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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3)新寨전투   무술년 10월 초하루 새벽 전투서열을 갖춘 조․명연합의 3만 대군은 기세도 당당히 사천성을 떠나 도중에 동계역·병둔(兵屯)․죽계(竹溪:현 죽천)를 거쳐 마침내 진시(辰時:오전 8시)경에는 바닷가 신채부근까지 당도하여 이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유격장 모국기·섭방영·팽신고는 보기(步騎) 7천을 이끌고 선봉에 나서 신채 정면을 공격하고, 학삼빙·사도립이 이끄는 4천병력은 성채 우측에서, 마정문·남방위의 4천병력은 성채 좌측에서 쳐들어가고 제독 동일원은 중군을 이끌고 뒤따랐으며 사시(巳時:오전 10시)를 기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성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대포를 쏘아 성문을 부셔도 적병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성안에서는 이날 새벽 적장 요시히로(義弘)의 아들 다다즈네(忠恒)는 좌우 몇 기(騎)를 이끌고 성밖을 돌아본 다음에 성안에 들어와 작전을 지도하였고 요시히로 자신은 성안을 한바퀴 돌아본 다음에 부장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이 공격해 오더라도 절대로 활과 총을 먼저 쏘지 말고 토벽(土壁)까지 접근하였을때 비로소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라.”는 엄명을 내려 놓고 있는 터였다. 그리고 관망이 좋은 좌우에는 망대(望臺)를 세워 요시히로는 좌노(左櫓)에서 그 아들 다다즈네는 성문에 가까운 우노(右櫓)에서 각각 적정을 살피면서 진고(陣鼓)를 지휘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당시 신채의 3면은 바다에 임하고 동쪽 일면만이 육지로 통하는데 성문은 동쪽에 있었고 길 양편에는 깊은 호(濠)로써 바닷물이 통했으며 그 외곽에다 목책(木柵)을 뺑 둘러 쳐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마즈의 계략은 아군을 정면의 좁은 지역으로 유인하여 최단거리까지 근접했을때 집중사격을 가할 속셈이었다.   이때 공격에 나선 유격장 팽신고의 군사들은 성문밖 2백보쯤 되는 곳에서 불랑기포(佛浪機砲)와 뇌성 벽력포를 일시에 쏘아 성문과 성안으로 진동시켰으나 적은 조금도 응사하지 않았음으로 성밖에 목책을 부수고 호를 건너 병사들이 개미떼같이 성벽(토벽)에 달라붙고 일부는 부서진 성문으로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별안간 성 위에는 수없는 적병들이 나타나 콩볶듯이 요란한 총성과 함께 일제사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니 성벽에 기어오르던 병사들은 풀잎같이 쓰러지고 성 밑에는 무수한 시체들이 쌓여갔다.   뿐만 아니라 팽신고의 진중에서 화포를 오발하여 탄약에 화염이 치솟자 마치 천지가 진동치는 듯 하였다.이리하여 성채 정면의 모든 군사들이 혼란에 빠지자 호기를 포착한 적장 시마즈는 망대에서 회심의 미소를 띄우고 군선(軍扇)을 높이 들어 총 출격의 진고를 우렁차게 울렸다. 이에 맨처음 다다즈네(忠恒)가 말을 몰고 성밖으로 출격하자 이세(伊勢貞昌)·히라다(平田宗位)·신노오(新納忠增)·가와카미(川上忠智)·다네가지마(埴子島久時)·이슈인(伊集院忠實)그리고 호꾸고(北鄕三久)등의 제장들도 잇따라 나와 일제히 역습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왜군들은 요란(擾亂)에 빠진 팽신고의 진중을 포위하는 태세로 에워싸고 그 약점을 차례로 돌파 분단하니 선봉 유격 3천의 전렬은 일시에 무너지고 팽신고의 포진지도 유린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유격장 학삼빙과 마정문의 마병들은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어버린 틈을 타 말머리를 돌려서 적이 없는 쪽을 향하여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유격장 사도립의 보병은 미처 도망칠 수 없어서 낭선(狼筅)과 곤봉으로 또는 당파(鐺鈀)와 창검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이미 무너지게 된 대세를 어찌 할 수 없었다.   이 때에 유격장 모국기와 섭방영은 남방위가 이끄는 군사들의 후원을 얻게 되어 성의 동북쪽 고지에서 다시 전렬을 수습하여 추격해 오는 적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도리어 성안으로 쳐들어가려고 하니 적장 한 사람이 이를 보는 순간 그의 수병 100여 기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와 서로 격전이 벌여져 도리어 적을 괴멸직전까지 몰아 넣게 되었다. 그런때 마침 다른 아군을 추격하던 적장 하나야마(樺山久高)·신노오(新納忠增)·데라야마(寺山久兼) 등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재빨리 군사를 돌려서 유격 모국기와 섭방영의 배후에서 함성을 지르며 급습해 오는 것이었다.   이를 본 아군은 고성 방면에서 적의 원군이 나타난 것으로 오인하게 되어 “적의 응원이 왔다.”하고 소리를 높이면서 서로 궤주하기를 다투게 되었으므로 조금 안정 되려고 하던 전렬이 다시금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허를 찔린 중로군은 서로 밟고 밟히며 우왕좌왕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로써 승세를 탄 왜군의 추격전이 끈질기게 시작되었으며 간간히 혼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사기를 잃은 중로군은 맥없이 짓밟히고 강가나 들판에 숱한 사상자를 남긴 채 신시(申時:오후4시)경에는 진주 남강까지 밀리고 말았다.   망친재(望晋寨)라도 미리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들어가 항전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것도 없었다. 중로군은 다시 남강을 건너는 동안 빠져 죽은 자가 많았고 적은 뒤따라 남쪽 언덕까지 추격하다가 군을 돌렸다. 이와 같이 중로군의 신채 패주에서 보병의 죽은 자가 3천여 명에 달하고 기병도 험한 길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았다. 제독 동일원과 부총병 조승훈 및 장방·유격장 모국기·남방위·팽신고·섭방영·학삼빙 등은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삼가까지 도망쳤다. 동일원은 조승훈 등을 삼가에 남겨 적의 추격을 막도록 하고 자신은 측근 몇 기와 함께 서둘러 밤을 세워 성주로 철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중로군은 태반이 전사하고 식량·무기 등은 많은 물자를 적에게 빼앗겼다. 이에 대해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鄭經世)는 보고하기를.      “동제독이 2일(실제는 초하루)신채의 왜적을 공격하여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치려는 순간 모(茅)유격의 진중에서 화약에 불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황급히 불을 끄는데 왜적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을 열고서 갑자기 성밖으로 나와 포를 쏘자 중국 군사가 모두 퇴각하였습니다. 그 와중에서 도망치다 죽은 자가 7천여명이나 되었고 군량 2천여 섬도 또한 불태우지 못한 채 후퇴하였습니다. 죽은 시체는 벌판에 가득 차고 군량과 무기는 1백30리까지 흩어졌으며 제독은 성주로 후퇴하였습니다. 설령 다시 공격하려고 해도 군대에 무기가 조금도 없으니 속수무책입니다.”(《선조실록》권 105 선조 31년 10월 임술조)      고 하였다. 또 이 일에 대하여 동제독 차관(差官)이 보고한 바를 군문도감(軍門都監)이 아뢰기를.      “동제독의 차관이 와서 말하기를 ‘동제독이 이미 진주를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진격하자 사천(구성)과 동양(東洋:通洋의 잘못. 신채)의 왜적들이 싸우지도 않고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내 신채를 진격하여 대포로 성문을 부수고 대군이 쳐들어 가려고 할 무렵 모유격의 진영에서 실수로 화약에 불이 일어나 진중이 소란하자 왜적이 바라보고 성문을 열고서 좌우로 나와 공격하고 사방에서 복병(伏兵)이 덮치니 대군이 허둥지둥 무너져 사망한 숫자가 어의 7.8천 명이나 되었고 제독은 진주로 후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사태가 이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군은 신채 전투의 패배의 죄를 도리어 조선군의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이에 대해 관찰사 정경세가 올린 보고문에는.

  “동양(통양. 신채)에서 궤산(潰散)한 뒤 신이 성주에 당도하여 전일 신채전투에서 먼저 도주한 죄를 아국의 군병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명장(明將)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제 왕안찰(王按察)이 우병사 정기룡에게 ‘네가 어찌하여 먼저 도주하였느냐’고 운운 했습니다.이에 정기룡은 ‘남 먼저 왜성에 육박하여 올랐으며 또 왜성에서 가장 나중에 나온 사람인데 오히려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지극히 괴이한 일입니다. 정기룡 한 개인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비록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이번 일보다 더 크게 생길까봐 매우 걱정입니다.’고 하였습니다.”(《선조실록》권 105 선조 31년 을해조)      이처럼 적장 시마즈의 유인계략(誘引計略)에 휘말려 일패도지(一敗塗地)한 동일원의 패인을 당시의 감찰어사(監察御使) 진효(陳效)는 제본(題本)에서 비교적 냉철하게 열거하여 남겼는데 이를 대충 살펴보면.      “전 군사가 모두 출전하면서 노영(老營:泗川城에다)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이 함께 공격하는데 후원군이 없었으니 이것이 모두 모계(謀計)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번 왜군이 오는 것을 보자 바람에 쓰러지듯 기병(騎兵)이 앞장서 도망하여 종․횡으로 길을 막아서 보병을 희생시켰다.(중략)필경에는 머리를 싸매고 쥐구멍을 찾는 꼴이 되어 왜군으로 하여금 아군을 짓밟게 만들었으니 모두 중벌(重罰)로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선조실록》권 105 선조 31년 10월 기사조)      패인 이럼에도 불구하고 명장들은 한결 같이 그 책임을 아군의 정기룡 장군에게 떠넘기려고 하였으니 조·명연합작전에서 당시 조선군의 처지가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뿐만 아니라 무술년 9월 하순을 기하여 감행한 조·명연합군의 전 전선(全戰線)에 걸친 반격작전은 마귀의 동로군이 울산의 도산성을 공격했으나 가또오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응전하지 않아 교착(膠着)상태에 빠졌고, 유정의 서로군은 순천의 왜교(예교)에 이르러 화의로써 고니시를 꾀여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그 중에서도 동일원의 중로군은 병력면에서는 월등히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시마즈의 유인작전에 말려 재기불능의 상태로 궤멸함으로써 조.명연합군의 총반격전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시마즈측에서는 신채전투의 승리를 황당(荒唐)하게도 그들 나라 개벽(開闢)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참수(斬首)를 무려 3만8천7백여 급(級)이라 과장하고 있다. 게다가 피아간 싸움이 한참 벌어졌을 때 갑자기 성안에서 적, 백색 두 마리의 여우(赤狐, 白狐)가 나타나 적진으로 달려가다 화살에 맞아 쓰러졌는데 이는 오로지 이나리대신(稻荷大神)이 우리 군을 도와주신 신의 가호(加護)가 있었기 때문이라 떠벌리고 있다. 그러면서 성밖에다 사방 15간(間)되는 땅을 파고 참수한 수급을 묻었는데 20여일이 지나자 무덤에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구더기가 들끓어 다시 사방 20간 되는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다 소나무를 심고 이를 ‘경관(京觀)’이라 했다는 것이다. 경관이란 굉장한 구경거리를 뜻할 뿐 아니라 무공을 보이기 위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적국의 전사자들 시체를 모아 매장하고 승첩을 기념하는 합동묘지라는 뜻이다. 더욱이 가증(可憎)스런 것은 참수한 수급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후 큰 나무통 10개에 넣어 전공(戰功)의 징표인 공물(貢物)로서 본국에 보냈다는 것이다.(《島津家記》의 기록에서)

  위의 내용을 모두 믿을 것은 못되지만 어쨌던 신채전투에서 중로군의 병력 손실이 엄청나게 컸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그들이 주장하는 참수 3만8천여는 패배한 우리쪽에서 본다면 터무니 없는 숫자라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이긴쪽에서는 전과를 크게 과장하려 하고 반대로 진편에서는 가능한 한 그 피해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 상예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아군의 선봉 유격대 7천명에다 좌우 협공의 병력이 각각 4천명인바 이 전투병력이 모두 전사했다 치더라도 1만5천명 밖에 되질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이 참수한 수급 3만8천 운운 하는 것은 말도 않되는 터무니 없는 숫자놀음이라 밖에 볼 수 없다.이와는 달리 우리측 기록 즉 《선조실록》에는 사망자의 수를 기지칠팔천(幾至七八千)이라 하여 거의 7, 8천의 손실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말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중로군 총병력 3만명에서 거의 1/4을 잃은 셈으로 단 하루만의 전투에서 그것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것은 임진왜란사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신채전투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왜적들의 잔인성(殘忍性)인데 이른바 코베기가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참수한 수급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저희 나라로 보냈다고 서슴없이 기록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이같이 야만적인 행위는 정유년 재침당시 적괴(賊魁) 히데요시가 침공군 제장(諸將)들에게 하명 하기를.      “사람에게는 좌우에 귀가 둘이지만 코는 하나 뿐으로 조선사람의 코를 베어 이를 수급(머리)대신 바쳐라”      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왜병들은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의 코베기에 혈안되어 무고한 남녀노소는 물론 심지어 산사(山寺) 승려의 코까지도 베어 갔다는 것이다. 이같이 하늘이 통곡(痛哭)할 만행을 저지르고서 일정한 목표량이 차니까 그 다음에는 생사람을 납치(拉致)하여 끌고 갔으니 그 수효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왜적들의 코베기 만행은 비단 우리 나라 사람 뿐만 아니라 명나라 사람들에게도 자행하였던 것 같다. 예로써 유격장 모국기(茅國器)의 막하에 있던 사세용(史世用)은 이전에 왜국에 왕래하였던 사람인데 이 싸움(신채전투)에서 패한 뒤에 모국기는 그를 시켜서 신채의 적정(敵情)을 탐색케 하였는바 여기서 얻은 정보를 당시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조정에 올린 보고에 의하면.

  “(전략)14일 모유격이 또 사상공(史相公), 맹통사(孟通事:통역자) 및 중국인 두 사람과 우리나라 통사 한 사람을 딸려 보내어 왜적의 진영(신채)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10일 왜적의 진영에서 도망해 온 삭발한 중국인에게 상세히 왜적의 실정을 물어보았더니 ‘생포된 중국 군사가 3백, 4백명인데 모유격의 군사는 삭발시키지 않고 그 밖에는 모두 삭발시켜 왜국으로 보내려고 한다. (중략) 접전할 때(10월1일의 전투)에 참획(斬獲)한 중국군은 코를 잘라서 동문(東門)밖에 쌓아 두었는데 숫자가 4천 내지 5천개에 밑돌지 않는다.’하였습니다. 근일 왜인들이 모두 중국군의 옷을 입고 중국 말을 타고 맘대로 다니며 염탐하여 중국인인지 왜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니 매우 망측합니다.”(《선조실록》권 105 선조 31년 10월 을해조)      고 하였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코만 베어간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왼쪽 귀도 베어갔다는데 그 수효가 무려 12만6천여 개가 되어 그것이 오늘날 일본의 고도인 교또(京都)에 묻힌 이른바 귀무덤(耳塚)이다.   왜란이 끝난 후 우리 조정에서는 해부(該部)에 칙지를 내려 신채전투의 진상을 조사하여 보고케 하였는데 선조 임금은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사천(泗川)의 중국 군대가 전사한 곳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라. 우리 군대의 전사자는 얼마나 되는가? 서장(書狀) 중에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만 역시 휼전(恤典)을 거행하라.(泗川天兵戰亡處遣官政祭我國戰亡之人則幾許乎書狀中下及乎此亦恤典擧行)” (《선조실록》권105 선조 31년 무술 10월 기사조)      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왜적이 물러간 후 곧 무덤을 다듬고 제사를 지냈던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에 자리한 조·명군총(朝明軍塚:지방기념물 제80호)으로써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루가 되면 호국투혼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慰靈祭)를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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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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