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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孝子朔寧崔公行錄   여왕래사상개유년의상유문어사지부노고최공휘대윤순효인야사친경양비지기성저   어물다이적운금년춘여적지신풍공지증손수묵유기가장일통래시여왈차오증왕고실록   야오문선조유미이불전불효야무실이과장지무선야오증왕고성효지행파재인이목지금   송지불기이고후승영체고미득소이수기전자시오불효지죄이대약우유일호무선지심칙   시중오죄야유집사람차실록이불이아위무선혜이가전이비면아위불효칙행의유집사기   념지재여구이작왈망의불녕비기인야합종당세대군자병필자이모지호수묵복감임이전   왈집사지양지고야수연장행유록향야록향자필심문기향이후절집사어오향필심기소문   의자감간여사불획이근안기장공휘대윤자원효계출삭령비조휘천노고려평장사중조휘   복린입아 조대사간생휘도원일지평역사군개유성적생휘경연사정생휘자문충순위시   거사천풍정리생휘정충순위생휘발참봉생휘진녕참봉생휘두남동년우임진난봉친지효   우적적역감복이효문급복사재읍지 증장락원정식공지고조야증조휘원입조휘수금고   휘일겸비남원양씨 영조병술생공생우풍정리제공유유지성부모질첩제읍불잠리측우   과물필회이진지초장이선공명왕독서우구계지대관대거공가십여리유승가일이후어정   학도수십인다유희설태이공독불대사독종일골골세여흡유진취가빈불득계독서지량칙   내모어대지수호자승왈이춘양시불필임타인야오불사노계오식가야여시이혹유여잉칙   필매어육귀공친주차학도유시설음공수수재견 이구불근일련필사친리지방인다감열   언기관첩엄권태식왈친노의빈무이양오불능복독서의어시궁병래이경수년가초요양무   감언이유지색족이신호명우노리지언미상가제동복인개칭효재무간언선공상병저이극   의운섬방가료시적대동설호무가구처공호읍구지불기홀전상수간득일섬귀가칙사장리   우출일섬용지병과추선공병시사록육여리회공우구지불득대인필체읍언지일일자계변   귀전간소수중약출삼미어기일리야우일장타전산석애하절족이불능주공즉포득기성효   소감무괴어고지빙리동순야조양간애훼유제기장여백중제공질성묘수기한서우미상일   일혹폐우근어사사매우기진전기순일제소필치여재지성지대질이불소해을사십이월초   칠일관화우본제향년팔십장우현동가곡부태지원배입계정씨사인일남지녀생육남이녀   장상옥차상욱상철상의상관상신녀장적하팔순차적강사위상옥자광영광영자심묵상철   자광헌광헌자수묵이외제손불능진록오호차공지효행지실록야불녕역상임문어인자이   절유소감자존부효자백행지원이역인자분내사야범수발부이생구차이성자숙불지오분   지유차도리이고행지불성필경능진기분자불일이어천백역수금고절무이근유지성지난   기인야유여시호약공칙가위지성지행이능진기분자야성지지능관금석철궁양이물무불   감자황동차이성이위지인자재관차록자기역유소감발이락위가전지언고이차봉고우능   언지군자가야      상지 이십일년 갑신춘 삼월 하한   성산 이도추 근상         余往來泗上蓋有年矣嘗有聞於泗之父老故崔公諱大潤純孝人也事親敬養備至其誠著   於物多異蹟云今年春余適至新豊公之曾孫守黙유其家狀一通來示余曰此吾曾王考實錄   也吾聞先祖有媺而不傳不孝也無實而夸張之誣先也吾曾王考誠孝至行播在人耳目至今   誦之不己而顧後承零替姑未得所以壽其傳者是吾不孝之罪已大若又有一毫誣先之心則   是重吾罪也惟執事覽此實錄而不以我爲誣先惠以可傳而俾免我爲不孝則幸矣惟執事其   念之哉余瞿而作曰妄矣不佞非其人也盍從當世大君子秉筆者而謀之乎守黙復歛袵而前   曰執事之讓之固也雖然狀行猶錄響也錄響者必審聞其響而後節執事於吾鄕必審其所聞   矣玆敢懇余辭不獲已謹按其狀公諱大潤字元孝系出朔寧鼻祖諱天老高麗平章事中祖諱   卜麟入我 朝大司諫生諱道源逸持平歷四郡皆有聲績生諱景淵司正生諱自雯忠順衛始   居泗川豊井里生諱停忠順衛生諱潑叅奉生諱振寧叅奉生諱斗南童年遇壬辰亂奉親至孝   遇賊賊亦感服以孝聞給復事載邑誌 贈掌樂院正寔公之高祖也曾祖諱元立祖諱壽嶔考   諱一謙妣南原梁氏 英祖丙戌生公生于豊井里第公幼有至性父母疾輒啼泣不暫離側遇   果物必懷以進之稍長以先公命往讀書于龜溪之大觀臺距公家十餘里猶乘暇日而候於庭   學徒數十人多遊戱泄怠而公獨不待師督終日矻矻歲餘洽有進就家貧不得繼讀書之糧則   乃謀於臺之守護者僧曰爾春糧時不必賃他人也吾不辭勞繼吾食可也如是而或有餘剩則   必買魚肉歸供親廚且學徒有時設飮公雖手宰犬 而口不近一臠必思親裏之傍人多感悅   焉旣冠輒掩卷太息曰親老矣貧無以養吾不能復讀書矣於是躬秉來以耕數年家稍饒養無   憾焉怡愉之色足以信乎明友怒詈之言未嘗加諸僮僕人皆稱孝哉無間言先公嘗病疽而劇   醫云蟾蚄可療時適大冬雪冱無可求處公號泣求之不己忽田桑樹間得一蟾歸家則士墻裏   又出一蟾用之病果瘳先公病時思鹿肉與鯉鱠公又求之不得對人必涕泣言之一日自溪邊   歸田間小水中躍出三尾魚其一鯉也又一獐墮前山石崖下折足而不能走公卽捕得其誠孝   所感無愧於古之冰鯉冬筍也遭兩艱哀毁踰制旣葬與伯仲諸公迭省墓雖祈寒暑雨未嘗一   日或廢尤謹於祀事每遇忌辰前期旬日齊素必致如在之誠至大耋而不小懈乙巳十二月初   七日觀化于本第享年八十葬于縣東柯谷負兌之原配入溪鄭氏士人一南之女生六男二女   長尙玉次尙旭尙喆尙薿尙寬尙信女長適河八淳次適姜思渭尙玉子光永光永子審黙尙喆   子光巘光巘子守黙以外諸孫不能盡錄嗚乎此公之孝行之實錄也不佞亦嘗稔聞於人者而   竊有所感者存夫孝者百行之源而亦人子分內事也凡受髮膚以生具此彝性者孰不知吾分   之有此道理而顧行之不誠畢竟能盡其分者不一二於千百歷數今古絶無而僅有之誠之難   其人也有如是乎若公則可謂至誠之行而能盡其分者也誠之至能貫金石徹穹壤而物無不   感者況同此彝性而爲之人者哉觀此錄者其亦有所感發而樂爲可傳之言姑以此奉告于能   言之君子可也      上之 二十一年 甲申春 三月 下澣   星山 李道樞 謹狀

  나 泗上을 왕래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일찍이 사천고을의 古老에게서 듣건대, 타계하신 崔公의 휘 大潤은 순수한 孝道人이라 어버이를 섬기매 恭敬히 봉양하고 지극한 精誠은 나타난 異蹟이 많았다고 하였다. 금년 봄 나 마침 豊井里에 갔는데 公의 증손 守黙이 家狀 한 통을 들고와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전의 曾王考의 實錄입니다. 저가 듣건대 선조께서는 媺善함이 있으되 傳하지 못함을 不孝하는 것이요, 실속없는 일을 誇張하는 것은 선조를 속이는 일일 것입니다. 저의 증왕고께서 정성스런 효도와 지극한 行實은 사람들의 耳目에 전파되어 여태까지 칭송이 자자한데, 후손들이 못나서 아직 진실되게 전하지 못하옴은 이 우리들의 不孝한 죄 클뿐더러 또 티끌만치라도 속이려는 마음이라면 이 또한 우리들의 죄가 더욱 무거울 것입니다. 오직 선생께서는 이 실록을 보시고 우리들이 조선을 속이려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히 전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不孝됨을 免하게 해 주시면 多幸한 일이오니 선생께서는 이 점을 留念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고 하였다. 나 두려웁게 이르되, ‘나는 망명되이 不佞하여 그런 사람이 못되는데 어찌 당세의 대 선생한테 문의하지 않느냐’고 일렀다. 守黙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굳이 사양하시는데, 그러나 行狀이란 것은 影響과 같은 것이고 영향을 기록하는 이는 그 영향을 살펴 들은 뒤 調節하는 것이므로 선생님은 우리 고을의 그 소문 들은 바를 반드시 살펴 주시기를 감히 간청하나이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지만 거둬들이지 못하고 삼가이 그 家狀을 살피니, 公의 휘는 大潤이요 자는 元孝이며 호는 涵安齋인데 계출은 朔寧이다. 시조의 휘는 天老이니 고려 門下侍郞 平章事며, 중조의 휘는 卜麟으로 조선조의 大司諫이요, 아들의 휘 道源은 遺逸持平으로 네 개 고을의 郡守를 역임하여 聲績이 높았고, 아들 휘 景淵은 別侍衛 副司正이요, 아들 휘 自雯은 忠順衛이며 泗川에 입향하여 풍정리에 始居하였다.    아들 휘 停은 역시 忠順衛며, 아들 휘 潑은 叅奉이며, 아들 휘 振寧 또한 참봉이요, 아들 휘 斗南은 어린나이에 임진란을 당하니 효성이 지극하여 盜賊을 만났으나 도둑 또한 그 효성에 感服하였다. 뒤에 孝聞되어 나라에서 復戶의 恩典이 내려 掌樂阮正에 증직되어 邑誌에 실렸으니, 이 분이 公의 고조시다. 증조의 휘는 元立이며, 祖의 휘 壽嶔이요, 考의 휘는 一謙이며, 妣는 南原梁氏라, 英祖丙戌年(1766) 풍정리 집에서 났다. 公은 어릴적부터 지극한 성품으로 부모의 병에 문득 울며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혹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가지고 와서 드렸다. 조금 자라서 아버지의 말씀을 딸 구암리 大觀臺에 가서 글을 읽었는데, 집에서 書齋까지는 10여리이나 오히려 쉬는 날을 틈타서 어버이의 안부를 살폈다.    학도 수십인은 장난질과 게으름 피우는 일이 많았으나, 公은 홀로 스승의 꾸지람을 듣지 않았고 終日토록 부지런히 글공부에 힘썼으며, 1年 남짓에 흡족한 進就가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계속하여 글 읽기를 糧米를 대지 못하면, 이에 서재 지키는 사람에게 꾀하여 이르기를, ‘네 양식을 찧을 때 다른 사람 대신 내가 거들테이니 그 대가로 나에게 밥을 먹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혹 품삯이 남으면 그 돈으로 반드시 魚肉을 사가지고 집에 와 몸소 음식을 마련해 드렸고, 또한 학도끼리 잔치가 있을 때, 公이 손수 개와 돼지고기를 요리하되 한점의 고기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고 반드시 어버이를 생각하여 싸서 갖다드린,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이미 成人인 되어 문득 책을 덮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어버이께 늙으셨는데 가난하여 奉養할 수가 없으니, 나 다시 글공부를 할 수 없도다’고 하고, 이로부터 손수 농사지은 수년에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져 봉양함에 거리낌이 없었고, 기뻐하고 화락한 얼굴은 벗들로부터 信賴를 받았으며, 성내어 꾸짖는 말은 일찍 이 손아래 사람에게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 일컬었고 딴말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일찍이 악성 腫氣가 심하여 의원이 하는 말에, 두꺼비를 약으로 쓰면 낫는다 하므로 때는 한겨울로 눈이 얼어붙어 가히 구할 곳이 없는지라, 公이 울먹이며 구하기를 마지아니하니 문득 밭가 뽕나무 사이에서 한 마리의 두꺼비를 잡아 집으로 돌아온 즉, 흙담 속에서 또 한 마리의 두꺼비가 나와 약으로 썼더니 과연 병이 나았다.    아버지께서 병이 났을 때 노루고기와 잉어회를 생각하기에, 公이 또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고 남을 만나면 반드시 울먹이면서 말하더니, 하루는 시냇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노가의 작은 물속에서 세 마리의 고기가 뛰어 나왔으므로 그 중의 한 마리가 잉어였다. 또 한 마리의 노루가 앞산 돌벼랑 밑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 달아나지 못하기에 公이 곧 이를 사로잡으니, 그 誠孝의 소감은 옛 冰鯉와 冬荀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부모의 喪事를 당하여 애통함이 그지없었으며 이미 장례를 치룬 뒤에 여러 兄들과 차례로 성묘함에 있어, 춥고 더울 때나 비가와도 열흘에 앞서 齊戒素食하고 반드시 옆에 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기를, 나이 大耋에 이르도록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을사(1845年) 12월 초이렛날 本第에서 卒하니 향년 80이었다. 장사는 본면 동쪽 柯谷山    언덕 酉坐며, 配는 草溪鄭氏로 6男2女를 두었다. 장자는 尙玉이요, 차자는 尙旭.尙喆.尙籎.尙寬.尙信이며, 장녀는 河八渟에게, 차녀는 姜思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尙玉의 아들은 光永이요 光永의 아들은 審黙이며, 尙喆의 아들은 光巘이요 光巘의 아들은 守黙이니, 그 외 여러 손자들은 많아서 다 기록을 못한다. 아! 이 어른의 효행은 참된 기록이니라. 내가 또한 일찍 사람들에게 많이 들어서 느낀 바가 있으니, 대저 孝란 것은 百行의 근원이며 또한 남의 자식 된 도리이다. 무릇 부모로부터 때어나서 떳떳한 성품을 갖춘 자 누군들 내 분수의 이러한 도리 있음을 알지 못할까마는 돌아보건대, 정성치 못하여서 필경 그 분수를 다하는 자 千百에 하나 아니면 둘이 있을까 말까이다. 예나 지금이나 絶無하는데, 겨우 있다면 誠이 그 사람을 어렵게 함이 또한 이와 같겠는가. 때문에 公인즉 至誠을 행해서 그 분수로 능히 다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정성이 지극하면 金石을 뚫고 하늘과 땅을 통해 萬物의 느낌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 아름다운 성품과 같이 되는 것이 사람일 것이다. 이 기록을 보는 이는 그 또한 느끼고 분발하는 바 있을 것이니, 즐겨 可傳의 말을 해서 이로써 有德한 선비에게 또 다시 청할 지어다.    高宗 二十一年(1884) 甲申春 3月 하순    星山 李道樞 삼가 짓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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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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