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 孝烈婦崔末粉女史記實    정동면 대곡리의 한 효열부 최말분여사(崔末粉女史)는 적(籍)이 삭녕(朔寧)이요 휘 효훈(諱 孝薰)의 따님이며, 청천군(靑川君) 진주정씨(晋州鄭氏) 휘 수규(諱 守珪)의 후예인 휘 석구(諱 錫龜) 의 증손이요 휘 원(諱 沅) 의 손이며 휘 기하(諱 基夏)의아들 정상동(鄭相東 : 현 사천시의회 부의장)의 처이다.    효열부는 풍정리의 이름있는 집안에서 생장(生長)하여 성품(性品)과 자태(姿態)가 온순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단아(端雅)하며 어릴적부터 그 효순(孝順:효성이 지극하여 잘 순종함)의 덕(德)으로 원근(遠近)에 소문이 나더니 방년(芳年 : 스무살 전후의 꽃다운 나이) 십팔세에 출가(出家)해서도 효순과 賢淑한 부덕(婦德)이 겸비하여 부녀자가 지켜야 할 바르고 올바른 도리를 실행했다. 참으로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부녀계(婦女界) 의 규범(規範: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켜 모범이 됨)이요 현대사회의 어진 여사(女史)이다.    정씨문중(鄭氏門中)에 시집와서 그 지극한 효도로서 시부모님을 받들어 섬기고 조석(朝夕)으로 봉양을 극진히 하며, 부군(夫君)의 뜻을 받들어 알뜰살림을 이룩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함으로써 여자가 지켜나가야 할 규범(規範)으로 삼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좋은 일에는 마가 따른다 했다던가, 이 화락(和樂)한 가정에 불행한 일이 찾아들 줄이야. 장래가 촉망(囑望)되던 부군께서 당시 공무원 신분으로 진양군청(晋陽郡廳)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폐질환(肺疾患: 결핵균에 의한 폐장의 질환)에 감염되어 아까운 청년기(靑年期)를 오래도록 병서에 들어눕게 된 것이다.    시가(媤家)가 본래 청빈(淸貧)한데다 시부모님은 이미 늙으셨고 게다가 부군마져 몸져눕게 되니 자연 가세(家勢)는 기울어졌으며 더구나 오늘처럼 의술(醫術)이 발달하여 어렵잖게 고치거나 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치료약이 별반 없었던 때인지라 부군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이에 부인은 병구환을 위해 일심전력(一心專力)으로 조치(調治.調理.調攝:몸을 보살피고 병을 낫게 간호함)함에 밤낮이 없었고, 영양.안정.맑은 공기의 세가지 요법(療法)을 간병(看病)의 기본으로 삼고 병에 좋다고 하면 수십리 혹은 백리 밖이라도 걸어서 약을 구해 다녔고, 또 칠성단(七星壇)에 정화수(井華水)떠놓고 빌기도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하기를 밤낮을 모르고 16년동안을 하루같이 보살피니, 그 독실(篤實)한 정성 하늘에 닿았음인지 부군의 병세는 날로 쾌차(快差)되어갔다. 그러나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아버님께서 노병(老病, 中風)으로 병석에 와병(臥病)해 계셨는지라 부인은 약을 달여 권해 드리고, 앞과 뒤를 부축해 드리는 고생을 참아가며 가렵다 하면 긁어 드리고 대소변으로 얼룩진 옷가지를 깨끗이 씻어 입혀 드렸다.   이러하기를 또한 6년 동안을 하루같이 보살폈으며, 그러다가 조고(遭故: 부모의 상사<喪事>를 만남)를 당함에 너무나 애통망극(哀痛罔極:그지없이 애통함)한 가운데 초종장사(初終葬事)를 예법에 따라 치러내었다.    그동안 위로는 시아버님의 간병과 초종범절(初終凡節:초상이 난 뒤로부터 졸곡까지 치르는 모든 절차) 그리고 남편의 병구환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쳤으나 어렵사리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근면 독실(勤勉篤實)하게 농사를 지었고 또 때로는 계란행상으로 살림을 일구어나가니 한시인들 숨돌릴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래로는 자녀를 훌륭히 키웠으며 어언간에 이십여개 성상(星霜)이 지났다. 아들 준환(俊煥)은 현재 부산에서 영도병원(影島病院)을 경영하면서 광제(廣濟 : 仁術)의 이념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를 진료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고향의 불우아동에게 장학금을 보내고있으니 이 또한 장한 일이 아닐수없다.    어느덧 부인은 영농기술자가 되었고 근검절약으로 치산(治産:살림을 잘 다스림)하여 면내에서 둘 밖에 없는 정동. 신월국민학교에 6년동안 익명으로 장학금을 보냈으며, 이름이 들어나자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봉사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양봉(養蜂)을 쳐서 그 익힌 기술을 여성농민에게 보급하여 농가소득에 기여했는데, 이 사실 또한 알려져 <새농민> (1970년 7월호, 142-143쪽)이란 간행물에 실렸고 ‘꿀벌의 여왕 최말분여사’라는 제하에 효열, 선행(善行)에 대한 기사가 크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효(孝)와 열(烈)을 겸지한 부인의 선행이 면내에까지 널리 알려져 부녀사회의 본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덕행(德行)을 모두 우러러보게 되었으며, 본면에서는 날로 변해가는 세태(世態)에 도덕성 회복을 위한 교육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을 세 번이나 받았는데, 일찍이 1953년 9월에 효열표창을 향리에서 시상코자 하였으나 받지를 않았으며(有孝烈行里稱揚而致賞固辭不受). 1986년 6월에 효열상(정동면장), 1995년 5월 8일 효부상(대한노인회중앙회장)등을 받은 바있다.    이후 사천군에서도 포상하려고 몇 차례에 걸쳐 공적조사차 나왔으나 당사자인 본인은 그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사회의 보살핌 덕분으로 지아비의 병도 완치(完治)되어 사회에 봉사하고 있고 또 아들이 잘 되었으니 이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며 끝내 고사(固辭)하였다.    그런고로 본회(정동면지 편찬위원회)의 집필자는 최여사(崔女史)의 그 현숙한 행실(行實)이 현대사회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므로 길이 아름다운 풍속을 돈독(돈독)히 할 뜻으로 표창장에 의거하여 감히 이 글월을 기록하는 바이다.   1995년 5월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