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위치 : 풍정리 (남라등) 국도변>

○ 東溪居士朔寧崔公紀蹟碑   생이택급어물몰이명중우후사인불능망자기비대장부지사이인인지소원욕재연이부명유불균소처유상수불능개유이치기소욕고군자불이공업지현회론인이유관기소재지여하구능유기재여덕야칙사언기의기어용불용자유시운관언아복하여언근고동계거사최공생제한지말축회우국지지포유위지재이유사불능용졸미능유소시위이종노구학우역비부공삭령인휘한범자태규거재사주지동고자호동계이고려문하시랑평장사휘천노위비조입 이조대사간복인기현조야왈계현왈경국왈상봉기증대부급고이평택림기형기외대부야이 영효왕칠년병진생성자애이풍의준엄재가무자제과거향이구구위사미유지증미상혹궐어산아지가향린지송성기적적의시유현감금모자빈학무도서리배부화지절롱문묵람시편복징색일심민불료생일경기어도탄공불인좌시대회향민성토죄악축기장이징기도유지상사발창진급경내뢰이안도향인감기덕호수시저일착모주비기적공왈악족이위명재경지지이육십삼세지무오오월이일졸장우사천군정동면풍정리두풍산하난람등임원배왈창녕조씨경직녀생사남인화인호인순인주녀서왈밀양박해용인동장두학손왈경의종의창의장방출홍의영의이방출진의삼방출영의관의웅의건호사방출한상영근기외손야오호여사공득조전기족활보어운구지상기소조필유불가량자이내령구구칭예어일방이지기비명수자연야차자유임기책자재공하상야금거공지몰이근오십년이향지관민사모지불쇠의우인주참풍비수지주행이우영세지사공지덕지입인지심익가험의금종문이청사자기향후생장두길여공지재종손재의야 명왈폭호빙하고시과불구동실불하위기호모이사성우양명이자휘서기무괴군자가이명조천사,   광복 이십이년 병오 초하절   거창 신호성 근찬   월성 김명환 근서   병오(사이 구구년) 오월 일수         生而澤及於物沒而名重于後使人不能忘者豈非大丈夫之事而人人之所願欲哉然而賦命有不均所處有相殊不能皆有以致其所欲故君子不以功業之顯晦論人而惟觀其所在之如何苟能有其材與德也則斯焉己矣其於用不用自有時運關焉我復何與焉近故東溪居士崔公生際韓之末築懷憂國之志抱有爲之才而有司不能用卒未能有所施爲而終老邱壑旴亦悲夫公朔寧人諱漢範字泰圭居在泗洲之東故自號東溪以高麗門下侍郞平章事諱天老爲鼻祖入 李朝大司諫卜麟其顯祖也曰啓賢曰慶國曰祥鳳其曾大父及考而平澤林基馨其外大父也以 英孝王七年丙辰生性慈愛而風儀峻嚴在家無子弟過居鄕以救邱爲事米薷之贈未嘗或闕於産兒之家鄕隣之頌聲己籍籍矣時有縣監金某者貧虐無度胥吏輩附和之窃弄文墨濫施鞭扑徵索日甚民不聊生一境幾於塗炭公不忍坐視大會鄕民聲討罪惡逐其長而懲其徒龥之上司發倉賑給境內賴以安堵鄕人感其德戶收匙著一着謀鑄碑記蹟公曰惡足以爲名哉竟止之以六十三歲之戊午五月二日卒葬于泗川郡正東面豊井里頭風山下蘭藍嶝壬原配曰昌寧曺氏京直女生四男仁化仁浩仁珣仁柱女壻曰密陽朴海龍仁同張斗學孫曰庚義鍾義彰義長房出洪義榮義二房出震義三房出英義官義雄義建好四房出漢相永根其外孫也嗚乎如使公得早展驥足闊步於雲衢之上其所造必有不可量者而乃令區區稱譽於一方而止豈非命數者然耶此自有任其責者在公何傷也今去公之沒已近五十年而鄕之官民思慕之不衰議于仁柱斬豊碑竪之周行以寓永世之思公之德之入人之深益可驗矣今踵門而請辭者其鄕後生張斗吉與公之再從孫宰義也 銘曰暴虎憑河固是過不救同室不何謂旣好謀而事成又讓名而自諱庶幾無愧君子可以銘詔千祀,   光復 二十二年 丙午 初夏節   居昌 愼昊晟 謹撰   月城 金明煥 謹書   丙午(四二 九九年) 五月 日竪         살아서 혜택이 萬物에 미치고, 죽어서 名譽가 후세까지 중히 여김을 사람들로 하여금 능히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찌 대장부의 일이 아니리오. 그러나 타고난 운명이 고르지 못하고 형편이 서로 달라서 다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 있는 고로. 군자는 功業의 유무를 들어 인물됨을 論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 분의 가진 바를 볼 것이다. 참으로 才質과 德望이 있다면 그만이니 그 쓰이고 안 쓰이고는 시운에 따라 관계되는 것이니, 내가 다시 무엇을 관여하리오. 가까운 곳 東溪居士 崔公은 韓末에 나시어 憂國의 뜻을 지닌 재목이었으나 위정자 써주지 않아 끝내 邱壑(언덕과 구렁, 俗世를 떠난 곳)에서 늙으셨으니 아! 슬프도다. 公은 삭령인으로 휘는 漢範이요 자는 泰圭며, 泗川의 동쪽에 살았음으로 호를 東溪라 하였다.   고려문하시랑 평장사 휘 天老가 시조이며, 조선에 와서 대사간 卜燐은 顯祖시다. 가로되 啓賢. 慶國. 祥鳳은 曾大夫 및 考이며, 平澤 林基馨은 그의 외조부니 철종 7년(1856) 병진에 났다. 天性이 慈愛롭고 風采가 엄격하여 집에서는 자제된 허물이 없었고, 밖에서는 救貧하는 일을 펼쳐 産兒한 집에는 혹시라도 빠질세라 쌀과 미역을 반드시 보내주니, 고향의 이웃에서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였다.   때에 縣監 金某란 자가 있어 貪慾이 많고 포악한데다 胥吏輩(지방 관청에 딸린 하급 관리의 무리)는 附和하여 文筆로써 함부로 농락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채찍질 하며, 억지로 찾아서 거둬드림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의 생활이 塗炭에 빠져 불안하였다. 이에 公이 좌시할 수 없어 향민대회를 열고 罪惡者를 성토하여 그 官長을 쫓아내었을 뿐아니라, 汚吏들을 懲戒하고 上司에게 진정하여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누어 주니, 境內가 힘입어 평안하게 되었다.   향인들이 그 德을 느끼어 집집마다 수저 한 벌씩을 거두어 鑄碑를 만들어 그 功績을 새기려 하니 공이 이를 듣고 말씀하되. ‘어찌 이로써 이름 하리오’하고 말리니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향년 63세로 1918년 5월 2일에 타계하니, 본군 정동면 풍정리의 南羅嶝 아래 壬坐에 묻혔다. 배는 昌寧曺氏 京直의 따님이라 4남2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仁化. 人造.仁珣. 仁柱며 사위는 密陽 朴海龍, 仁同 張斗學이다. 손자는 庚義. 鍾義. 彰義가 큰아들의 소생이며 洪義. 榮義는 둘째아들에서 震義는 셋째에서 永義.官義. 旌義. 建好는 넷째에서그리고 漢相. 永根은 그 외손자이다.   아! 만일 공으로하여금 준마를 타고 일찍이 서울가서 살았더라면 반드시 큰듯을 펼쳤을 것인데, 시골 한군데서 구구한 名譽로 그치니 이것이 다 운명인가 보다. 그러나 이는 그 책무를 스스로 맡아서 행했음이니 어찌 공에 대해 마음 상해 하리오. 이제 공의 졸후 50년이 가까웠는데, 사천의 관민이 사모함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仁柱와 의논하여 큰 길가에 紀蹟碑를 세워 永世토록 잊지 않을 것이며 공의 德이 사람들 마음속 깊이 들어감을 더욱 가이 證驗할 것이다. 이번에 나를 찾아와 글을 請한 사람은 사천의 후생 張斗吉과 공의 再從孫 宰義라. 銘에 가로되, 暴虎憑河(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강을 맨몸으로 건넘. 곧 무모한 위험이 란 뜻) 가 지나치면 그 사람은 救하지 못하나니,가라사대 어찌 이미 좋은 일 이루고도 讓名함을 스스로 감추어 드러내지 않음은 부끄럼이 없도다. 君子 가히 새겨서 千年토록 아뢸지어다.   서기 一九六六년 丙年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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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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