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1. 고현지(古縣址)   정동면 고읍리(古邑里)는 아득히 먼 예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주군도읍(州郡都邑)의 읍기(邑基)가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고현지(古縣址) 혹은 고읍이라고도 하는데 읍기란 옛 제도상 지방관아(地方官衙)가 즐비하게 있던 마을로서, 소위 그 고을의 중심인 치소(治所)의 소재지였음을 뜻한다. 지금으로 치면 사천시청(泗川市廳)의 전신이 되는 셈이다.   우리 사천의 연혁(沿革)을 대충 살펴보면,      “본래 사물현(史勿縣)인데 경덕왕이 사수(泗水 : 757년)로 이름을 고쳐서 고성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진주의 임내(任內)로 붙였는데 현종 신해년(辛亥年 : 1011)에 사주(泗州)로 고쳤으며 명종 임진년(壬辰年 : 1172)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1413) 계사년에 예에 의하여 사천현감(泗川縣監)으로 고쳤고, 을미년(乙未年 : 1415)에 비로소 병마사겸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다. 금상(今上 : 세종대왕) 5년(1423) 계묘년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이름을 고쳤다”라고 되어 있다.       이상은 사천이 신라판도에 흡수되는 시기 즉 572년(진흥왕 23)부터 조선 초기인 1423년까지의 연혁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읍호(邑號 : 고을의 이름) 또한 사물(史勿)에서 사수(泗水), 사주(泗州), 사천(泗川)으로 네 번이나 바뀌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562-1423)에 사천 고을이 읍기(邑基)가 각각 어느 곳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고읍리에 처음 읍기가 들어선 시기를 어느 때를 보느냐 하는 것이며, 그 이전의 읍기는 또 어느 곳에 있었던가 하는 점이다.    이 고장 출신의 문장가(文章家)인 목태림(睦台林 : 1843년생)이 지은 동성부(東城賦 : 동성은 사천의 별호인데, 대개 사천의 내력과 풍물 등을 詩賦 형식으로 쓴 글)를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어 고읍 이전의 읍기를 규명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된다 하겠다.    즉 “사천의 읍호는 사물, 사수, 사천으로 세 번 바뀌었고,..... 사물 때의 읍기는 석계에 있었고, 사수 때는 고읍에 있었으며 지금은 사천이다(邑號則史勿 泗水 泗川 之 三遷... 史勿在石溪 泗水在 古邑而 今則泗川也)”라고 쓰고 있다.       위 글에서 저자는 읍호가 세 번 바뀌었다고 했는데 실은 앞서의 연혁조에서 보았듯이 세 번이 아니라 네 번 변천되었다. 그리고 읍기의 삼천(三遷)에서 ‘史勿在石溪\' 곧 지금의 용현면 석계리(石溪里)에 처음 읍기가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 사물(史勿)때의 시기를 언제부터 어느 시기까지로 보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 고찰해야만 고읍이 읍으로서 누려온 전 기간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헌사료(文獻史料)에 따르면 우리 사천의 읍호인 땅이름 (史勿)이 역사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기원 3세기 초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내해왕(奈解王) 14년(209) 7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작은 나라들이 서로 연모(連謀)하여 가라(加羅 : 김해를 본거지로 한 금관가야)를 칠려다가 가라의 구원을 요청받은 신라에 의하여 격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기사에서 포상팔국은 낙동강 이서(以西)의 남해안 해상세력인데 그 중의 한 나라가 사물국(史勿國)으로 오늘날 사천의 연원(淵源)인 것이다.    이들 소국이 그 뒤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어떻튼 사천의 전신인 사물국이 신라에 흡수되어 사물현(史勿縣)으로 격하된 것만은 분명하다. 때문에 앞글 연혁에서도 ‘본래 사물현인데...’라고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시기가 언제부터인가 하는 점인데, 대개 고령(高靈)을 맹주국(盟主國)으로 한 후기 대가야연맹(後期大伽耶聯盟)이 멸망하여 신라판도에 흡수되는 562년(진흥왕 23) 이후부터라 추정된다. 그것은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대가야연맹의 세력 판도는 고령계토기(高靈系土器)가 출토되는 합천.함양.남원 등 지리산 주변은 물론 진주.사천(사천식토기의 출토).고성 등 섬진강 유역에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부족소국(部族小國)때의 사물국이 사물현으로 강등되었어도 ‘사물’이란 지명만은 그대로 지키고 내려오다가 757년에 이르러 비로소 사수(泗水)라 고치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천의 처음 읍기는 3세기 초인 209년, 아니면 이보다 더 앞선 시기부터 읍호를 사수라 고친 757년까지는 석계(石溪)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泗水在古邑’은 757년 이후부터 지금의 사천읍으로 읍을 옮긴 1445년(세종 27)까지 약 700년 동안의 읍기는 고읍리에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것은 목태림이 쓴 글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읍기의 3천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대상으로 많은 차이가 날 것으로 여겨진다.(제4편 이동 연원과 지명 유래 참조)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