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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3. 서낭당 봉수지(城隍堂 烽燧址)   정동면 예수리 뒷산 서낭당산성(城隍堂山城) 안에 있었다 하여 서낭당 봉수 또는 봉화(烽火)라 하였다. 이 봉화는 용현면 신복리의 뒷산 침지봉화(針枝烽火)와 함께 조선초기에 설치한 연대(煙臺)로서 <경상도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에만 보인다. 침지봉화는 남으로 진주의 각산향(角山鄕) 주산(主山)에 응하고 북으로 서낭당에 전한다 하였으며 서낭당은 북으로 역시 진주의 망진산봉화(望晋山烽火)로 전하는데 서로의 거리는 18리(里) 59보(步)라 하였다.    그런데 <경상도 속찬 지리지>를 보면 안점(鞍岾)봉화가 새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진주 임내(任內)의 각산(角山) 봉화와 망진산 봉화를 잇는 봉수로(烽燧路)의 정비로 침지(針衼) 및 서낭당(城隍堂) 봉화는 폐지되고 안현산(鞍峴山 : 사남면 화전리와 용현면 신복리를 경계하는 지금의 봉대산)의 안점(鞍岾)봉수로 대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수제(烽燧制)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제도로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정비 강화하여 국경지방의 군정(軍情)을 신속하게 중앙에 보고하는 군사통신으로서, 유사시를 대비케 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다. 따라서 봉수망은 북변의 국경과 남변의 해안지방이 기점이 되고 왕경(王京)인 서울이 종점이 되었다.    이와 같은 봉수제의 시원은 중국의 후한(後漢) 광무제 시대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봉화(烽火) 또는 연대(煙臺)라고도 하였다. 대략 일정한 거리마다 요지(要地)가 되는 산정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夜則擧火)을 이용하고 주즉번시(晝則燔柴)라 하여 연기로서 변경의 급보를 중앙에 전달하는 통신수단이었다. 즉, 평상시는 1거(炬)를, 적이 나타나면 2거(炬)를 ,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거(炬), 경계에 침범하면 4거(炬)를 , 교전하게 되면 5거(炬)를 올렸었다. 또한 각 봉수대에는 오장(伍長)과 봉수군이 배치되었고, 봉수망은 지역적 중요성에 따라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 구분되었다. 참고로 조선후기까지 내려온 안현산(鞍峴山)의 안점봉수(鞍岾烽燧) 조직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간봉(9) 초기(初起) 금산(남해) → 대방산(이하 진주, 남해 창선도) → 각산(삼천포) → 안현산 (사천) → 망진산(이하 진주) → 광제산 → 입암산(산청 단성) → 금성산(삼가) → 소현산(합천) → 금귀산(이하 거창) → 거미흘산 → 구산(지례) → 고성산(금산) → 눌이황(이하 황간, 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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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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