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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2.倭軍의 再侵入 선조 30년(1597) 2월 왜국의 수괴(首魁) 도요또미는 재침군의 편성을 발표하고 곧 조선을 향하여 대군을 출병시켰다. 이보다 앞서 강화교섭을 주도해 왔던 고니시 유끼나가는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풀고자 그 전해 겨울(12월말)에 조선의 거제도에 도착하였고, 가또오 기요마사는 고니시에게 질세라 서둘러 다음해 정월 울산 방면의 서생포로 침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왜군의 채침은 정유년(선조 30년)7월 초순까지 고니시‧가또오‧구로다(黑田長政)‧나베지마(鍋島直茂)‧시마즈(島津義弘)‧조소가베(長會我部)‧하치즈카(蜂須賀家政)‧모리(毛利秀元)‧우끼다(宇喜多秀家) 등 8번대(番隊)에 이르는 침략군이 우리 나라 연해에 상륙하였고 남해 연안에 잔류하고 있던 병력 2만3백여 명을 더하여 왜군의 재침 병력은 14만1천여 명에 달하였으니 대개가 이미 조선에서 전투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침공군에게 내린 히데요시의 작전지시를 분석해 보면. 첫째. 강화교섭 때 들먹거린 경상‧전라‧충청도 등 남쪽 3도를 확보하는데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전라도를 빠짐없이 공략한다는 전략이었다. 전라도의 공략을 강력히 지시한 이유는 아마도 임진란시 서부 경남의 철저한 방어로 인하여 곡창 호남(湖南)을 탈취하지 못하므로 군사보급에 입었던 지장을 제거하겠다는 저의가 아닌가 한다. 둘째. 가급적 충청도를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이는 히데요시가 “조선이 아직 굴복하지 않은 것은 전라.충청 양도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동부 경남의 각 왜성을 철저히 방비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전략적 거점의 확보와 동시에 지나친 북진을 피하고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방침에서 대두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 히데요시는 부산, 쓰시마(對馬島), 잇끼시마(壹岐島), 나고야(名護屋) 등 4개 지점에 통보선(通報船)을 배치하여 이를 통해 전황을 통보받아 자신이 직접 작전을 총지휘하기로 결정하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귀가 둘이지만 코는 하나밖에 없다. 그러므로 조‧명군의 머리(首級)대신에 코를 잘라서 소금에 절여 보내라” 명령했다. 한편, 지난 해(선조 29년)8월 명나라 사신과 함께 왜국에 건너갔던 우리 통신사 황신(黃愼)과 박홍장이 11월 23일 명나라 사신보다 먼저 부산에 귀환하여 그 동안의 경위를 조정에 보고서를 올려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다고 알렸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부승지(同副承旨)정기원(鄭期遠)을 주문사(奏聞使)로 삼고, 장령(掌令) 류사원(柳思瑗)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보내고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을 경상도로 급파하여 방어태세를 정비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원수 권율이 경상도 방어계획을 수립하여 경상, 전라 양도의 군사를 엄선하고 또 의승군(義僧軍)을 뽑아 동쪽으로는 울산과 기장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함안과 의령에 이르는 요새를 지키게 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또한 조정의 청야지계(淸野之計).즉 들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쌀 한톨 남기지 않는다는 계획에 따라 우선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대구의 공산성(公山城).개령(開寧)의 금오산성(金烏山城).안음(安陰:현 안의면)의 황석산성(黃石山城).진주의 정개산성(鼎蓋山城) 등등 요지의 산성들을 수축하고 고을마다 관원(官員)들은 백성들을 이끌고 자기들에게 배정된 산성으로 집결하여 결전하도록 조치해 두었다. 또 청야지계와 병행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權應銖)는 경주에 본영을 두고 좌도의 방위태세를 정비하고 우병사 김응서(金應瑞)는 의령에서 우도(右道)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었다. 또한 이원익은 경주, 도원수 권율은 초계(草溪)에 본영을 두고 전군을 통괄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화평교섭이 결렬되자 전일 조선원군의 총 책임자였던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해임하고 대신 전상서(前尙書) 전악(田樂)을 재기용하였다. 명의 조정은 조선으로부터 또다시 원군의 파병을 요청해 오자 전자의 파병으로 지치고 쇠약해 있는데다 여진족(女眞族)의 반란이 겹쳐 있어 출병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왜군이 만약 요동(遼東).산동(山東) 방면에 침입한다면 나라의 위기는 한층 더 심각해 질 것이라는 판단에서 이번에도 파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개(邢玠)를 총독(또는 경략).양호(楊鎬)를 흠차경리조선군무(欽差経理朝鮮軍務), 마귀(麻貴)를 비왜총병관(備倭摠兵官:총사령관)등으로 각각 임명하여 구원군을 조선에 파견키로 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정유년 5월 8일 부총병 양원(楊元)이 지휘하는 기병 3천기(騎)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왔다. 정유재란에 조선으로 나온 명군이 제1진으로 양원은 전에 이여송(李如松)의 휘하 제2군사령관으로 조선에 나왔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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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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