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弟1節 마을의 연원(淵源)   본 정동면(正東面)은 본래 사천군(泗川郡)의 동부 지역에 위치하고 예로부터 부림옥야(俯臨沃野) 하고 군봉기수(羣峰奇秀) 하여 청간횡류(淸澗橫流) 한다는 말처럼 뭇 산봉우리와 기름진 평지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옛 고현(古縣)의 읍(邑)이 있었던 역사의 고장이다.   영봉 지리산(智異山)의 지맥(支脈)들이 동남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산줄기들이 다시 동서로 감돌아 그 사이에 고성군 상리면에서 발원(發源)한 사천강(泗川江)이 면의 중앙을 서북으로 장류(長流)하고 그 유역에 구릉 선상지(丘陵扇狀地)가 발달하여 그야말로 산고수려(山高水麗)한 자연경관(自然景觀)을 형성하였다.   면의 서부는 수원(水源)이 풍부하고 기름진 농경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동부 지역은 뭇 산봉우리와 험악치 않은 산지가 중첩돼 있어 땅은 순하나 그 굴곡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아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키를 재고 그 기슭과 골짜기마다 인가(人家)들이 자리잡았다. 이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장에 언제부터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을까? 마을마다 전해 오는 기록이 없어 확실한 실마리를 잡을 길이 없으나 학계 보고서에 따르면 선사(先史)때인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이미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구(遺構)인 고인돌 무덤(支石墓)의 존재가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청동기시대는 우리나라 고고학상(考古學上)에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출현하고서부터 철기(鐵器)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를 말하는데, 그 상한(上限)은 학자간에 이론(異論)이 없지 않으나 대개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로 보고 있다.   이 시대에 나타난 큰 변화로는 농업의 정착화(定着化)로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살고 무덤으로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성립으로 고인돌 무덤의 축조 등을 들수가 있겠다.   요컨대 정동면 신월(新月)마을의 무덤 유적은 지석묘의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돌깐무덤>으로서 1969년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바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민무늬토기편과 붉은 간토기편이었으며 이 밖에도 지석묘가 파괴된 여러 곳에서 토기 및 석기류(石器類)가 무수히 수습된 사례는 이 고장 선 주민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라 하겠다.   이같이 2천여년 전부터 사천강 물빛 곱고 햇빛 따스하며 바람 시원한 이 곳에 삶의 터전을 이루며 우거진 덤불과 돌밭을 헤쳐 논밭을 일구고 기슭에 샘솟는 물을 마시며 억세게도 살아왔다. 기후는 온대기후권(溫帶氣候圈)에 속하여 여름철도 잠깐의 혹서(酷暑)일 뿐 과히 덥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겨울이 되어도 비교적 따뜻한 편이여서 시내(市內)에선 으뜸가는 농업여건을 지니고 있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춥지 않은 땅.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고장의 산세와 물, 농사짓는 땅과 기후 조건에 따라 그 생활 모습이 달라진다. 또한 그들이 지닌 성질도 달라진다. 그러나 자연은 이들 산골과 들녘, 그리고 기슭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만 베푼 것은 아니었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겹쳐 흉년이 들 때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병마에 쓰러지기도 했다. 태풍을 만나 농사가 결단나고 가옥(家屋)이 무너져 목숨을 잃기도 했다.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용하게도 참고 견뎌 왔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성격이 온순하고 부지런해진 사람들, 풍요(豊饒)롭고 인정스러우면서도 불의(不義)를 받아들이거나 보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 남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은 인심 좋은 사람들, 산과 친하고 메마른 자갈밭을 개척하는 의지의 사람들로서의 심성(心性)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충절효렬(忠節孝烈)과 선행(善行)이 많이 배출된 고장, 인심 좋기로 소문난 고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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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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