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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위치  : 옥정앞 국도변>

○ 處士密城朴公諱肯植孝行碑 고훈운효순환생효순자금이박공행적관지신비허어의공휘긍식자자인행산공휘세균십팔세손처사휘화진자야생오세부몰국어자모기모부인전주이씨소이현숙지자조당소부지상곡철붕성하종지원비불감심일자일여방재해제무국무인불득기면수립고지난식빈도노끽진풍상정인비절역양고매당부기애호처절달야불지문지자막불엄몌이산비의성우자비호시견인기한약통재이의복음식수재첩시린부가동앙시여부모언공우양어현모지하자기초령효심순지공감양지무불주비애모지성우위간절우갱우장수유불망범과총사소상개축미수필건필경거가지시주이시반야칙시침불감사일어자기금슬지상모이천년팔십일세이종거상지일애훼과절기장지후선문생로지우노경우영미질수일신음홀일일위가인왈명일선비기일야오장명일이사배귀천로의익일오시과연엄서희이이재모유가절자계탁행기비유시모이유시자자호금세지선인야치가근검임사영오이수지육십칠세이몰부인진양정씨후공사년이몰유남삼인여일인장자남정가세빈한지중거차공민지이후만인지공등사림지투장도군지포장모성공회지찬양문적성권축남정지차거실준물의역계효심여가기의찬언 명왈고칭자향추노운운절부명성자래상문유공가행탁이범군순일기성실부천양유모유자만고륜상국고지절도사지성기일종명역비우연생사불망부종황천의여무적난민가전물의제귀유우자천외연신비도봉지전편석감어열전상세완유기경퇴속가려 서기 일구삼일년 신미 이월 일 전주 이봉수 찬 응천 박헌기 서 장자남정 차자남영 이수 손윤재 덕재 규재 증손현상 신웅 박 현손승영 순 우비위풍우마멸고경영미질석재각전비문이증손현손추가첨록의 김해 김정경서 서기일구칠구년 기미 청명일 손현상봉자명 근개수 古訓云孝順還生孝順子今以朴公行蹟觀之信非虛語矣公諱肯植字子仁杏山公諱世均十八世孫處士諱華振子也生五歲父歿鞠於慈母其母夫人全州李氏素以賢淑之姿早當所夫之喪哭澈崩城下從之願非不甘心一子一女方在孩堤撫鞠無人不得己勉守立孤之難食貧到老喫盡風霜情因悲節亦良苦每當夫忌哀號悽切達夜不止聞之者莫不掩袂而酸鼻矣性又慈悲好施見人飢寒若恫在已衣服飮食隨在輒施隣婦街童仰視如父母焉公又養於賢母之下自其髫齡孝心純至供甘養志無不周備愛慕之誠尤爲懇切于羹于醬須臾不忘凡過䕺祠塑像介祝眉壽必虔必敬居家之時晝而侍飯夜則侍寢不敢私逸於自己琴瑟之床母以天年八十一歲而終居喪之日哀毁過節旣葬之後羨門生路至于老境偶嬰微疾數日呻吟忽一日謂家人曰明日先妣忌日也吾將明日而死陪歸泉路矣翌日午時果然奄逝稀而異哉母有嘉節子繼卓行豈非有是母而有是子者乎今世之善人也治家勤儉臨事穎悟而壽之六十七歲以歿夫人晋陽鄭氏後公四年而歿有男三人女一人長子南政家勢貧寒之中擧此攻玟之而後萬人之供燈士林之投章道郡之褒狀慕聖公會之贊揚文積成卷軸南政之此擧實遵物議亦係孝心余嘉其意撰焉 銘曰古稱玆鄕鄒魯云云節婦名聲自來相聞惟公嘉行卓異凡郡純一其性實賦天良有母有子萬古倫常鞠孤之節禱詞之誠忌日終命亦非偶然生死不忘部從黃泉猗歟茂蹟難泯可傳物議齊歸有佑自天巍然新碑道峰之前片石堪語列篆詳細頑儒起敬頹俗可勵 西紀 一九三一年 辛未 二月 日 全州 李鳳洙 撰 凝川 朴憲琦 書 長子南政 次子南英 李洙 孫潤在 悳在 圭在 曾孫鉉尙 信雄 博 玄孫承永 純 右碑爲風雨磨滅故更永美質石材刻前碑文而曾孫玄孫追加添錄矣 金海 金正敬書 西紀一九七九年 己未 淸明日 孫鉉尙奉慈命 謹改竪

  옛 가르침에 이르기를, 부모에 순종하고 효도하는 사람은 다시 아들을 낳아도 순종하고 효도하는 아들을 낳는다고 하였다. 지금 朴公의 行蹟을 살펴보면 이 말이 헛된말이 아님을 믿을 수 있다. 公의 휘는 肯植이요, 자는 子仁인데 杏山公 휘 世均의 18세손 處士 휘 華振의 아들이다. 태어나서 다섯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全州李氏는 근본이 현명하고 정숙한 분으로서 일찍이 夫君의 喪을 당하여 城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설움이 북받치어 痛哭을 하고 따라 죽을려고 하였으나, 어린 아들 딸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이를 보살펴 길러 줄 사람이 없으니 부득이 그러지도 못하고 守節을 하면서 혼자 어렵게 살았다.    가난하여 年老할 때까지 온갖 風霜을 다 겪으면서 살았다. 情으로 슬픔을 달래면서 살았지만 역시 착한 분이었다. 매번 부군의 忌日이 되면 밤새 처절한 호곡이 끊이지 않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흘러 소매로 눈물을 닦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콧등이 시큰하게 했다.    성품이 또한 자비로워 춥고 굶주린 사람을 보고 마음이 아프면 이웃 사람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수시로 주어 즐겨 베풀었다. 이웃 부인들과 거리 아동들이 부모처럼 우러러 보았다. 公 또한 賢母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孝心이 지극하여 어머니에게 음식물을 供養함에 있어서는 愛慕之精誠이 더욱 간절하여 잠시라도 국과 간장을 밥상에 빠뜨리지 않았다. 祠堂과 彫像앞을 지나갈때와 老人과 말을 할 때에는 일일이 반드시 敬虔히 하였다. 어머니가 집에 계실 때에는 낮에는 음식으로 모시고, 밤에는 잠자리를 便하게 모시면서 자신의 부부의 琴瑟이나 편안함에는 감히 생각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81세로 천수를 다하니 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쳤으며, 예절에 따라 장례를 지낸 후에는 어머니 묘소까지 다니는 길을 내었다. 나이 많아지자 偶然히 가벼운 질병에 걸리어 며칠 앓다가 갑자기 하루는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일은 어머니 祭祀날이다. 내가 내일 죽어서 어머니 黃泉가시는 길을 모실 것이다”고 말하였다. 과연 다음날 午時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드문일이요 이상한 일이다. 어머니에게는 아름다운 節介가 있었고, 아들은 따라서 卓越한 행동이 있었으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 어찌 아니겠는가!    公은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다. 집안 일에는 근면하고 검소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뛰어나게 聰明하였고, 67세에 돌아가셨다. 夫人은 晉陽鄭氏인데, 公이 가신지 4년 후에 돌아가셨다. 3남1녀에 장자는 南政이다. 집안 형편이 가난한 가운데도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려 하니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도와주고 士林에서 郡과 道에 글을 보내어 褒狀을 주게하고, 慕聖公會에서는 찬양문이 쌓여서 두루마리를 이루니 南政이가 실제로 이와 같은 쾌거를 이르키니 이에 따라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어났고 또한 代를 이은 효심에 내가 그 뜻을 嘉尙히 여겨 글을 짓노라, 銘에 말하노니    옛적에 절부와 효자의 명성이 전래부터 들려온다 하면 鄒나라와 魯나라를 칭하노라.    오직 公이야 말로 일반 대중과는 달리 特異하고 卓越한 행동을 하였나니 嘉尙도 하고 純粹한 그 성품은 타고 났노라.    어머니가 있고 子息이 있음은 만고의 倫理이니 절개지켜 홀로 길렀으니 기도하고 제사지낼 정성이로다.    어머니 忌日에 돌아가셨으니 역시 우연은 아니니 생사를 초월하여 黃泉길 가시는 어머니를 모셨노라.    아! 그 많은 업적을 다 전할수 없으니 일어나는 물의는 하느님에게로 돌리자구나.    道德山 앞에 碑를 새로 세우니 巍然도 하네. 이 자그만한 돌이 상세한 내용을 篆書로 써서 할말 다차네. 무시 당하는 儒學을 다시 우러러 보게 할 것이며 허물어져 가는 美風良俗을 권하여 힘쓰게 할 지어다.   서기 1931년 2월 일   全州 李鳳洙 지음   凝川 朴憲琦 글씀   이 비석으로 비바람으로 磨滅되었기에 다시 좋은 돌에다 앞의 비문을 새겨 손자와 증손, 현손을 추가로 더 기록하였다.   金海 金 正 敬書   서기 1979년 청명일   孫 鉉尙 奉慈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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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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