 잇는 이서(以西)의 드넓은 들녘 지역으로서 남으로는 사남면 일부와 서북으로 사천읍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인(日人)들이 이 땅을 지배하면서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구실 아래 1914년 군청 소재지인 사천읍에서 역시 그 방위가 동쪽에 있다 하여 읍동면(邑東面)이라 개칭하였다. 따라서 동면은 16개 동리(洞里)와 상주내면의 14개 동리 등 모두 30개 동리를 법정이동(法定里洞)이라 하여 10개 이(里)로 개편하였다.   그 후 1931년 8월 또다시 면제(面制)의 개정이 있었는데, 이때는 다만 이름만 바뀌었던 것으로 읍동면을 정동면(正東面)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지명이란 이 땅을 살다간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일인들은 우리 전래의 전통문화적인 배경을 무시한 채 그들 나름의 편리한대로 개명하였으니 그 결과는 단순히 지리적인 특성만 드러나 있을 뿐이다.   한편 정동면 하면 여느 면과는 달리 향토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랜 역사의 누적이 숨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옛 읍기(邑基)의 고현지(古縣地)로서 뿐아니라 향토 발전의 중추적(中樞的) 역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동면 하면 언뜻 고려 현종(顯宗)을 연상하게 된다. 그의 사적(事績)에 관하여는 본지 제1편에서 기술한 바 있거니와 지명 유래라는 차원에서 살피면 다음과 같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安宗) 욱(郁)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여덟째 아들로서 사수(泗水) 땅에 유배되어 일생을 마쳤고, 현종 역시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와 사별하고 어린 시절을 이곳 사수 땅(정동면)에 내려와 살며 갖가지 비화(悲話)를 남겼다. 그의 출자(出自)는 여하간에 태조 왕건의 손자임에는 분명하였다.   그는 처음 포대기(襁褓)에 싸여 왕경(王京)에서 먼 남쪽 땅으로 내려와 이곳 정동면 배방절(排房寺 : 뒤에 陪王寺로 고침)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자라면서 왕손다운 기개(氣槪)가 대단하였고, 어느 하루에 절 난간의 꽃뱀 새깨를 보고 지은 아제시(兒題詩)가 유명하다.   그는 왕손으로서 숱한 운명적인 풍운(風雲)을 겪었지만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8대 현종이다. 이같이 그들 부자로 말미암아 사수현(泗水縣)이 사주(泗州)로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사주를 풍패지지(豊沛之地)라 일컬었던 것이다. 뿐더러 그가 처음 우거(寓居)했던 절 이름이 배방사에서 배왕사로 되고, 어정산(御停山), 고자봉(顧子峰), 능화봉(陵華峰) 따위의 유적과 지명들은 모두 이들 부자의 사적에서 비롯되었다.   면적은 그리 넓지 않으나 울울 창창한 뭇 멧부리는 병풍처럼 둘러 정령(精靈)을 빚고 시냇물은 평원 십리를 가르며 하늘은 비옥(肥沃)한 들판을 여니 온갖 만물이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수려(秀麗)한 경승을 자아내고 있다. 살기 좋은 땅에서 수많은 왜구의 노략질에 수난을 당하면서도 유서 깊은 땅에 살고 있음을 보람으로 여기는 이곳 면민들은 작은 유물 하나, 심지어 유적지와 관련이 있는 지명에도 애착을 가져 왔고 알려지지 않은 문화 유적을 보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정동면이 지금은 사천의 한 속면이지만 옛 읍기가 있었던 고현(古縣)인 까닭에 그 연원과 내력을 여러 문헌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에서 고성과 진주에 관련된 현명(縣名)을 차례로 보면,   “고성군은 본시 군자군으로 경덕왕이 고성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있는데 영현이 셋이다.(중략) 이 가운데 사수현은 본시 사물현으로, 경덕왕이(사수로) 개명하였으니 지금의 사주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固城郡本古自郡景德王改名今因之領縣三..... 泗水縣本史勿縣景德王改名今泗州)      “사주는 본디 신라의 사물현인데 경덕왕이 사수로 개명하여 고성군의 연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진주목으로 내속하고 현종 2년(1011)에 사주로 개명하였고, 명종 2년(1172)에 이르러 감무를 두었다”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   (泗州本新羅史勿縣景德王改名泗水爲固城郡領縣高麗初來屬顯宗二年更今名明宗年置監務)      위 두 지리지에서 보듯이 <泗州>의 연원은 옛 토박이 지명이었을 <史勿>이었고, <史勿>이 훈차(訓借)되어 <泗水>로, <泗水>가 현종에 의해 <泗州>로 변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 <史勿>이란 토박이 이름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에 대해 지금으로선 정확하게 고찰할 수 없으나 적어도 신라시대 이전부터 연원한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면 <史勿>이란 이름이 문헌상에 처음 보이는 것은 기원 3세기 초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 고고학적으로 원삼국(原三國)시대에 해당되며 이때 포상팔국(浦上八國)이란 여러 소국들이 존재하였다. 이들 나라는 주로 경남 남서해안 즉 낙동강 이서(以西)의 바닷가에서 형성된 부족소국(部族小國)으로서 이중의 하나가 사천의 연원인 사물국(史勿國)이다.   그리고 이들 나라가 해상의 연합 세력으로 대두되어 가라(加羅)를 치려다가 신라에 의해 격퇴 당했다는 기록 외는 그 실체를 알 길이 없으며 지정학적으로 볼때 결국은 가야(伽倻)에 흡수되었지 않았나 추정된다. 가야는 초기 가야(初期伽倻)와 후기 가야(後期伽倻)로 구분하는데 그 강역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경상남도 전역과 경북 일부 지역을 포괄해 온 곳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하나의 통일된 왕국으로 성립되지 못하고 연맹체 형식으로 존재하다가 7세기 중엽 마침내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史勿>이란 어원(語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 고장에 구전되는 말에 따르면 사물이란 본래 강가나 바닷가에서 기인(起因)한 우리 토박이말로서 수향(水鄕)의 의(義)를 지닌 한자어 표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두(吏頭)의 표기는 중국 문화에 영향을 받아 군현(郡縣)의 명칭을 고쳐 나갈 때 한자의 음운(音訓)을 취하게 되는데 이 때가 앞서 말한 경덕왕대라는 것이다. 예컨대 사물(史勿)의 ‘史’자는 같은 음인 물<泗>가 되고 어미의 ‘勿’은 물(水)자로 새김되어 곧 <史勿>이 <泗水>의 어형(語形)으로 훈차(訓借)되었다고 풀이한다.   신라(新羅)때의 <泗水>가 <泗州>로 된 것은 앞서 누차 말한 대로 고려 현종 때의 일로서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즉 사수현은 그의 아버지 안종이 귀양살다 죽고 묻힌 땅이요 또 현종 자신이 어릴 적에 잠저(潛邸)하던 고장임으로 유배지라는 누명(陋名)을 벗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수현을 높여서 사주로 하라(陞泗水縣爲泗州)’는 칙령(勅令)이 내렸던 것이며, 단순히 고을 이름만 높인 것이 아니라 사주민(泗州民)에게 갖가지 은전(恩典)을 베풀기도 하였다. 특히 사주를 ‘풍패의 땅(豊沛之地)이라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풍패란 한고조(韓高祖)의 고향을 두고 이르는 말로서 고조는 고향에 사는 백성들에게 조세(租稅)를 거둬들이지 않았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현종 이후의 왕들은 사주를 일컬어 풍패라 한 것이다.   다음은 <泗州>가 <사천(泗川)>이란 명호(名號)로 바뀐 것인데 이에 대한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서 보면,      “(전략)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1413) 계사의 예개(例改)에 의하여 사천 현감으로 고쳤고, 을미년에 비로소 병마사 겸 판현사를 두었다. 금상(세종) 5년(1423) 계모에 병마 첨절제사로 이름을 고쳤다.” 라고 하였다.   (..... 本朝因之 太宗十三年癸巳例改爲泗川縣監之未始置兵馬使兼判縣事 今上五年癸卯改稱兵馬僉節制使)      위 내용에서 사주라는 지명이 조선조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각 도(道) 관애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이름을 개정하면서 사주가 비로소 오늘의 <泗川>으로 개칭되고 따라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지방관의 호칭도 감무(監務)에서 현감(縣監)으로 부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사(癸巳)의 예개(例改)란 태종 13년 10월초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때 각 도의 이름을 고침과 함께 단부(單付 : 종2품관의 지방 행정관청)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무릇 군.현의 이름 가운데 고을 ‘州’자를 띤 것은 모두 뫼 ‘山’자, 내 ‘川’자를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사주(泗州)를 사천(泗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   태종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을미년(乙未年 : 1415) 9월 사천진(泗川鎭)을 설치하고 품계(品階)가 높은 병마사(정3품)로 하여금 사천 고을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은 사천 지역이 군사상으로 중요한 요충지(要衝地)일 뿐만 아니라 당시 왜국의 침입을 자주 받는 까닭으로 남방 연변의 방어 기지로서 지방군의 국방 임무를 더욱 뚜렷하게 한 조치라 하겠다.   이때의 영진군(營鎭軍)의 수효는 서부 경남의 6개 고을과 경북의 4개 지역에서 동원된 군관(軍官 : 馬兵) 300과 수성군(守城軍 : 農民) 49등 모두 349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영(鎭營)은 정동면 옥산(玉山) 부근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사천진은 중익진(中翼鎭)으로 전환하여 좌로 고성.진해의 좌익진(左翼鎭), 우로 곤양.하동의 우익진(右翼鎭)을 지휘 통괄하다가 세조(世祖)때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새로운 군제(軍制)가 시행되면서 진주를 중심한 거진(巨鎭)의 제진(諸鎭)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앞서 세종대의 사천읍성(泗川邑城)이 축성(築城)되었다. 즉 세종 27년(1445) 을축(乙丑) 봄의 일로써 읍이 성안으로 옮겨감으로서 읍치(邑治)의 정동시대는 종언(終焉)을 고하고 새로운 사천읍 시대가 열렸음을 뜻한다.   사천읍성은 주위의 산세를 이용하여 견고한 성벽을 쌓아 유사시에 어적보민(禦敵保民)을 꾀한 포곡식(包谷式) 평산성(平山城)으로 임진왜란 때는 격전이 벌어졌던 성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정동면의 유래는 신라시대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읍기(邑基)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지명 또한 이 고장에서 생기고 변천돼 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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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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