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서 당(書堂) 서당은 앞에서 말하였듯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글방.서재.사숙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운다.서당은 고려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등 교육기관이다.일반 민간인이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양반들의 자제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자제들도 그 대상으로 한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서원의 수준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었던 것처럼, 서당도 교사인 훈장(訓長)의 실력에 따라 그 수준이 다양했다.그러나 대략 서당의 교육 내용은 강독(講讀).제술(製述).습자(習字)의 3가지가 있었다.먼저 강독의 경우는 처음에 천자문을 시작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 . 통감(通鑑) . 소학(小學) . 사서(四書) . 삼경(三經) . 사기(史記)등으로 올라갔는데, 서당에 따라서는 춘추(春秋) . 예기(禮記) . 근사록 등을 읽힌 곳도 있었다.다음 제술에 경우는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사율(四律) . 18구시(十八句詩). 작문 등을 가르쳤으며.끝으로 습자의 경우에는 천자문 . 동몽선습의 글자들을 가르쳤다. 서당의 설립 목적은 한편으로는 양반 자제들에게 향교나 사학 또는 서원과 같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었으며.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평민 자제들에게 초보적인 한문 해독력을 가르쳐 개략적으로나마 유교사상의 생활윤리에 익숙해지도록하여 기존 사회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있었다.또한 서당의 설립은 기본자산이나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누구나 뜻있는 사람이면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었다.서당의 설립 운영 형태는.①훈장 자영의 서당 ② 유지 독영의 서당 ③유지 조합의 서당 ④ 촌락 조합의 서당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서당 건물을 이제 찾아 볼 수 없고 예 자취만 남아 서당터 또는 서짓골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 면내 최초의 서당은 강당촌(講堂村) 이란 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현여지승람》(1699)에 의하면 이 강당촌(講堂村)의 위치는 현에서 남으로 7리인 이구산 기슭 사수 위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예수리(禮樹里)근처로 여겨진다.《읍지》에는 강당지(講堂址)로 변하는데, 이곳에 선비 진유례(陳有禮)란 분이 살면서 수 칸의 서재를 짓고 면내 각지에서 모여든 학동을 가르쳤다고 전한다.서당은 신학문이 들어온 일제 강점기에도 존속했는데 각 마을에 있었던 서당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을명 | 서당명 | 위치 | 훈장(접장) | 설립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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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읍 | 수양재(洙陽齋) | 고읍부락 아랫말 | 목영수(睦英守) 이석종의 조부 | |
예수 | 강당(講堂) | 예수리 서짓골(一名 강당지) | 진유례(陳有禮) 이현백(李顯伯) | 면내 최초의 서당 |
풍정 | 적니재(的尼齋) | 풍정리 북수골 | 최덕묵(崔德默) | 1890년대 |
풍정 | 대양재(大養齋) | 풍정리 웃말(유원재) | 최효습(崔孝習) | 1920년대 |
수청 | 이구재(尼丘齋) | 수청리 가운데땀 | 최영치(崔永致) 최갑치(崔甲致) | 1930년대 |
수청 | 수청재(洙淸齋) | 수청리 아랫말 | 미 상 | 1900년대초 |
대곡 | 대곡서당(大谷書堂) | 대곡리 40-1번지 | 정기하(鄭基夏) 강구석(姜龜錫) 최인정(崔寅政) 김성기(金成基) | 1880년경~1936년까지 |
대산 | 호산재(湖山齋) | 장산리 대산(一名 몽대) | 최효인(崔孝寅) | 1920년경 |
복상 | 영모재(永慕齋) | 감곡리 수리골 | 송헌창(宋憲彰) | 1910년경 |
만마 | 학산재(鶴山齋) | 학촌리 만마(어영골) | 김경배(金敬培) 최효붕(崔孝鵬) | 1900년경 |
대산 | 초산재(嶕山齋) | 장산리 대산(一名 건점) | 하빈헌(河贇憲) | 1910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