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4. 소곡리 요지 (所谷里 窯址)   정동면 소곡리 390번지 일대에 그 옛날 오지그릇. 질그릇. 사기그릇 등을 굽던 가마터(窯址)가 두 곳에 있었다. 지금은 거의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약 300평 남짓한 곳에 일부는 농경지로 개간하여 밭으로 변했는데, 주위엔 인화문(印花紋 : 시문 하고자 하는 무늬의 도장을 만들어, 그릇 표면에 일정하게 찍어 무늬를 그린 후 백토(白土)로 메꾸어 넣는 기법)의 분청사기편(粉靑沙器片)이 많이 흩어져 있다.    소곡리의 이 가마터는 사천읍 구암리. 사남면 유천리와 초전리. 곤양면 송전리의 도요지(陶窯址)와 함께 대개 조선시대 전기인 15~16세기경의 것으로 주로 관급(官給)을 목적으로 한 관요(官窯)일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이 중에 송전리(곤양면)에서 굽어낸 도자기는 중품(中品)이라 기록은 전하고 있다.    분청사기란 잿빛 바탕에 다소 푸른빛이 섞인 빛깔(灰靑色)의 사기라는 뜻인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를 줄인 말로, 이전에 일본인들이 삼도(三道)라고 불렀던 것을 우리나라 미술계(美術界)의 원로인 고유섭(高裕燮)선생이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명칭에서 처럼 회청색의 사기를 그릇의 표면에 백토를 입힌 것이 분청사기이다.    그리고 이 분청사기의 제작 시기는 그 시작이 고려말의 쇠퇴한 청자(靑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위에서 말한 조선시대 전기인 15~16세기에 그 전성기(全盛期)를 맞게 되고, 하한(下限)은 임진왜란(1592~1598)에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곡리의 사기소(沙器所)는 사천의 여러 사기소와 함께 임진왜란을 당하여 도공(陶工)들의 피랍(被拉)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쇠퇴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처럼 소곡리는 조선 초기부터 사기그릇을 굽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쇠를 캐낸 철장(鐵場)도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철의 산지로 처음엔 쇠실(金谷)이라고 했는데, 뒤에 소곡(所谷)이라 이름이 바뀐 것은 이런 산물에서 연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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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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