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 서포(西浦). 곤양(昆陽)에서 활약한 송지환(宋芝煥)   송지환은 1847년 정동면 감곡리에서 출생하여 소년기에 부모님과 함께 사천군 서포면(西浦面) 선전리(仙田里)로 이주하여 살았다.    서포면 개진학교(開進學校:서포공립보통학교의 전신)를 나온 그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나갈 즈음 진주와 사천에 서도 3월중순경 잇달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열혈청년(熱血靑年) 송지환은 이것이 한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는 거족적인 절규(絶叫)임을 깨닫고 때마침 서포 청년회(西浦靑年會)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우리 청년들은 앞서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일제(日帝)에 투쟁하다 희생된 선열(先烈)들의 애국정신을 계승해야 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들은 다함께 힘을 모아 일제에 항거하여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요지의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동지의 신영범(申永範)과 함께 수백 매의 태극기를 만들어 집집마다 은밀히 배포하는 한편, 최범술(崔凡述 : 훗날 多率寺 住持와 제헌국회위원을 지냄)등 8인이 주도하여 4월 16일에는 개진학교 학생 및 군중 수백 명을 동원하여 곤양시장에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그는 일헌(日憲) 사천분견대(泗川分遣隊)에 체포되어 군중을 선동한 불순한 연설과 만세독립운동 소요의 주모자로 몰리어 마침내 대구감옥(大邱監獄)으로 이송되어 1년의 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송지환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체포령이 내렸고, 곧 일본으로 몰래 숨어들어간 그는 그곳 애국학생들과 손이 닿아 역시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어느 날 그의 본가에는 낯선 승려(僧侶)가 찾아와 송지환의 동지라 하며 일본에 사는 그의 주소를 묻는지라 가족들은 그 말을 믿고 순순히 편지봉투의주소를 보여주었다 한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송지환은 일본 땅에서 또 다시 체포, 사천으로 압송되어 일경에게 모진 고문(拷問)끝에 마침내 옥사(獄死)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그의 가족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렸는데, 지금에 이르러 보다 자세한 송지환의 애국활동을 밝혀낼 길이 없어 못내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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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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