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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1)李舜臣의 白衣從軍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활약하던 임진년 여름에서 가을가지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연합하여 경상도 수역으로 진입하여 당시 경상도우수사였던 원균과 함께 왜적의 수군과 잘 싸워 절망의 늪에서 헤매던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전국(戰局)에 중대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 빛나는 공으로 이순신은 일약 정 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란 높은 벼슬을 제수받고 얼마 안가서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었다.   그런데 정유재침이 일어나자 전라도와 충청도 공략을 위해 수륙양면 작전을 펼치려는 왜군들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해상의 이순신을 대두된 당쟁(黨爭)을 이용하여 제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적장 고니시(小西行長)는 그의 사졸 요시라(要時羅)로 하여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중에 자주 왕래시켜 은근한 호의를 보여오다가 하루는 “유끼나가가 이번에 화의하는 일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가또오 때문이므로 나도 그를 미워한다. 어느날 가또오가 반드시 건너올 것이다. 조선은 수전(水戰)을 잘하니 만약 바다 가운데서 요격한다면 그를 패배시켜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디 기회를 잃지 마십시요.”하였다.   요시라라는 자는 쓰시마 사람으로 본명 梯七大夫, 통칭 요시로(興四郞)라 불렀는데 우리말에 능통한 이중첩자(二重諜者)로서 알량한 정보로 우리 조정의 신임을 얻어 도사(都事:정5품)라는 벼슬까지 받았으나 어디까지나 믿을 수 없는 자였다. 그는 얼마나 간사하였던지 오늘날 경남 연해지역에서 흔히 쓰는 속어(俗語) 가운데 경망스럽게 하는 말과 행동을 빗대어 ‘요시랑 방정 떤다’고 하는 말까지 전해질 정도의 장본인이었다.   그런데도 김응서는 이 허위정보를 믿어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권율이 다시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이 보고에 따라 선조 30년 1월21일 도원수 권율로 하여금 한산도(閑山島) 통제영까지 달려가서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이순신은 적에게 속임수가 있음을 염려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그들의 유인작전에 걸려들지 않자 이순신을 궁지에 몰아넣을 작전으로 요시라가 다시 김응서에게 와서 “가또오가 이제 이미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왜 요격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자 조정에서는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을 중심으로 이순신을 허물하였다.   이로 인해 동‧서인의 파쟁(派爭)속에서 영의정 류성룡과 대립했던 반대당들은 그에 대한 공격의 제물로 통제사 이순신을 탄핵(彈劾)하여 마침내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무군지죄를 지었고(欺國朝任無君之罪也).멋대로 노는 적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배반한 부국지죄를 지었다(縱賊不討負國之罪也)”는 것으로서 면직과 동시에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의 권고로 사형은 면하고 무인(武人)으로서 명예롭지 못한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여 일개 군졸로, 당시 초계에 있던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내려보냈다. 그리고 조정의 대신들과 연줄이 닿고 있던 전라좌수사 원균을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정유년 4월 초하루 옥에서 풀려나온 이순신은 그해 8월 초삼일 진주 땅 굴동(屈洞:현 진양군 수곡면 원계리)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받기까지 대부분의 백의종군 생활을 경남 서부지역에서 보냈는데 그 경위를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달포가량의 옥고(獄苦)를 치루고 종군길에 나선 이순신은 남으로 내려오던 도중 향리인 아산(牙山)에 잠깐 들렸을 때 여수에서 뱃길로 올라오던(전라좌수사로 있을때 어머니를 여수에 모셨음)노모(老母)의 부음을 접하게 되는데 때는 4월 13일이었다. 그러나 금부(禁府) 도사의 재촉에 끝까지 효를 다하지 못하고 나라에 충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순신은 4월 19일 일찍이 어머니 영 앞에 엎드려 하직을 고하고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4월 15일자 《난중일기》에 “친숙한 벗 오종수(吳從壽)가 모든 (어머니의 장례 치루는 일)것을 정성껏 대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고 감회(感懷)의 일단을 적고 있다.   남으로 길을 재촉하여 공주‧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를 거쳐 경상도 땅 악양(岳陽)에 도착한 것은 5월 26일이었고, 이어 하동‧청수역(淸水驛)‧단성‧삼가‧합천을 지나 원수부(元帥府)에 권율이 있던 초계에 당도한 것은 6월 8일이었다. 초계의 원수부는 당시 의령에 있었으나 지난 정월 적장 가또오가 상륙한 후로 이곳에 옮겨왔던 것이다.   권율 막하의 이름없는 사졸로 종군생활을 계속하던 이순신은 7월 15일 거제도의 칠천량(漆川粱)에서 통제사 원균이 거느리는 삼도수군이 왜군에게 패배했다는 비보(悲報)를 접하고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전황(戰況)을 살펴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는 의견을 도원수 권율에게 말하자 그는 크게 기뻐하며 송대립(宋大立)‧류황(柳滉)‧윤선각(尹先覺)‧방응원(方應元)‧현응진(玄應辰)‧임영립(林英立) 등 아홉 사람을 딸려 보내었다.

이순신 일행이 삼가, 단성현을 거쳐 7월 20일 진주 청개산성 아래 강정(江亭)에 이르자 진주 목사가 찾아와 보고 갔으며 이 날은 굴동 이희만(李希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날 일찍이 곤양군에 이르러 군수 이천추(李天樞)의 영접을 받은 후 노량(露梁)에 도착한 이순신 일행은 거제에서 온 현령(縣令) 안위(安衛)와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조계종(趙継宗) 등 10여 인으로부터 전일 칠천량해전의 전황을 듣게 되는데 모두들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통곡했다고 《난중일기》에는 기록하고 있다. 거제의 배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한 이순신은 다음날(22일) 아침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을 만나 상세한 패망 상황을 알아보고 오후 늦게 곤양 땅 노량에 돌아와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23일)아침 만들던 서류(보고서인 듯)를 함께 따르던 공대립에게 주어 먼저 초계의 원수부로 보내고 뒤따라 곤양 십오리원(十五里院:주요 도로상에 둔 숙박시설)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굴동에 도착한 그는 전에 숙박하던 이희만의 집에서 며칠을 묵고 27일 손경례(孫景禮)의 집으로 옮겨 머물었다. 이 기간중 특히 이순신은 손경례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앞 냇가 즉 덕천강(德川江)가에서 군사들을 모아 훈련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난중일기》7월 29일자에는 “늦게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렸는데 도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 탄식할 일이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곳에 머물면서 8월 초3일 이른 아침에 뜻밖에 선전관(宣傳官)으로부터 왕명을 받게되니 하늘의 뜻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전날밤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들었는데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 징조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충무공 이순신은 손경례의 집에서 선전관 양호(梁護)로 부터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받게 되는데 내용인즉 겸삼도통제사(兼三道統制使)의 명령이었다. 북쪽을 향해 사은숙배(謝恩肅拜)를 드린 이순신은 받자온 서장을 써서 올리고 곧 그길로 남은 생명을 나라에 바치기 위하여 하동 땅 두치진(豆恥津) 가는 길을 다시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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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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