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2. 유구의 조사내용(調査內容)   유구의 조사 중 시굴트렌치는 북쪽에 있는 체성을 서에서 동으로 100m이상의 간격을 두고 폭 2m크기의 것을 1,2,3 등 세 개를, 그리고 남쪽 체성에 4하나를, 그리고 동쪽 문지(門址)로 예상되는 곳과 남쪽 건물터로 예상되는 곳, 또한 성내의 연못지와 기와편이 집중해서 산포한 곳 등지에도 시굴조사 되었다. 그 결과 체성의 축조 수법과 잔존 규모를 비롯하여 동문지(東門址), 연못지, 건물지(建物址) 일부를 확인할 수 있어 장차 복원사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조사 당시의 성과를 부분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북쪽 1   북쪽 돌기 지점인데, 표토를 약간 걷어내자 곧 3열로 배치된 석축(石築)이 나타났다. 가장 성 안쪽의 것은 생토층(生土層)에 기단석(基壇石)이 놓인 듯하지만 나머지는 상당한 깊이에서 생토층과 접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바깥 석열 축조상태는 성벽 훼손으로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체성은 바깥 석열을 기준해서 산탁(山托)하는 형식으로 축조된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현존하는 성벽이 처음 축조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지만 바깥에 일열의 석열이 더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것은 다른 부분에 비해 폭이 좁고 현존하는 석열 아래의 퇴적 상태가 기단부 설치에는 부적합한 상태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추정되는 것이다.    석축은 모가 난 활석을 이용하여 상면에 수직하게 축조하였는데, 성 안쪽에 단상을 띈 석열을 배치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예컨대 거제 고현성(巨濟 古縣城)이나 마산 합포성(馬山 合浦城)의 경우 성벽 축조시 적심석(積心石)은 단상을 띄게 하여 바깥벽이 무너져도 적심석 자체는 무너져 내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세종 20년(1438)에 반포된 축성신도에 의해 축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석열 형태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자세하지는 않지만 주목해 볼 일이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3.4m,폭은 6.6m이다.      2) 북쪽 2   북쪽의 계곡부분이며, 역시 표토를 제거하자 곧 지하에서 4열로 된 석축이 나타난다. 산탁된 바깥 석열은 전자에 비해 양호하게 남아 있으나 그 바깥으로 무너진 체성의 석재(石材)들이 무질서하게 퇴적되어 있다. 전자보다 석열이 늘어나고 폭도 커진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어느 단계의 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축조수법은 활석을 이용하여 상면에 수직되도록 쌓아 올렸는데 조잡하며 내벽형태는 짐작하기 힘들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2.9m, 폭은 4.8m이다.      3) 북쪽 3   동문지 가까이의 북벽이며, 표토를 제거하자 2열로 된 석축이 나타났다. 성내 체성 가까이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안쪽 석열들이 훼손된 듯 하다. 활석으로 된 바깥 석열은 상면에 수직으로 높게 남아 있으며 그 바깥으로 무너진 체성이 퇴적되어있다. 이 지점도 산탁(山托)된 외벽은 확인할 수 있지만 내벽의 형태나 축조수법은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4.0m, 폭은 5.2m이다.

남측 성곽 외착 전경

  4) 남쪽 1   남쪽 돌기지점을 문지(門址)로 예상하고 조사했는데, 문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체성 일부만 남아 있었다. 체성이 축조는 앞의 예와는 달리 내외벽이 정연하게 쌓여 있었다. 즉 외벽은 약간 손질한 장대석(長大石)을 이용하여 상면에 수직이 되도록 기단부부터 정연하게 배치하고 내벽도 마찬가지이지만 석재를 납작한 활석으로 사용한 것만 다른 점이다.

남측 성곽 내탁 전경

  그리고 중간의 적심석도 가급적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서로 엇갈리고 맞물리게 쌓아 견고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북쪽과는 석벽 중간에 석열이 없고, 석재를 약간 손질한 점 등이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축조지점에 따라 다른데서 생긴 일인지 아니면 수.개축(修改築)시기의 차이에서 나타난 형상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동문지 주변의 석축에서는 시기의 차이도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분명히 협축(悏築)한 상태이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2.1m, 폭은 4.0m이다.

동문지 트렌치 후 전경

  5) 동문지(東門址)   동쪽은 이구산(尼丘山)에 연달아 있는데 돌기지점에서 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지는 좌우 3매씩 납작한 자연대석으로 된 초석을 갖추고 맨 바깥쪽의 초석 2매에는 문을 부착시켰던 확돌구멍이 새겨져 있었다. 이 문은 보기드문 현문(懸門)형식으로 목조의 문루(門樓)가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문지 주변의 체성과 구조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동문지 좌측 전경

  먼저 체성의 외벽을 생토층 위에 손질한 장방형의 성석(城石)을 이용하여 상면에 수직이 되도록 아주 정연하게 축조하였으되 성고(城高)의 일정 높이만큼 산탁형식을 취하고, 나중에는 내벽도 내탁(內托)하여 협축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 체성은 문지부분도 개구(開口)하지 않고 함께 축조되어 성내의 생토층 높이에서 초석을 배치하고 문루를 세운 순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문지에서 성외의 출입을 위해서는 체성 외벽의 높이가 상당하므로 자연히 사다리와 같은 현문(懸門)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곳의 체성축조(體城築造) 상태와 문지쪽의 차이 등 여러 특징에서 이 성은 최소한 한 두차례에 걸쳐서 개.수축 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것은 문지 바깥에 외벽 축조시 사용된 성돌이 규모나 석질(石質)이 다른 것으로 축조된 부분이 있다는 점과 현재 초석이 놓인 성문쪽이 당초의 것보다 줄여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다음 문루의 형태는 초석의 형태만으로는 그 자세한 구조를 알 수 없었지만 대개 누층건물(樓層建物)로 추정해 보았다. 이곳에서 가야시대(伽耶時代)의 토기조각도 출토되었지만 고려청자편(高麗靑磁片)과 분청사기편(粉靑沙器片)도 수습되어 그 사용시기가 장구(長久)하였음을 상고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4.4m, 폭은 4.5m이고 건물지의 정면 폭은 3.3m,측면 폭은 5.4m이며 초석간의 간격은 2.7m이다.      6) 연못지(蓮池址)   동쪽 문지(門址)위의 정상부에 평면원형으로 오목하게 파여 있다.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면서 일부 훼손되었으나 그 형태는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연못이 둘 있다 했는데 하나는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대개 정상부의 생토층을 일정 깊이로 파고 상면(床面)에 자연석을 6, 7단 정도 깔아 호안석(護岸石)으로 삼았으며 어깨선 부분에는 파낸 흙으로 둑을 만들어서 우천시 물이 많이 고이도록 배려한 듯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웅덩이엔 황토와 진흙으로 다진 자취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러한 흔적을 찾아 볼수 없다. 지금도 가뭄이 들지 않으면 자연수가 많이 고인다고 한다. 직경은 18.5m, 깊이는 3.3m이다.      7) 건물지(建物址)   정상부 두 곳과 남쪽 골짜기 부분에 트렌치를 설치하여 건물지를 확인 하였으나 정상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남쪽 계곡부분에서 초석아래에 놓여진 적심(積心) 일부를 발견하였다. 건물지는 현재 개간하여 밭으로 경작하고 있는데 초석은 개간 시 이동시켜 밭둑에 방치되어 있다. 일부 남은 심초석(心礎石)만으로 규모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기와편과 함께 목조건물(木造建物)이 배치되어 있었음이 입증되는 자료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성안에는 ‘유군창(有軍倉)’ 또는 ‘연대(煙臺)’ 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영진군(營鎭軍)혹은 봉군(烽軍)의 생활막사도 있었지 않아 추정된다.      8) 유물(遺物)   조사 과정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조각과 토기편, 청자편, 분청사기편 등이며 주로 문지(門址) 주변과 건물터 주변, 성내 곳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중 기와 편은 회갈색(灰褐色)과 적갈색(赤褐色) 연질(軟質) 계통이 많고 표면에 어골문(魚骨紋), 목리문(木理紋) 등이 시문된 고식(古式)의 것이다. 그리고 토기조각은 가야시대의 것이 주로 채집 되었는데 이 성과 관련된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으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도 함께 수습되었다. 그 밖에 고려청자편과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편도 일부 채집되었다. 이들 유물이 고정된 유구(遺構)에서 수습된 것이 아니고 혼입(混入)된 것 또는 지표상에서 수집된 것으로 성의 축조시기와 직접 관련시켜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은 성축 이전부터 서낭신(城隍神)을 모셨던 단묘(壇廟)가 있었던 데서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산성 근처에 살았다는 고로(古老)들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성안에서 철제로 된 화살촉(鏃) 및 기타 무구(武具)같은 것도 수습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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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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