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3. 泗川地域의 戰鬪槪況   사천은 여말 선초이래 전략상 관방(關防)의 요충(要衝)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초기부터 육·수군의 포‧진(浦鎭)과 봉수의 연대(煙臺)를 설치하는 한편 진성(鎭城)과 읍성(邑城)을 갖추었다. 문종(文宗)은 삼도도체찰사 정분(鄭芬)의 계청(啓請)을 받아들여 진성을 수축토록 하였고, 단종(端宗)은 즉위년과 3년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김순(金淳)을 보내어 사천읍성의 수축을 감독케 하였을 뿐 아니라 삼천리(三千里 : 현 삼천포)앞바다 심수도(深水島)에 병선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또 세조(世祖) 때는 진관체제하에 지방군의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중요 전략지로서 유방군(留防軍)을 두었고, 성종(成宗)은 삼천진(三千鎭 : 角山자락)에 성보(城堡)를 쌓았으며 고려 때 조운지(漕運地)였던 통양포(通洋浦)에 진보(鎭堡)를 두어 왜구에 대비케 하였다.   이같이 사천 지역에 보장(堡障)을 튼튼히 하고 어적보민(禦敵保民)을 꾀하게 된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천은 아늑한 천혜의 사천만을 끼고 있어 물산(物産)이 풍요(豊饒)한 서부경남 산군(山郡)에 이르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예부터 왜구의 잦은 침탈을 받아 왔었다. 때문에 사천은 일대 방수(防守)의 중심을 이루는 진주와 연접하여 전략상 적이 사천을 경유 진주로 오게 되어 있으므로 진주를 보존하려면 먼저 사천을 굳게 지켜야 했다. 이렇듯 사천의 안전이 곧 진주의 보존이요 진주의 안전 없이는 곡창 호남도 보장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란 때 적은 사천성을 점령하려 힘을 다하고 우리 관의군(官義軍)은 그들의 침공을 끝까지 물리치려 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기단계의 우리 지역의 실태는 어떠했는가에 대하여 살피기로 하자.   왜군이 침입할 당초 경상도 지역에서 왜군을 맞아 싸운 곳은 부산진첨사 정발과 그 휘하 군민, 동래부사 송상현, 밀양부사 박진(朴晋),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순변사 이일 등 극소수에 이르며 관찰사 김수(金晬) 이하 수령과 제장(諸將)들은 왜군이 이르기도 전에 망풍궤주(望風潰走)하여 일신의 보호를 꾀할 뿐 맡은 바 소임을 거의 이행하지 않았다 함은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왜란이 일어난지 2개월에 불과한 임진 6월 경상도의 실정을 《선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도의 순찰사는 상경(上京)했고, 병사에게는 군사가 없고, 수사는 영문(營門)을 잃었다. 잔존한 고을이란 다만 거창.안음.함양.산음.단성.진주.사천.곤양.하동.합천.삼가 등 10여 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두 심산(深山)으로 들어가고 없어 오로지 공성(空城)만이 남게 되었다. 비록 수령과 가장이 있다하여도 호령이 시행되지 않았고 조병(調兵)하여 응원하는 일도 무책이었으니 수일내로 이 모든 고을이 적의 소굴(巢窟)이 될 것이다.”   (《선조실록》권 27 선조 25년 6월 병진조)

  위의 내용에서는 서부 경남의 산군(山郡)과 바닷가에 위치한 사천.곤양.하동 등은 6월 이전까지는 적의 세력이 아직 미치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그러나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임진 5월 20일자)에 의할 것 같으면 사천지역에 왜적이 쳐들어온 것은 이미 5월 하순경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즉 왜란이 일어난 다음달 5월 20일경 수륙병진으로 서진해 온 왜군은 이미 고성을 점령하고 경계를 넘어 바로 사천으로 밀어 닥쳤으며 아무 저항도 받음없이 마침내 사천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니까 왜적이 처음 사천에 쳐들어온 것은 육로로부터이며 두 번째는 왜수군이 사천바다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도처에서 승세를 거두고 그 기세가 높았던 터라 아무리 견리(堅利)한 사천성도 조총으로 무장한 적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사천성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백성들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어 저마다 살길을 찾아 산간오지로 피난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이 사천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천을 보전하기 위하여는 먼저 진주성 방어가 더 급했었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것은 제승방략의 일환으로 부득이 성을 비우고 후일을 도모키 위해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간 것이라 추정된다. 그는 사천현감으로 도임한지 불과 수일만에 왜란이 일어났으며 왜적이 밀어 닥쳤을 때 바로 성을 비우기는 했어도 결코 비굴하거나 자기의 일신만을 돌보는 수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음의 기록에서 그의 충절(忠節)과 용맹성이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주성으로 들어간 정득열은 진주판관(晋州判官) 김시민(金時敏)과 힘을 합하여 사천성은 물론 고성, 진해에 주둔하던 왜적을 물리치고 함안에서는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과 함께 함안군수 류숭인(柳崇仁)을 도와 적군을 물리쳤고 그해 8월에는 거제에 있던 왜군이 다시 침공하여 오므로 진중에 엄한 영을 내려 완강하게 대치하니 적은 정의를 잃고 스스로 물러갔다. 이후 정득열 현감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10월 진주성의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진주에서는 초유사 김성일이 진주판관 김시민으로 하여금 임시로 통제의 책무를 맡게 하는 동시에 군사를 정돈하여 진주성 수호를 명하였다. 이에 김시민은 목사 이경(李璥)의 직책을 대행하면서 병기를 수리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한편 수성군(守城軍)을 징모(徵募)하여 진주성을 사수코자 하였다. 그리고 전군수 김대명(金大鳴)으로 하여금 모병에 착수케 하고 병기와 자재를 정비하였을 뿐 아니라 장기전에 대비하여 충분한 양곡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곳이 무너지게 되면 왜적은 곧바로 호남전역을 휩쓸게 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진주성의 중요성 때문에 김시민은 더욱 철저한 수성의 계책을 수립하여 유독 진주성만이 우뚝하게 솟아 영남, 호남의 보장(堡障)이 되었다.   이 무렵 사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이 장차 진주성을 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은 정용(精勇)한 군사 1천여 명을 뽑아서 판관 김시민, 진주성에 일시 들어와 있던 사천현감 정득열, 곤양군수 이광악, 전병사 조대곤 등과 더불어 남강을 건너서 진주와 사천경계인 열무다리(十水橋)에서 적의 선견대(先遣隊)를 만나 대번에 이를 격파하고 왜적에게 수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우리의 군사들은 그 여세를 몰아 사천성 밑까지 진격하여 그들의 후방보급로까지 차단했으므로 적은 하는수 없이 사천 지역을 포기하고 고성 방면으로 도망쳐 달아났다. 고성에 둔치(屯置)한 적은 아군이 대둔령(大芚嶺)을 넘어 성 밑까지 추격하자 다시 후퇴하여 웅천과 김해 방면으로 궤주하고 말았다.

  한편 바다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때가 임진 5월 29일의 일이었다. 수륙으로 나란히 서진해 온 왜군은 사천성을 점령한 얼마후 어느새 사천만 깊숙이 들어와 상륙하였다. 이 무렵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은 5월 4일 여수의 좌수영을 떠나 경상도의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등지의 해전에서 빛나는 승전을 거두고 여수 본영으로 개선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적함선 10여 척이 이미 사천, 곤양 등지까지 쳐들어 왔으므로 본수사는 배를 남해 땅 노량(露梁)으로 옮기게 되었소”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5월 29일 사천 선창(船艙:현 용현면 선진리)에서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졌으니 이를 이순신의 제2차 사천해전의 승첩이라 일컬으며 자세한 전투상황은 뒤에 다시 기술코자 한다.   이처럼 5월 말에서 6월 초순경 사천과 남해연안 일대에 걸쳐 거점을 마련하려던 왜적은 이순신에 의한 해상의 연패와 진주판관 김시민을 비롯한 사천현감 정득열, 곤양군수 이광악 등의 집요한 공격에 견디다 못해 그들의 서진계획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사천과 진주는 호남지역에 이르는 전략상의 요충이라 적은 패하여 달아났다가 다시 침입하였는데 이른바 제1차 진주성 싸움이 그것이다 왜군은 조선의병활동의 거점이자 전라도 침공의 요충인 진주성을 기어코 공략하고자 하였다.   이에 10월 초3일부터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 나가오카(長岡忠興:뒤에 細川忠興이라 함) 등이 이끄는 약 2만여 병력을 세길로 나누어 진주로 진격해 왔다. 먼저 1대(隊)는 말재(馬峴)를 넘고 나머지 병력은 나불천(羅佛川)을 넘어서 바로 진주성을 치기로 하고 이튿날 선봉 1천여 기병이 진주성밖 동쪽 산봉우리에 나타나 성을 공위(攻圍)하였다.   이때 진주성 안에는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승진한 김시민이 모든 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고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병사 류승인(전 함안군수)이 왜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단필(單匹)의 말을 타고 달려 진주성에 들어와 같이 싸우고 지키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망에 대하여 김시민 목사는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안에 들어오면 이것은 주장(主將)이 바뀌는 것이니 반드시 명령 계통이 혼란할 것이다.”하고 받아 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와서 성문을 계엄하는 중으로 창졸간에 염려가 있을까 하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하는 것이 좋겠소” 하고 성문을 열지 않았다.   병사 류숭인은 결국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 나오다가 적을 성 밖에서 만나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 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등과 함께 진을 치고 적과 대치하여 간단없는 적침을 번번이 물리쳤으나 일대격전 끝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정득열은 크게 분개하여 휘하 장졸들을 독려하면서 활을 당겨 적을 쏘다가 화살이 다하자 나중에는 필마단기로 말을 달려 철퇴(鐵槌)를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가 닥치는대로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물밀 듯이 밀어 닥치는 적군을 막아낼 길이 없어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되니 때는 임진 10월 초6일이었으며 나이는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였다. 이처럼 진주성의 전투에서 병사 류숭인을 비롯해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 권관 주대청 등이 세운 전공은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전으로 이끄는데 큰 몫을 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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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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