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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삭녕최씨(朔寧崔氏) 사정공파(司正公派), 고읍파(古邑派) (고읍, 예수, 풍정, 대산, 만마)   삭녕최씨 종파(宗派) 세계(世系)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시조(始祖) 평장공(平章公) 휘 천로(天老)의 후손인 휘 유가(瑜價)를 원조(遠祖)로 하고 또 그의 후손인 휘 연(珚 : 一諱 玎) 부사공(副使公)을 1세조로 받들고 있다. 그리고 아들 시옥(時玉)은 고려조에 승봉랑사헌규정(承奉郞司憲糾正)을, 손자 수명(守明)은 승봉랑에 사설서령(司設署令)을 역임했다.   4세손 복린(卜麟)께서 가문을 중흥시킨 현조(顯祖)로서 홍무(洪武) 갑인(甲寅 : 1374년)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太祖) 때 지군사(知郡事)로 나가 여러 가문의 정렬(旌烈)을 천거 포청(褒請)하는 등 맑고 어진 정사(政事)로서 치적(治績)을 남겼고, 이어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이후 퇴로(退老) 진주(晋州)하여 동면 조동(槽洞 : 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에 살았는데, 그 때 향도 제현(鄕道諸賢)과 더불어 촉석루(矗石樓)를 중창(重創), 소요(逍遙)했다. 이에 호정(浩亭) 하륜(河崙) 선생이 작누기(作樓記)하니 사재(事載) 진읍지(晋邑誌)하였다. 공의 산소는 양위분 함께 금산면 갈전리에 소재하며, 후손들이 영사재(永思齋)를 세우고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5세손 도원(道源) 자 호연(浩然)이며, 사간공(卜麟)의 외독자로 홍무 계축(癸丑 : 1373년)생. 진사(進士)로서 관직 일지평(逸持平 : 사헌부(司憲府)에 이르렀으며, 또 4군(郡)의 수령(守令)을 역임하는 동안 그 성적(聲績)이 높았다. 봉친공양(奉親恭養)이 지극했으며, 내외정간(內外丁艱) 때는 몸을 상했고 모두 여묘(廬墓)로서 종제(終制)하였다.   지평공은 아들 네 분을 두었으니 이들 대에서 4파로 갈리었다. 1자 경부(景溥 : 6세)는 생원 용인교도(龍仁敎導)를 지내니 교도공파(敎導公派 : 一云 振威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2자 경연(景淵)과 3자 경천(景泉)은 품계(品階) 별시위 부사정(別侍衛副司正)하니 각기 부사정공파(副司正公派)의 파조며, 4자 경시(景時)는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역임하고 현감공파(縣監公派 : 一云 萬頃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 중에서 두 부사정공파는 2자 경연(景淵)이 사천파(泗川派)이며, 3자 경천(景泉)은 진주파(晋州派)로서 아들 형제를 두어 장자 율(嵂)이 양산파(陽山派), 차자 의(嶷)가 진주파이다.   입향조(入鄕祖)는 7세손 자문(自雯)이며 사정공(司正公 : 煇 景淵)의 독자로서 관(官) 충순위(忠順衛 : 양반의 고위 자손들이 복무하는 특수병종)를 지냈다. 이 선조께서 경기도 진위군(振威郡 : 현 평택군의 속면)으로부터 자손들의 대계(大計)를 생각하여 산자수명하고 길지(吉地)를 택한 곳이 진주를 거쳐 유서(由緖)깊은 정동 풍정(豊井)에 시거(始居)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5백수십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입향조 이후 대대로 세거(世居)해 오면서 후예(後裔)의 자손들이 창성(昌盛)하여 사천일원에서 대성(大姓)을 이루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소는 내외분과 함께 정착지의 동쪽 저전산(楮田山)에 소재하고 묘하에는 분암(墳庵) 유원재(有源齋)를 건립하여 해마다 음력 10월, 파조 이하 수세(數世)를 제향하고 있다.   8세손 정(停) 역시 충순위를 지냈다. 이분께서 아들 세 분을 두었는데, 장남 연(演 :9세)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로서 고읍파조(古邑派祖)며, 차남 발(潑)은 제용감 참봉(濟用監叅奉)으로 뒤에 말하는 6파조(六派祖), 삼남 집(湒)은 처사(處士)로 행위(行義)하니 교동파조(校洞派祖)시다.   이리하여 사천파는 입향조 이래 다시 8파로 분파되었는데, 이중에 6파는 12세로부터 또다시 갈라졌고, 8파 가운데 고읍파가 직계 종파(宗派)이다.   12세손 용회(龍會)는 사천파조(景淵)의 직계 종손(宗孫)으로 입향조에게는 5대손, 주부공 연의 증손이다. 선고는 11세 두운(斗雲)으로, 형제는 공을 비롯 인회(麟會), 봉회(鳳會), 난회(鸞會) 등 네분으로 맏이인 용회께서 고읍파조(古邑派祖)가 되신다. 그러니까 고읍파는 사천파조 이래에 다시 나뉘어진다. 8파 가운데 종파(宗派)이다.   8파라 함은 고읍파를 비롯하여 용회의 재종숙(再從叔)뻘 되는 첨추공 휘 두남(斗南 : 潑 의 손자) 밑에 6파(長派, 龜岩派, 新復派, 夢垈派, 甘谷派, 季派)와 또 재종숙 명원(明遠, 湒의 손자)의 자 학(鶴)에서부터 교동파(校洞派)라 일컬는다. 각 파조는 모두 삼종형제간(三從兄弟間)으로 서로 돈목(敦睦)하는 의(義)를 지키며 각기 세계를 이었다.   파조(고읍파) 용회는 영립(永立. 13세손), 옥립(玉立, 叔父 麟會에게 出系), 기립(琦立) 등 3형제를 두었고, 파조의 넷째 아우 난회 밑에는 처대(處大)와 치대(致大) 형제를 두었다. 이 중에 처대의 자는 탁보(卓甫)인데, 일찍이 무과(武科)에 올랐다. 낙안군수(樂安郡守)를 비롯해 6읍의 주쉬(主倅)를 두루 역임하여 이르는 곳마다 치적을 남겨 성적(聲績)이 높았고 읍지에 오른 인물이다. 영립의 직계 후예는 14세손 진종(鎭宗), 15세손 몽인(夢仁), 16세손 만중(萬重), 17세손 곤(崑), 18세손 계의(啓毅), 19세손 병군(炳國), 20세손 경찬(敬贊), 21세손 우범(禹範)으로 세계하였다.   21세손 한범(漢範)은 1856년(철종 7, 丙辰)에 선고 상봉(祥鳳)과 평택임씨(平澤林氏) 사이에 4형제 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태규(泰圭), 호는 동계(東溪)로서 고읍파조 9대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자애(慈愛)롭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풍의(風儀)는 매우 엄격하였다. 재가(在家)에서는 자제(子弟)의 허물됨이 없었고, 밖에서는 여러 가난한 집에 출산(出産)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쌀과 미역 등을 보내어 덕을 베풀었으니 칭송(稱頌)의 소리가 높았다. 그 무렵 고을에는 김모(金某)라는 현감(縣監)이 있었는데, 그는 갖은 탐학(貪虐)을 서슴없이 저지르는데다 서리배(胥吏輩)들 마저 덩달아 문묵(文墨)의 농간(弄奸)으로 핍박(逼迫)을 자행하니 고을 사람들은 날로 도탄(塗炭)에 빠졌다. 이 때 거사(居士) 최공은 참아 이를 좌시(坐視)할 수 없어 그의 주도로 향민(鄕民)을 모아 성토대회(聲討大會)를 열고, 현감이 저지른 죄악을 일일이 들추워 응징(膺懲)하고 탄거(彈去)케 하니 그의 상사(上司)도 이에 따랐다.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발창(發倉)으로 진휼(賑恤)하게 하였으니 경내의 주민들은 공의 힘입은 바 커서 모두 생업에 안도(安堵)하였다. 공은 63세를 일기로 1918년 5월 2일에 타계했는데, 이후 향인들은 국도변인 풍정리 어귀에 공의 덕행(德行)을 기리는 기실비(紀實碑)를 세웠다.   후예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 22세손 호경(好卿) : 정동초등학교 교사, 부산국세청 총무과장 역임 • 23세손 훈의(勳義) : 적명 삼주(三柱, 사천 영남쌀집 대표) • 23세손 창의(昌義) : 통영시 동사무소 동장 • 23세손 진의(震義) : 의령군농촌지도소 소장 • 23세손 재용(在龍) : 동아대학교 이과대학 학장(이학박사) • 23세손 준의(準義) : 사천개인택시 조합장 • 24세손 도생(道生) : 예수리 이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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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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