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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2.嶺南義兵의 蜂起와 활약   왜군은 침입 후 불과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다시 북상을 계속하였으나, 충청도와 경상도 서부지역 및 전라도 등 하삼도(下三道) 대부분의 지역은 아직 온전한 상태였다. 따라서 3도의 관군(官軍)은 비록 초전에 궤산(潰散)되어 조직적 저항력을 거의 상실하였으나, 관군(官軍)을 재건하여 미점령지역을 발판으로 저항을 계속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에 앞서 초전 패배의 제일 큰 원인을 살펴보면, 소위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에 있었던 것처럼, 제승방략이란 새로운 군사체제(軍事體制)였다.   이 체제는 세조대(世祖代)에 완성된 진관(鎭管)체제하의 각 진관별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편제와는 달리 유사시에 각 읍(邑)의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서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將帥)를 기다려 명령에 따르게 되는 제도였다. 따라서 후방지역에는 군사가 없어 일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배후는 연달아 붕괴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예컨대 임진(壬辰) 10월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과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이 각각 소속 군사를 이끌고 제1차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사천세(泗川勢)로 지탱한 것도 따지고 보면 진관 편제하의 거점인 진주성의 거진(巨鎭)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군사상의 결함과 사회 경제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초전에서 지역방어에 허실과 무력함이 드러나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부분의 수령과 무장들의 실정(失政)으로 인심을 잃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왜군이 침입할 당초 경상도 지역에서 적을 맞아 싸운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순찰사 이하 제읍(諸邑) 대부분의 수령과 장졸(將卒)들은 왜군이 미치기도 전에 미리 겁을내어 분궤(奔潰)하여 일신의 보호를 꾀하였을 뿐 맡은 바 책임을 거의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병기(兵器)와 군량(軍糧)이 하나같이 비게 되었고, 게다가 양반지배계급의 학정(虐政)과 경제적인 수탈, 그리고 가혹한 부역(賦役)등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離反)으로 일반 백성들은 모두 깊은 시골로 피난가고 없어 빈 성만 남은 실정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민심의 이반은 의병(義兵)의 봉기로 수습할 수가 있었다. 즉《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의하면.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때에 삼도(경상‧전라‧충청)사신(師臣)들이 모두 중심(衆心)을 잃었으며 왜란이 일어난 후에 병량(兵糧)을 독촉하여 거두어 가서 사람들이 다 질시하였고 왜적을 만나면 모두 붕괴하였다. 도내 거족(巨族) 명인(名人)과 유생(儒生)등이 조명(朝命)을 받들어 의병을 일으키자 이 소식을 들은자가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여 비록 큰 얻음이 있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인심을 얻어서 나라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다.“

  라고 한 것은, 민심의 이반을 막을 수 있었던 길은 관이 아니었고, 오로지 중망있는 명사(名士)나 유생들이 앞장서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한데 있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의지할 곳을 찾고 있던 일반 백성들은 위에서와 같이 평소부터 명망이 있던 자가 근왕정신(勤王精神)에 입각하여 의병을 모집하자 자기 가족과 재산을 지키려는 애착심까지 일어나 의병의 기치(旗幟)아래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대란 불과 1주일 후인 4월 22일 현풍유생 곽재우(郭再祐)가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옥천(沃川)의 전 도사 조헌(趙憲)이 기병한 것을 시작으로 5월에는 경상도의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손인갑(孫仁甲)‧김준민(金俊民)‧박성(朴惺)‧곽준(郭준)‧곽저(郭趄) 등과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류팽노(柳彭老)등이 잇따라 기병하였다.   당시에 있어서 사병(私兵)을 거느린 조직은 반란행위와 같은 것이었으나 조정에서는 이산된 민중을 규합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눈앞의 강적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근왕정신에 뿌리박은 의병과 같은 사병집단의 조직을 오히려 장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김성일(金誠一)을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 백성을 초유하여 의병활동을 촉진하게 하였던 것이다.   앞서 조정에서는 통신부사(通信副使)로서 왜국에 다녀와 ‘왜가 침공할 정황을 찾지 못했다(賊必不能來寇)’고 보고를 잘못한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잡아 국문(鞠問)하려 했지만 사태가 불측(不測)인데다가 김성일이 적을 맞아 죽을 각오하고 적과 싸워 속죄하고 있는데 대해 류성룡(柳成龍)이 적극 비호하여 처벌을 면하여 곧바로 본도 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조정에서는 경상도 지방에서 명망이 있는 김성일을 내세워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경사우도로 내려온 김성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동분서주 하면서 의병을 권장하고, 관의군(官義軍)의 마찰을 조정하는 등 크게 활약하므로써 영남의병의 눈부신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의병창의책(義兵倡義策)에 따라 사병을 조직한 의병장과 의병대열에 참가한 민간인 및 관군이탈자들의 행동은 충의롭고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각지에서 대소 의병집단이 우후죽순 (雨後竹筍)처럼 일어났다. 물론 의병의 봉기가 초유사 한 사람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분위기의 조성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실제 의병의 봉기는 국가의 소모의병(召募義兵)이 있기 전에 시작되었다. 즉 앞서와 같이 곽재우는 4월 22일에 의병으로서는 가장 먼저 조직에 착수하였고 5월 초에는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민심을 잃은 일부 관료들의 악랄한 모함(謀陷)을 받기도 하였다.   예컨대 도순찰사 김수(金晬)는 난이 일어나자 적을 피하여 동분서주 하다가 근왕(勤王)을 구실로 용인(龍仁)까지 진군하였지만 크게 패하여 산음(山陰 : 山淸)으로 돌아와 머물고 있으면서 의병활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도 백성들에게 가렴주구(苛斂誅求)하여 민심을 잃고 있었는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은 그를 체포하여 참(斬)하도록 열읍(列邑)에 격문(檄文)을 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곽재우의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 조대곤은 그를 체포하여 참하도록 열읍에 격문을 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곽재우의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에 초유사 김성일이 적극적으로 곽재우를 옹호하고 격려하는 서장(書狀)을 보내고 곽재우는 이를 향리(鄕里)에 알려서 군세(軍勢)가 다시 떨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김성일이 조금만 늦게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단성(丹城)에서 의병장 곽재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후에 미칠 경상우도의 인적, 물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왜군의 호남침입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위기에 처해 있던 곽재우의 조기 의병은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었고 이후로 그는 초유사 김성일을 인격적으로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곽재우는 기병하면서 먼저 자기집 재물을 모두 털었으며, 장사 50여 명을 모아가지고 의령‧초계(草溪)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끌어내고 또 거름강(岐江)에 버려져 배에 실려있는 세미(稅米)를 가져다가 군사들에게 먹이니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도적노릇을 한다고 비방하였으며.심지어 합천군수 전현룡은 그를 육지의 도적이라고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세가 날로 늘어만 갔다. 또 초유사 김성일이 격려하며 일어나기를 권하니 군사들은 1천여 명이나 휘하에 모여들었다.

이때 곽장군은 옛날 부친 곽월(郭越)을 따라 명나라에 갔을때 명의 황제(皇帝)가 내린 붉은 구름비단(雲錦) 한폭으로 전복(戰服)을 해입어 사람들이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였다. 곽재우군의 거점은 의령‧삼가(三嘉)‧합천 일대의 서부경남으로서 동정서벌(東征西伐)로 왜군을 만나는 대로 공격하니 적은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하였다. 이때 왜장 안고구지(安國寺惠瓊)는 대군을 거느리고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해 일단 의령 정암나루(鼎岩津)에 진을 쳤는데, 정암에서 불과 수십리 거리에 군진을 설치한 곽재우군은 탁월한 의병술(疑兵術)과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여 서진하려는 적을 그 자리에서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이 정암나루전투 이후 장군의 의병들은 날로 강성하여 수천명에 이르렀으며 낙동강 70리에 걸쳐 진을 치고 창원에서부터 함안(咸安)‧영산(靈山)‧창녕 등 각지의 왜적을 소탕하였다. 이때 곽재우 휘하에는 주몽룡(朱夢龍)을 비롯해 윤탁(尹鐸)‧박사제(朴思齊)‧오운(吳澐)‧이운장(李雲長)‧배맹신(裵孟伸)‧심대승(沈大承)‧정연(鄭演)등 17인의 의장(義將)이 모였다. 이중에 주몽룡은 사천 몽대(夢垈) 출신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금산 군수(金山郡守)로 도임하였다가 왜적의 침략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군수직을 사임하고 의병을 모아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무위(武威)를 떨친 분이다. 한편, 왜장 안고구지(安國寺)는 정암전투에서 퇴각하였다가 다시 군세를 증강하여 영산‧창녕으로 방향을 돌려 강을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곽장군의 군사가 이것을 알고 급히 달려가 먼저 점령하니, 적은 강 동안(東岸)에 이르러 홍의장군(紅衣將軍)의 군사라 하여 지레 겁먹고 한번의 접전(接戰)도 없이 달아났다. 그 뒤에 왜적은 현풍(玄風)‧창녕에서 아래로는 김해, 위로는 성주‧무계(茂溪)까지 연속하여 낙동강을 중심하여 곽장군의 군사와 버티었으나 장군은 여러 가지 기발한 형상과 행동을 나타내어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 때에 왜적들은 각처의 부락과 관아(官衙)를 점령하고는 온갖 만행을 저질러 그 참혹한 현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이에 망우당(忘憂堂) 곽장군은 여러 의장으로 증강된 병력으로 낙동강을 건너 경상좌도의 왜군진지를 공격하여 현풍‧창녕의 적을 몰아내고 대군을 믿고 버티는 영산의 적도 3일만에 몰아내었다. 이 당시 현풍과 창녕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들은 곽장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도망을 쳤으나 유독 영산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있던 적 9번대의 하시바(羽柴秀勝)‧나가오까(長岡忠興)군은 대병력만 믿고 버티고 있었다. 이에 곽장군은 초유사 김성일에게 청해 의령‧초계‧고령(高靈) 등지의 병력을 모두 동원, 낙동강을 건너 영산으로 진격하니 적은 성 밖으로 나와 공세를 취해 왔다. 이때 곽장군은 영장(領將) 윤탁(尹鐸)이 적에 맞서 공격하다 퇴각하니 다시 군사를 수습하여 부근의 고지에 올라가 적을 무찔렀으며, 의장 주몽령(朱夢龍)은 세차례에 걸쳐 적진을 공격하면서 화왕산성 주변을 피비린내나게 하고 마침내 성을 탈환하였다. 이 영산 싸움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3일간에 걸쳐 처절하게 벌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날짜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7월 하순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이 싸움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주장군은 의령‧거창‧밀양 등지에서도 몇 번이나 왜적을 쳐부수었으며 특히, 영산전투에서는 많은 왜적들과 부닥쳤을 때 위기에 처한 곽재우 장군을 필마단검(匹馬單劍)으로 적의 포위망에서 구출해 낸 일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한다. 이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주몽룡장군을 지용(智勇)을 겸비한 맹호(猛虎)같다고 했으며 또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장군과 더불어 영남지역 우측(嶺石) 세 마리의 용(龍)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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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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