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 學生公烈婦梁氏合墓表   진주하씨지거사천자유휘식자모령의정시문충공호정휘윤지후이운수당검열휘윤십일세조공조참의휘경호위육세조야부명락모경주이씨가선대부춘억여년이십삼이졸우순묘을해공년이십팔이무후사행무득이효언열부량구졸희지후이부원모정씨년이십이이순묘갑술귀우공명년공구려심위의약막효열부왈오문지혈능회소인즉열우지이혈관구과절이복소익일경몰열부일통즉이사습렴필절입침실이공요대액이순지내동일야군인사상기열유우도백급수사이경미몽정차칙유상문가징본군대곡구치부손원시공급열부합묘야후백여년종증손재진휴기유상일국조여이시지척열언왈종선조비유차열행이종어침인방예지과야여수노차빈방매득일소석이표기묘행오자지련이문지야여평생불희작유양문자유어의열가보세교이이고약침인자첩욕일언이불휼기력불감금어재진지청오가사제오호석불륵서차문지유전야   세을유계춘하한 안동 권재규 찬         晋州河氏之居泗川者有諱湜字某領議政諡文忠公浩亭諱崙之後而雲水堂檢閱諱潤十一世祖工曹叅議諱慶灝爲六世祖也父命洛母慶州李氏嘉善大夫春億女年二十三而卒于純廟乙亥公年二十八而無后事行無得以孝焉烈婦梁九拙喜之後而父元母鄭氏年二十而以純廟甲戌歸于公明年公遘癘甚危醫藥莫效烈婦曰吾聞指血能回甦人卽裂右指以血灌口果絶而復甦翌日竟沒烈婦一痛卽已竢襲斂畢竊入寢室以公腰帶縊而殉之乃同日也郡人士狀其烈龥于道伯及繡使而竟未蒙旌此則有狀文可徵本郡大谷狗峙負巽原是公及烈婦合墓也後百余年從曾孫載晋携其龥狀一局造余而示之戚烈言曰從先祖妣有此烈行而終於沉湮傍裔之過也余雖老且貧方買得一小石以表其墓幸吾子之憐而文之也余平生不喜作揄揚文字惟於義烈可補世敎而以孤弱沉湮者輒欲一言而不恤其力不堪今於載晋之請烏可辭諸嗚呼石不泐庶此文之有傳也   歲乙酉季春下澣 安東 權載奎 撰          泗川에 머물러 살은 晋州河氏의 휘는 湜이요 자는 실하니, 領議政 시호 文忠公 휘 崙   의 뒤이고, 雲水堂 檢閱 휘 潤은 11세조며, 工曹叅議 휘 慶灝는 6세조시다.   아버지는 휘 明洛이요, 어머니는 慶州李氏이니 嘉善大夫 春億의 따님이다.    나이 23세 때인 순조 乙亥(1815년)에 卒하니 公의 나이 28세라 無后하여 事行 無得하게 마치었다. 烈婦는 梁九拙 喜의 후이며, 아버지는 元이요 어머니는 鄭氏이니, 나이 스물인 순조 甲戌(1814년)에 公에게 출가했었다. 이듬해에 공이 癘病에 걸려 심히 위태로워 의약이 효과 없어 막막해지자 여부 가로되, ‘내가 듣건대 指血이 능히 희생시킨다’고 하면서 곧 오른쪽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注入하니 과연 거의 끊어졌던 목숨이 다시 甦生하여 다음날 끝내 沒하였다.    열부 통곡하고 殮襲이 끝남을 기다려 몰래 침실에 들어가 공의 허리띠로 목매어 殉死하니 이에 같은 날이다. 고을의 人士들이 그 열열함을 도백 및 암행어사 에게 아뢰었으나 끝내 旌門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를 徵證할 수 있는 狀文이 있나니, 본 고을 대곡리 狗峙언덕 巽坐에 공과 열부를 합장한 것이다. 백여년이 지난 뒤 중증손 載晋이 龥狀을 끼고 나에게 찾아와 보이며 戚然히 이르기를 ‘從先祖妣께서 이런 烈行이 있었는데, 마침내 그 事蹟이 묻히고 가라앉으려 하니 방계후손인 우리들의 허물임이다. 나 비록 늙고 貧寒하지만 바야흐로 작은 아름다움일 것이다’고 하였다. 나 평생에 남의 찬양문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직 義烈이 世敎에 보탬이 된다면 문득 한말 하고 싶었다. 이제 어찌 載晋의 請을 사양하랴. 아! 돌은 삭지 아니 하나니, 이글 오래도록 전하이 있을 지어라.    서기 一九四五년 늦은 봄 하순 安東 權在奎 지음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