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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위치 : 풍정 웃마을>

○ 春岩處士紀蹟碑   오동문노성최공휘효습자증헌호춘암삭령인세거사천효의천성극승선열개독경군자인야계묘춘지알간재선생득문담파진전병촉지공노우익근독신호성태극심음양성존심비성사심제지사훈박통성리제서통변근세제가지심설당시약한우산유박간암태형조우당재학남이천창희최막역야체험기구존양역숙차권권어후진자역막비출어부사문지지의명호휴재경술옥사내실성장통왈공자지살신성인맹자지사생취의정금일위야 선묘왜란사다유적개자금오인역당여시야무오추공여이시암직현참만동묘제향왜인저지이공견수괴옥공이서질지왜추피축정축동왜우욕폐만동묘구집령호제유공역재기중거의책지서사불굴시년동문하제자혐기구재지벽애신축어풍정소거리편왈대양개취의역풍대야정양야지의이역우호촌지명야원근사우축일래회혹강이화이숙특지분혹질이심성정미지온호리상만태무허왈숙계심성사야어간옹몰심상삼년이진사일지성공몰문인가마수십인군동옥정후산갈마등손원기조야몰미기기인유문략이편공제야을사춘문인행판향이저존경사숙지의금년추우수공기적비우대양지우이우불망지의약비평일덕의지감인자심기연호재역기흘첨원개기족자용문기기실여수병폐필연동문의독불뢰사여우   융희 기원 육십육년 임자 구월 일   하동 정도현 식         吾同門老成崔公諱孝習字曾憲號春岩朔寧人世居泗川孝義天成克承先烈盖篤敬君子人也癸卯春贄謁艮齋先生得聞潭巴眞詮炳燭之工老尤益勤篤信乎性太極心陰陽性尊心卑性師心第之師訓博通性理諸書痛辨近世諸家之心說當時若韓愚山愈朴艮岩泰亨曺迂堂在學南夷川昌熙最莫逆也體驗旣久存養亦熟且眷眷於後進者亦莫非出於扶斯文之至意鳴乎休哉庚戌屋社乃失聲長痛曰孔子之殺身成仁孟子之捨生取義正今日謂也 宣廟倭亂士多有摘愾者今吾人亦當如是也戊午秋公與李是庵直鉉叅萬東廟祭享倭人沮之李公見囚槐獄公以書叱之倭酋被逐丁丑冬倭又欲廢萬東廟拘縶嶺湖諸儒公亦在其中據義責之誓死不屈是年冬門下諸子嫌其舊齋之僻隘新築於豊井所居里扁曰大養盖取義易豊大也井養也之義而亦寓乎村之名也遠近士友逐日來會或講以華夷淑慝之分或質以心性精微之蘊戶履常滿殆無虛曰叔季甚盛事也於艮翁歿心喪三年以盡事一之誠公歿門人加麻數十人郡東玉井後山渴馬嶝巽原其兆也歿未幾旣印遺文略而篇公諸也乙巳春門人行瓣香以著尊敬私淑之意今年秋又竪公紀蹟碑于大養之右以寓不忘之義若非平日德義之感人者深其然乎哉役旣訖僉員介其族子龍文記其實余雖病廢筆硏同門誼篤不牢辭如右   隆熙 紀元 六十六年 壬子 九月 日   河東 鄭道鉉 識         나의 同門 老先輩 崔公의 휘는 孝習이요 자는 曾憲이며 호는 春岩이니 본관은 朔寧이다. 대대로 泗川에서 사시고 孝行과 節義는 자연적이며, 義를 위하여 죽은 烈士를 克明하셨나니 대개 純全하신 君子이시다. 1903년 계묘 봄에 田艮齋선생에게 폐백들여 뵈옵고, 栗谷 李珥선생의 참된 깨달음을 들으시고 번쩍번쩍 빛나는 그 夫 늙을 수록 더욱 慇懃하고 篤實하였으며, ‘人性은 太極이요 人心은 陰陽이며 性은 높고 공경할 尊이고 心은 낮고 천한 卑인데, 性은 스승이며 心은 제자니라’고 한 艮齋선생의 가르침을 篤信하셨다.    널리 性理學을 통달하여 근래 諸家의 心設을 매우 아픈 마음으로 辨別하셨다.   당시 愚山 韓愈를 비롯하여 艮岩 朴泰享, 迂當 曺在學, 夷川 南昌熙 등과는 가장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몸소 체험이 이미 오래되어 存養(본심을 잃지 않도록 그착한 성품을 기름. 곧 수양한다는 뜻)이 또한 익숙하여 後生을 지도함이 또한 斯文(유교의 교리)를 뿌리박아 심는데 지극한 성의 아님이 없더라.    아! 슬프도다 庚戌國恥(1910년 8월 29일 韓日倂呑條約으로 나라의 수치)들으시고 이에 先聲하고 長痛하여 말하되, ‘孔子의 殺身成仁(절개를 지켜서 목숨을 버림)과 孟子의 捨生取義(목숨을 버리더라고 義를 쫓음)는 바로 오늘날을 두고 말함이니, 이제 우리 국민은 이 정신으로 살아야 하리라. 선조 임진왜란에 선비들 敵愾心 품은 자 많았으니 이제 우리가 당한 일이 이와 같도다’하고 울부짖었다.    1918년 가을에 公이 是菴 李直鉉과 더불어 萬東廟(임진란 때 조선을 도운 明나라의 神宗을 위하여 세운 祠堂)의 제향에 참여했는데, 왜경이 저지하고 李是菴을 충북 槐山警察署에 잡아 가두는지라 이에 공이 글을 써서 倭酋(왜인의 경찰서장)를 꾸짖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37년 겨울에는 倭人들이 만동묘를 훼철코져 하므로 嶺湖南의 여러 선비들이 이에 통분하여 규합하니 공이 그 중 한 사람이라 義를 들어 面叱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60여일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 후 같은 해 겨울 문하생과 鄕人들이 舊齋(老諱 德黙 二樂軒이 거처하던 的尼齋)가 먼 두메에 좁고 더러움을 개탄하여 사시는 곳에다 독서하는 齋屋을 새로지어 재호를 大養이라 하였다. 대개 周易의 기운을 취함이니 豊은 大也요, 井은 養而不窮이라 또한 豊井齋라는 뜻이 된다. 원근에서 士友들이 날이면 날마다 모여서 혹 華夷(중화와 오랭캐)의 옳고 그른 것과 간특한 分을 講하며, 혹은 心性의 精微하고 溫厚함을 論하며 처마 밑에는 신발이 항상 넘쳐서 허송하는 날이 없었으니 말세에 監事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艮齋선생이 별세하매 心喪 3년하여 한결같이 誠을 다 하였으며, 공이 별세하니 문인제자가 加麻한 자 수십인이오 郡의 동쪽 玉井 뒷산 渴馬嶝 巽坐에 안장되었다. 몰후 얼마에 공의 有志未就의 世事와 遺稿를 엮은 두 권의 책이 나오고, 1965년 봄에 문인들이 辨香을 드리고 1972년 가을에는 紀蹟碑를 齋石에 건립하여 永世不忘의 遺志를 기렸다. 만약 평일에 도덕과 의리의 사람을 깊이 감동시킴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建碑의 역사를 마치고 나서 집안의 여러분이 族子 龍文을 시켜 그 事사실쓰기를 청하거늘, 나 비록 병들고 붓을 놓은지 오래이나 동문의 정의가 篤厚하여 사양치 못하고 이상과 같이 쓰노라.    서기 一九七二年 壬子 九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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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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