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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1.倭軍의 侵略槪要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 고니시(小西行長)·소오(宗義智)·마쯔우라(松浦鎭信)·아리마(有馬晴信)·오오무라(木村喜前) 등이 인솔한 왜군의 선봉 제1번대 1만8천700여 명이 700여척의 병선에 나누어타고 부산 앞바다에 밀어닥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다음날(14일)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을 공격하자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소수의 군민(軍民)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1천여 명의 군민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이리하여 적군은 그 여세를 몰아 서평포와 다대포를 연달아 함락시킨 후 다음날 동래성(東萊城)으로 밀어닥쳤다. 이때 군민들과 합심하여 수성(守城)할 것을 독려하고 있던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성을 에워싼 적병들이 남문앞에 높이 쳐든 판자(板子)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적힌 글을 보고 치를 떨었다. 송상현은 곧 일전(一戰)불사의 결의로 목판에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글을 써서 적중에 던졌다. 이로써 왜적의 총공격이 개시되었고, 성 안의 우리 군민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하였다. 그러나 조수처럼 밀려오는 적을 감당할 수 없어 그들의 손에 비장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부산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군 제1번대는 즉시 부산을 떠나 거의 저항을 받음이 없이 양산(梁山)‧밀양(密陽)을 거쳐 대구(大邱)·상주(尙州)를 지나 조령(鳥嶺) 방향으로 향했고, 뒤이어 19일에는 가또오(加藤淸正)‧나베지마(鍋島直茂)‧사가라(相良賴房) 등이 거느리는 2번대 2만2천800여 명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곧 울산(蔚山)‧경주(慶州)를 지나 영천(永川)‧안동(安東)방면으로 진격하였으며, 역시 같은날 구로다(黑田長政)‧오오도모(大友吉統)가 인솔한 3번대 1만1천여 명도 죽도(竹島) 부근에 상륙하여 김해(金海)에 이르고,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이또오(伊東祐兵) 등이 이끄는 4번대 1만4천여 명은 김해에서 3번대와 합류하여 창녕(昌寧)을 점령한 후 성주(星州)를 지나 추풍령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이 삼로(三路) 선진에 뒤에도 5번대에서 9번대까지 후속부대가 부산포에 도착하여 점령지 후방을 수비하거나 전방으로 북상하였다. 한편 구오니(九鬼嘉隆)‧도오도오(騰堂高虎)‧가또오(加藤喜明) 등이 거느리는 왜의 수군(水軍) 9천여 명은 부산포를 거점으로 하여 수륙으로 나란히 나아갈 계획을 세웠다. 이로써 왜적의 조선 침략의 총병력은 무려 16만7천여 명에 달했던 것이다.   왜군이 대거 침입하였다는 변보(邊報)가 서울에 알려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변보에 접하고, 왜군의 북상에 따라 여러 고을이 차례로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잇따라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급히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인 조령을 방어토록 하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임명하여 죽령(竹嶺) 방면의 좌로(左路)로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추풍령방면의 서로(西路)를 막게하고, 조방장(助防將)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璣)로 하여금 각각 죽령과 조령을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하고, 좌의정 류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검독(檢督)케 하여 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상주를 지키던 이일은 고니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매 왜군은 조령을 쉽게 넘어 다음날 충주(忠州)로 들어왔다.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기다리던 신립은 격전 끝에 패하여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고니시군은 제2진의 가또오군과 일단 충주에서 합류했다가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고, 구로라‧모리 등의 제3.4진도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永同)으로 나아가 청주성(淸州城)을 공략한 후 서울로 진군을 계속했다.   한편 서울에서는 이일(李鎰)이 패하여 천험(天險)의 요새인 조령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한 가닥의 희망을 건 여진정벌(女眞征伐)의 명장 신립(申砬)마저 패하여 충주까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지자 수도 서울을 방비하려는 전의(戰意)를 잃고 말았다. 게다가 ‘왜군이 금명간에 도성(都城)에 쳐들어온다’는 보고에 접하자 서행(西行)에 대한 시비를 따질 겨를도 없이 선조는 세자 광해군(光海君)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떠나기에 앞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지키게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한강(漢江)을 방어토록 하였으나 병비(兵備)가 허술한 상태에서 한강 남안까지 진출한 왜군의 대세 앞에 고만 전의를 잃고 말았다.   왜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군(小西軍)이 5월 2일이었고, 가또오군(加藤軍)은 3일이었으니,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이래 실로 20여일만의 일이었다. 한편 한강을 지키던 김명원은 그 수비가 어려움을 알고 임진강(臨津江)으로 후퇴하였으며 도성의 방어도 따라서 무너졌다.   개성(開城)에 머물고 있던 선조는 다시 평양(平壤)으로 옮기고 그 후 임진강에서도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다시 의주(義州)로 행궁(行宮)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이와 같이 조선은 졸지에 국운(國運)이 명멸(明滅)하는 위기상황을 막게 되었으며, 그 끝에 조정은 명(明)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기에 이르고 국왕의 압록강(鴨綠江) 도강설(渡江說)을 두고 찬반의 논의가 심하게 대두하였다.   이상이 임진년(壬辰年)에 일어났던 왜군의 초기 침략개요로, 이 즈음 경상도의 전투상황은 어떠했는지 그 대강의 실태를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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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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