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3. 산 형(山形)   산의 형성은 퇴적암(堆積岩)을 관입(貫入)하여 중생대(中生代) 말기 백아기(白亞紀)에 화산분출로서 화성암(火成岩)이 용솟음쳐 산형이 이루어졌다. 본면의 산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소백산맥에서 그 지맥이 분파(分派)하여 흥무산(興霧山)과 봉대산(鳳臺山)을 만들어 그 줄기에 연봉(連峰)들이 중첩돼 대체로 산고곡심(山高谷深)한 형세이다. 그리고 이 테두리 안에 하천이 흐르고 평야지대를 형성하여 우리 면민들이 조상대대로 이어오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본면에 위치한 주요 산을 보면 다음과 같다. • 흥무산(興霧山.455m)   일명 흥보산(興寶山)이라고도 하며 본면 소곡리(所谷里)와 사남면 종천리(宗 川里)사이 경계를 이루며.이구산(尼丘山)서낭당산(城隍堂山)과 함께 고성군 무이산(武夷山)에서 뻗어온 내맥이다.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성쇠(盛衰)를 알 수 없는 흥보사지(興寶寺址)가 남아있다.   산줄기를 따라 서북에 이르면.고려 태조의 여덟째 아들 왕욱(王郁:安宗)이 당시 사수(泗水:사천의 옛 지명)땅에 유배되어 귀양살이 할 때에 본면 배방 사(排房寺)에 우거하던 그의 아들 순(詢:뒤에 8대 현종이 됨)을 만나보기 위해 자주 넘나 들었다는 고자봉(顧子峰)이 있고.고자봉 남쪽에는 안종 욱이 죽은 후 묻혔던 묏자리가 있었는데 이를 일컬어 능화봉(陵華峰)이라 한다.    • 봉대산(鳳臺山.409m)   고성에서 뻗어온 내맥으로 본면 소곡리(所谷里)의 객방(客坊)마을과 고성군 영 현면(永縣面).진주시 금곡면(金谷面)을 가르는 경계에 있다. 남쪽의 흥무산과 마주하는데 옛날에는 이 산을 경계로 남쪽은 사천객방.동쪽은 고성객방.북쪽 은 진주객방이라 불렀다고 한다.그래서 소를 놓아두면 3개 고을의 산풀 을 뜯어 먹는다는 우스개말이 전한다.산세가 평이(平夷)하여 산 위에 주변 면적 150평 규모의 헬리곱타 착륙장과 고압선이 지나는 철탑이 설치되어 있다.    • 이구산(尼丘山.360m)   흥무산과 함께 고성 무이산에서 뻗어온 내맥으로 본면 수청리(洙淸里)와 사남면 우천리 및 화전리를 경계한다. 산세가 우람하고 가파르며 습곡운동(褶曲運動)탓인지 산허리가 여러 갈래로 뻗어내려 물결처럼 형상을 이루어 마치 병풍과 같은 산사면(山斜面)이 본 면의 남쪽을 가리고 있다.   산정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종립(嵷立)하고 조망(眺望)도 아주 광활하여 사방을 휘돌아보면.사천읍과 사천만 일대가 한눈 아래 굽어 보인다. 산지에는 수목이 무성하고 군데군데 암괴(岩塊)가 골짜기마다 노출되는데 그 아래 사천강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옛적에는 이 강을 사수(泗水)라 일컬었으며.이구산과 함께 중국 노(魯)나라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국산의 ‘이구(尼丘)’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동남에 있는 산으로 성인 공부자(孔夫子)가 탄생한 곳으로 이를 이산(尼山)이라 하며.또한 공부자의 이름과 자(字)이기도 하다.산동성에는 수사(洙泗)라는 두 강이 흐르는데 하나는 수수(洙水).하나는 사수(泗水)라 하였다.한편 공부자 보다 늦은 시기에 탄생한 맹자(孟子)도 산동성 추현(鄒縣)사람이다. 공자.맹자의 가르침을 공맹학(孔孟學)이라 하는데 수수나 사수 근처에서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데서 이를 수사학(洙泗學)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유교(儒敎)가 들어오면서 공맹학이 풍미(風靡)하던 때에 이 고장의 유학자(儒學者)들은 성인을 지극히 추앙한 나머지 성인이 탄생한 신령(神靈)한 성역(聖域)이 이곳 산수와 닮았다 하여 그곳의 산수명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이에 우리 고장은 추로지향(鄒魯之鄕)또는 동로(東魯)라 할만치 유풍(儒風)이 진작하였던 것이다.   산정에는 가물 때에 비 오기를 빌며 제를 지내던 기우단(祈雨壇)이 있었고.남쪽 산자락에는 고려 말엽부터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산성지(山城址)가 있는데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그 일부만 남아 있다.  

• 제비산(燕巢山.310m)   본면 감곡리(甘谷里)와 진주시 금곡면을 경계하며 봉대산과 함께 고성에서 뻗어온 일맥이다. 산형이 마치 제비집 형국이라 하여 옛부터 연소등(燕巢嶝)으로 불리었는데 지금은 제비산으로 통한다. 송림잡목이 울창하고 산위에는 봉대산과 같이 주변면적 240평 규모의 헬리콥터 착륙장이 설치되어 있다. • 어정산(御停山.352m)   본면 대곡(大谷)마을 뒤편에 위치하며 사천읍 구암리(龜岩里)와 경계한다.지리산의 내맥으로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본면(정동)의 일대 명산으로 꼽힌다.배방절터가 있는 도골산(道骨山)과 가까우며 산지에는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푸르고 조망도 광활하여 사방이 경관을 자아낸다.이 산을 ‘어정(御停)’이라 부르는 까닭은 임금이 머물은 곳이란 뜻과 같이 고려 8대 현종의 발자취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사천읍지≫ 산천조에 의하면 “고려 현종(高麗顯宗) 미시(微時) 유게차고(遊憩此故) 인명언(因名焉)”이라 적고 있다.즉 이 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현종이 유시(幼時)에 그의 아버지 욱(郁)이 사천에서 귀양살이 할 때 그도 배방절에서 살았는데 이때 어린 나이로 절에서 가까운 이 산에 자주올라 노닐며 쉬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한다. • 서낭당산(城隍堂山.210m)   고성 무이산에서 뻗어내린 줄기로 이구산 서편에 낮은 봉우리이다. 본면 예수리(禮樹里)의 뒷산으로 사남면 화전리(花田里)를 경계하고 산 아래에는 사천강이 굽이쳐 흐른다.산세가 우람하거나 험하고 높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산이지만 향토사적으로 숱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 산중의 하나이다.   이 산의 꼭대기에는 조선 초기에 쌓았다고 전하는 테메식 산성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세종실록지리지≫사천현조를 보면.“서낭당 석성(石城)은 현 남쪽 2리에 있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5백88보인데 안에 샘1.못2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창이 있다’고 함은 이곳이 군사적으로 사천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 사천진(泗川鎭)의 진성(鎭城)임을 입증한다. 그래서 일명 고읍성(古邑城)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옛 사천의 읍기(邑基)가 산성에서 불과 2리 상거한 지금의 고읍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산의 이름을 ‘서낭당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도읍(都邑)을 지켜주리라는 영험(靈驗)한 서낭신의 신주(神主)를 산위에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신묘(神廟)나 단사(壇祠)가 있은 데서 유래되었다.그런데 언제부터 이 산에 서낭신을 모시게 되었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하지만 ≪고려사≫성종대의 기사를 보면.성종의 숙부이자 현종의 아버지인 안종(安宗:郁)이 사천에 귀양와서 4년동안 살다 죽을 무렵 그가 아들 순(詢:뒤에 현종이 됨)에게 이르기를,‘내가 죽거던 반드시 서낭당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지내게 하라’고 유언했다. 이로 미루어 고려초 아니.그 이전부터 이미 각 고을 명산에는 서낭신을 모셔 놓고 나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안종 욱은 그의 유언대로 서낭당 남쪽 귀룡동에 묻혔던 것인데.이곳이 바로 지금의 사남면 우천리(牛川里)능화(陵花)마을에 있는 능화봉(陵華峰)이다.   한편.서낭당산성에 관하여는 뒤에 별도로 다시 기술하겠지만 이곳은 사천읍과 사천만 더 멀리는 남해와 진주 등지까지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른바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대부터 사천의 대표적 성곽이었음을 여러 문헌을 통해 읽을 수가 있다. 그래서 늦은 감은 있지만 지난 93년 12월 우리 면에서는 유일하게 경상남도문화재 기념물 132호로 지정받게 되었다.어쨋든 그 구구절절한 사연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면민들 뿐 아니라 시민들의 애정이 깃들어 있는 문화재임으로 슬기롭게 가꾸어 나가야 되리라 여겨진다.

  • 부봉산(浮蜂山.201m)   본면 화암리(花巖里)와 풍정리(豊井里) 경계에 위치하며 어정산과 같은 줄기의 내맥이다. 서낭당산과 마주 하는데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산세가 우람하기도 하고 평이(平夷)하기도 하며 수목이 울창하여 늘 푸르름을 자아낸다. 문헌에 나타난 것을 보면.본래는 두음벌산(豆音伐山)으로 내려오다가 근세에 이르러 벌이 하늘에 떠오르는 형국이라 하여 부봉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속칭 ‘떰불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두음벌에서 파생한 방언(方言)이라 여겨진다.   ≪사천현읍지≫ 부봉산조에 “현의 동족 6리에 있고 지리산의 내맥으로 읍기의 진산(鎭山)이다.”고 기록되어 있다.여기서 진산이라 함은 도읍이나 성시(城市)의 뒤쪽에 있는 큰 산을 말하며 그 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인데 지금도 이 산에 오르면 돌로 쌓아 구축한 제단의 유구가 남아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이나≪사천현여지승람≫ 산천조에 의하면.이 산을 두음벌산이라 했는데 ‘두음(豆音)’과 ‘벌(伐)’의 훈차(訓借)는 본래 우리나라의 고어(古語)라고 한다.두음의 준말 ‘둠’은 둥글다는 뜻의 원(圓)과 사위(四圍) 또는 사주(四周)이고 ‘벌’은 친다는 뜻과 함께 벌(閥)과 벌(垡)의 동의어로 어떤 세력이나 집단 이를테면 한 지역을 수호하는 군대나 그 우두머리를 두었다는 말과 같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조선 태종 15년(1415)에 사천을 군사적 전략에서 병마사(兵馬使)가 이끄는 사천진(泗川鎭)을 설치했던 것인데. 이 영진의 위치가 읍기와 함께 옥산(玉山)부근에 있었다. 읍기는 행정의 중심지로 당시로서는 병마사가 행정권(行政權)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옥 산(玉山)   부봉산의 줄기가 남라등(南羅嶝)을 거쳐 들녘에 돌기한 봉우리로 풍정마을 앞 국도변에 있었다.산이라기 보다 그저 야트막한 산등성이로 높이는 불과 50~60m에 불과한 구릉이었다.그런데도 향지(鄕誌) 산천조에 등재되어 온 것은.이 산이 유서깊은 사천의 안산(案山)인 까닭에서다.진산이 있으면 안산이 있게 마련인데, 안산이란 청룡(靑龍).백호(白虎).주산과 함께 풍수학상 네 요소의 하나로 혈(穴)의 바로 앞 명당(明堂)자리 앞에 있는 산을 두고하는 말이다. 여러 산이 중첩돼 있을 때는 내안산(內案山).외안산(外案山)으로 구별하기도 하였다.문헌에 따르면 옛날에는 살대(箭竹)가 많이 산출되어 화살(弓矢)을 만드는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한편.운와(雲窩) 목태림(睦台林)이 쓴 동성부(東城賦)에 의하면 “옥산 구악 읍기야(玉山舊嶽邑基也)”라 하여 이곳이 옛날 번진(藩鎭)의 읍터라 말하고 있다.번진의 새김은 변방의 수자리(戍)라는 뜻으로 이를테면 앞글에서 언급한 바 사천진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옛 고현지(古縣址)의 읍터가 현재의 고읍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알기 쉬우나 실제는 이 옥산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어떤 잡술에 의해 인의적으로 조산(造山)한 사례들이 많았다.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수많은 산들이 지상에서 사라져가는 현상을 보게 된다.그것은 물론 국토개발이란 차원에서 바다를 메우거나 도로 및 택지를 조성하기 위해서인데, 옥산도 그 예의 하나이다.‘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 속설과 같이 돌산도 1970년대부터 80년대 후반에 이르는 약 10년동안 사천비행장의 확장과 각종 건설공사의 취토 및 골재용으로 활용되면서부터 그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은 그 빈자리에 아이러니하게도 삼성항공(三星航空)의 사원용 고층 아파트가 우뚝 솟아있다. 이제 그 실체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지만 옥산(玉山)에 대한 우리 면민의 애정과 전설적인 이야기들은 이 기록과 더불어 살아 숨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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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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