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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서낭당 산성 위치도

第 1 節 개관(槪觀)    정동면에서 유일하게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된 서낭당산성(城隍堂山城)은 본면 예수리 산 45-1번지 외6필지(64. 8.27㎡) 일대에 위치하며, 1993년 12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記念物) 제 132호로 지정되었다.    이 산성의 유래는 보다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는 없으나 대개 여말 선초(麗末鮮初)이래 倭寇의 빈번한 침범을 막기 위하여 조선 초기 사천진(泗川鎭)의 設鎭과 함께 쌓은 성보(城堡)로 추정된다. 그 까닭은 다음에 예시하는 사료(史料)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이전에는 사천고을에 성곽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산성의 이름이 서낭당산(城隍堂山)인 것은 원래 고을이나 도성(都城)을 지킨다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서낭신(城隍神)을 모시고 제사지낸 신묘(神廟)또는 당(堂:壇)이 산위에 설치돼 있은데서 연유한다. 古代社會에 있어서 천혜의 풍요로운 이 지역을 외적(外敵)으로부터 서낭신이 지켜주리라는 굳은 신앙은 여러 문헌(文獻)을 통해 역역하다.    문헌사에 나타난 서낭당(城隍堂)과 산성(山城)에 관련한 기사를 전재(轉載)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고려사 절요> 성종(成宗) 15년(96) 병신조(丙申條)에   “가을 7월에 욱(郁)이 사수현(泗水縣:泗川)에서 죽었다. 욱은 문장을 잘하고 또 풍수에 정통하였다. 일찍이 아들 순(詢)에게 금 한 주머니를 비밀히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금을 술사(術師)에게 주어 현(縣)의 서낭당(城隍堂)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 지내고, 장사할 때 반드시 시체를 엎어 묻게 하라(葬必伏理)’고 하였다.”      (2) <고려사> <치평요람> 공민왕(恭愍王) 9년(1360) 경자(庚子) 3월조에   “제도(諸道) 주. 군(州郡)의 모든 신묘(神廟)에 서낭신(城隍神)을 모시게 하고 전첩(戰捷)을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같은 왕 19년(1370) 경술(庚戌) 7월조에는      “전국의 5악(嶽).5진(鎭). 4해(海).4독(瀆)을 봉하고, 주.군.현의 서낭(城隍)의 신호(神號)를 일체(一體)로 개봉하고 역대 충신.열사는 당시 초봉(初封)의 명호에 따르게 하고 후세에 와서 미화(美化)시킨 것을 모두 고칠 것이며, 음사(淫祀)의 치제(致祭)는 일체 금한다”하였다.      (3)<태조실록> 권3, 태조 2년91393) 2월 21일조는   “이조(吏曹)에서 경내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서낭(城隍)과 해도(海道)의 신을 봉하기를 청하니 송악(松岳)의 서낭을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和寧). 안변(安邊). 완산(完山)의 서낭을 계국백(啓國佰)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 무등산(無等山) .금성산(錦城山). 계룡산(鷄龍山).. 중략... 여러 산과 진주서낭(晋州城隍)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신(護國神)이라 하였다. 이는 대사성(大司成) 유경(劉敬)의 진언에 따라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상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4)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1414) 8월 21일조에는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祀典)제도를 올리니 이러하였다.   “삼가히 당례악지(唐禮樂志)를 보니 악.진.해.독을 중사(中祀)로 하였고, 산.임.천.택(澤)을 소사(小祀)로 하였으며,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송나라 제도에서도 또한 악.진.해.독을 중사로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전조(前朝)의 제도를 이어 받아 산천(山川)의 등제(等第)를 나누지 않았는데, 빌건대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고제(古制)에 의하여 등제를 나누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악.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을 소사(小祀)로 삼았다.(중략)”하였다.    이상의 사료를 통하여 볼 때 사천의 서낭당(城隍堂)은 일찍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다. 즉 상기 사료 (1)에 의하면, 고려 초기 태조(왕건)의 여덟째 아들이자 6대 성종의 숙부(叔父)벌이 도는 욱(郁:安宗으로 추존됨)이 사수땅(사천)에 유배되어 5년(992-996년)만에 죽었는데, 죽을 때 그의 어린 아들 순(詢:뒤에 왕위에 올라 顯宗이 됨)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현의 서낭당(城隍堂) 남쪽 귀룡동에 장사 지내고 반드시 시체를 엎어서 묻도록 하라’고 유언하고 있다. 이 말은 곧 욱이 문장과 풍수에 통달했다는 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시신을 거기에 묻으면 아들 순이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묘자리가 있는 산을 뒤에 능화봉(陵華峯:사남면 우천리 소재)이라 일컬었으며, 이로써 볼때 서낭당은 고려초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사료 (2), (3), (4)에 보이듯이 시대에 따라 각 주.군.현 명산대천과 산천에는 서낭신을 모시게 하고 신호(神號)를 각각 달리 개봉(改封)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이르러서는 고제(古制)에 의해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등급을 나누어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는 점이며, 신호도 등급에 따라 호국지백(護國之伯), 호국지신(護國之神) 또는 ○○부서낭지신(○○府城隍之神) 등으로 변천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사천의 서낭당(城隍堂)도 소사(小祀)였을 것이며, 종교적인 차원에서 고을의 한 수호신(守護神)으로 기능했을 것임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 외에도 한 고을의 수령(守令)의 제례(祭禮)를 비롯한 읍치(邑治)의 제의(祭儀)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 하였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사직단(社稷壇 : 士神과 穀神을 모신 제단)이나 여제단(厲祭壇 : 疫神등을 제사하는 단) 등이 제례를 들 수 있다. 조선 전기 이후 한말(韓末)때까지 이들 3대 제의는 국가의 제의로 표준화되어 수령이 관속들과 더불어 담당해 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음은 서낭산성(城隍山城)과 관련된 사료를 들어 보기로 한다.      (5) <태종실록> 권30, 태종 15년(1415) 9월 21일조에   “(전략) 조의방(趙義方)을 사천진병마사(泗川鎭兵馬使) 겸 판사천현사(判泗川縣事)로, 전시귀(田時貴)를 울산진 병마사(兵馬使) 겸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로 삼으니 사천. 울산이 진(鎭)으로 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6) <경상도 지리지> (1424년 간행) 도내 산성 및 사천현조에   “서낭산성은 둘레가 588보(步)요, 면적은 4결(結) 61복(卜)이며 샘이 하나에 못이 둘 있다.”하였고, 사천진(泗川鎭)은 “을미(乙未:1415) 설진(設鎭)으로 강주포(江州浦:곤양면 중항리)앞 해구(海口)에서 8리에 소속되어 있다.”   고 했다. 또 연대조(煙臺條)에   “침지봉화(針枝烽火)는 남쪽의 진주 각산봉화(角山烽火)를 바라보며(중략) 서낭당봉화(城隍堂烽火)는 북쪽으로 진주땅 망진산(望晋山)을 바라본다.”고 하였다.      (7) <세종실록 지리지> (1454년 간행) 경상도 사천현조에는   “서낭당 석성(石城)은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둘레가 588보요 성안에 샘 하나와 못이 둘이며 군창(軍倉)이 있고, 봉화는 두 곳으로 침지(針枝)와 서낭당(城隍堂)봉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8) <신증 동국여지승람> (1530년 간행) 사천현 산천(山川), 사묘(祠廟), 고적조(古跡條)에   “서낭산은 현의 남쪽에 있고, 서낭사(城隍祠)는 산성안에 있으며, 산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1,941척(尺)인데 샘과 못이 각 하나씩 있다”고 하였다.      (9) <동국여지지> (1662년경 추정) 사천현조는   “서낭산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1,941척으로 성안에 샘과 못이 각 하나 있다.”      (10) <사천현 여지승람> (1699년 간행) 산천, 사묘, 고적조에   “서낭산은 현에서 남쪽 7리에 있고, 서낭당은 현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산성은 석축으로 된 둘레가 1,941척인데 1천(泉) 1지(池)가 있다.” 하였고,      (11) < 증보 문헌비고> (1782년 간행) 권 27, 여지고15, 관방3 성곽 경상도조에는 “서낭산성은 남으로 5리에 있고, 석축으로 둘레가 1,941척인데 지금은 폐성으로 성안에 우물과 못이 각각 하나씩 있다”하였으며,      (12) <경상도 읍지> (1832-1895년 간행) 사천현 읍지(泗川縣邑誌) 산천. 단묘(壇廟), 성곽조(城郭條)에   “서낭당산은 현의 남쪽 5리에 있고, 서낭당은 현의 남쪽 4리에, 서낭산성은 석축으로서 둘레가 1,941척이며 성안에 샘이 하나 못이 하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으로 문헌사료(文獻史料)에서 살폈듯이 사료 (6),(7)에 의하면, 이 산성은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높고 험악하여 둘레가 588보(1보는 약 1.9m)이며 성안의 넓이는 4결(結:면적의 단위) 61복인데 샘이 하나요 연못이 둘이며, 군창(軍倉:무기나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과 햇불을 지피는 봉화대(烽火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선 초기에 편찬한 관찬지리지(官撰地理志)에 처음 실린 성곽(城郭)으로서 사료 (5)와 관련지어 볼 때, 1415년(태종 15, 乙未)에 설진(設鎭)했다는 사천진(泗川鎭)의 진성(鎭城)으로 축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여말 선초이래 왜구(倭寇)의 끊임없는 침범과 창궐로 인하여 우리나라 남서해안 대개의 지역이 다 그러했듯이 심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인데, 사천지역도 예외가 아니여?거의 침입로(侵入路)라는 이유로 적로(賊路)의 요해처(要害處)인 이곳에다 병마사(兵馬使)가 지휘하는 거진(巨鎭)의 출현을 보게 된 것이다.    설진에 앞서 선초(鮮初)이래 구체화된 경상도 남해안의 해상방어(海上防禦)는 군사적인 목적 이외도 국가대정(國家大政)의 하나인 조운(漕運)의 안정운항(安定運航)이 시급한 일이었다. (당시 사천만은 조운의 발진기지였다) 때문에 일찍이 방어에 긴요한 연변(沿邊), 일테면 구라량(仇羅粱:지금의 사천시 勒島). 적량(亦粱:남해의 昌善島). 노량(露粱:하동의 金南面) 등지에 포진(浦鎭)을 설치하여 선군(船軍:水軍)으로 하여금 해상방어를 강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왜구의 침입시기나 지역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완벽한 해상방어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해상방어가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일단 육지에 상육한 왜적을 수어(守禦)하기 위해서는 제2, 제3 성보(城堡)의 축조는 필연적이었다. 때문에 육진(陸鎭)의 설치와 함께 서낭산의 산성은 사천진이 갖추어야할 군사시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하나였다. 그래야만 당시 사천지역은 물론 배후의 진주(晋州)까지도 지킬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료 (6), (7)에서 보듯이 성안에는 군창(軍倉)과 통신수단의 봉화대(烽火臺)도 갖추어서 만약의 경우 적선(賊船)을 발견하는 봉군(烽軍)은 즉각 햇불을 울려 이웃 봉화대(진주 망진산 봉화)에 알렸을 것이며, 또한 각성(角聲:성안에서 쓰던 나팔 비슷한 角을 부는 소리)을 내어 불의에 대비했을 것이다.    한편, 이들 사료 (6), (7)과는 달리 다음 사료 (8)에 의하면 산성의 규모는 석축(石築)으로 되어 있고, 둘레 또한 1,941척으로 성안에는 샘과 연못이 각각 하나씩, 그리고 서낭사(城隍祀)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성안에 사묘(祀廟)가 있다는 기록은 이 사료가 처음이다. 따라서 산성자체가 이미 고적(古跡)으로 변했다는 점일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세종대(世宗代)에 들어 정치적 안정은 물론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린데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경상.전라.충청도 연변에는 활발히 축성(築城)이 이루어졌던 것인데, 종래의 산성방어 체제에서 읍성(邑城)방어체제로 그개념이 전환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는 소규모의 왜구 침입에 대처하고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산성보다 평지의 읍성이 어적보민(禦敵保民)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래서 사천지역에는 세종대에 이르러 곤양읍성(昆陽邑城:1430년, 세종12)과 사천읍성(泗川邑城:1445년, 세종 27)의 축성을 보게된 것이며, 종래의 산성은 이후로 폐성(廢城)이 되어 문헌사에 고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후 후대에 기록된 사료에는 서낭다안성의 규모가 줄곧 석축의 둘레가 1,941척(약 1,109m)이라 일치(사료 (9), (10), (11), (12)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588보를 척(尺)으로 환산하여 표기한 듯 하다. 그리고 성곽을 석축(石築)이라 하고 있으나 실지로는 토석혼축(土石混築)이며, 산성의 거리에 대해서도 사료에 따라 각각 2리(사료 (8)), 5리(사료 (11), (12)) 7리(사료 (10))로 되어있는데 처음2리는 읍기(邑基)가 고읍(古邑)에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며 뒤에 5리, 7리라 한 것은 읍기를 옮긴 후의 기록으로서 5리가 맞다고 할 것이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서낭산(城隍山)이니 서낭당산성(城隍堂山城)이니 한 것은 아득히 먼 고대사회 때부터 고을을 지킨다는 서낭신을 모신데서 연유되며, 또한 이 산성이 산성으로서의 군사적 기능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기능까지 겸비하여 사천의 명산(名山)으로서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해 왔다는데 향토사적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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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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