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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6. 소곡리 철장지(所谷里 鐵場址)   정동면 소곡리(所谷里)라는 지명은 그 유래를 살펴보면 본래 쇠(금)를 많이 캐낸 까닭에 붙여진 것으로 쇠쇨, 쎄실 또는 금곡(金谷)이라고 불렀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인 15~16세기경에는 질그릇. 사기그릇 등을 굽어낸 도요(陶窯)즉 사기소(沙器所)가 있었음은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다.    이와 관련하여 소곡리의 금곡(金谷)과 객방(客坊)마을 두 뒷산(남쪽의 흥무산, 북동쪽의 봉대산 산줄기)에는 옛날에 쇠를 캐낸 곳으로 지금도 채굴하던 당시의 폐광지(廢鑛址)가 남아 있어 소칭 \'쇠바위굼터\'라 불러오고 있다.    쇠를 캐냈다는 것은 곧 그곳에 철장(鐵場)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로 한다. 철장이란 <經國大典>에 의하면 “철의 생산지에 설치한 제련장(製鍊場)인데, 사철(沙鐵)·석철(石鐵) 등을 제련하여 정철(正鐵)로 만들었다”라고 씌여 있다.    또 “조선 태종(太宗) 7년(1407)에 비로소 철장(鐵場)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철을 제련하여 국용(國用)에 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각 주현(州縣)의 잔성(殘盛 : 성하거나 쇠잔하는 일)에 따라 공철(貢鐵 : 나라에 바치던 쇠)의 다소를 정하여 일반 백성들로부터 철을 거두어 들이던 법(法)은 폐지 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소곡리의 폐광지는 조선 초기부터 쇠를 캐내어 정철(正鐵)로 만드는 철장이 있었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혹자는 이곳의 폐광지가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것이라 하지만 문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상고(詳考)할 길이 막막하다. 다만 위 글의 내용에서 철장이 처음 설치되기 이전에는 ‘일반 백성들로부터 철을 거두어 들이던 법은 폐지되었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그 전부터 백성들이 개별적으로 쇠를 캐내었지 않나 미루어 짐작된다.    그런데 농번기(農繁期)에 백성을 철장(鐵場)에 역사(役事)시키는 폐단이 생기게 되어 세종 11년(1429)에 충청도의 철장 한곳을 폐지하기 시작하여 점차 혁파(革罷)되어 버렸다는 기록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철장도 한때 폐지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종(睿宗) 원년(1469)에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淑舟) 등의 주청(奏請)으로 철장은 다시 복설(復設)되었다. 그것은 예종대에 편찬된 <경상도 속찬 지리지> 사천현(泗川縣) 공납조(貢納條)를 보면, “해마다 공정철(貢正鐵) 360근(斤)을 바쳤다.”라는 기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종대 이후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을 보면, 철을 공납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철장은 근 100년동안 계속되다가 종내는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방(客坊)이란 땅이름은 글자 그대로 부칠객(客也) 또는 나그네객(一于他鄕)에 다가 곧 이름방(邑里之名)이 합성된 지명이다. 그러니까 외지(外地)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취락을 형성하였다는 뜻과도 통한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 기술한 철장(鐵場)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그 흔적이 없어졌지만 객방마을 웃땀 앞 야트막한 구릉(丘陵)에는 철설(鐵屑 : 쇠똥)이 많이 발견되는 곳으로 이곳에 그 옛날 철장이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된다.(제4편 이동 연원과 지명유래 소곡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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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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