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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1. 사천의 사찰개사(寺刹槪史) 우리 고장에 불교가 들어온 연대를 정확히 알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삼국유사 : 三國遺事>에 나온 <가락국기 : 駕洛國記>나 <조선사찰사료 : 朝鮮寺刹史料>에 기록된 귀룡사(龜龍寺)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북방 불교를 받아들이기 훨씬 이전인 서기 48년을 전후하여 남방불교의 전래 즉, 가야불교(伽耶佛敎)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먼저 가락국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서기 42년을 전후하여 경남과 경북 일부를 중심으로 6가야국(伽耶國)이 섰는데, 이 가운데 김해지방에 자리 잡은 가락국에 서기 48년경 중인도(中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으로부터 보옥조사(寶玉組師)가 바다를 건너옴으로써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보옥조사의 누이인 허황옥(許黃玉) 공주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후가 되어 10왕자의 두 공주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일곱 왕자가 외숙이자 선사(禪師)인 보옥조사를 따라 출가하여 승려(僧侶)가 되니 이 일곱 분 스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승려라 알려진다. 이 일곱 왕자는 김해의 불모산(佛母山) 장유암(長游庵)에서 득도(得道), 가야산과 지리산에서 수도(修道)하여 마침내 도를 이루니 세칭 칠불(七佛)이 바로 이분들이며, 지리산 쌍계사(雙磎寺) 위쪽 칠불암(七佛庵)이 그들의 수도처인 셈이다. 이들은 도(道)를 깨달은 뒤 가야제국(伽耶諸國), 혹은 伽耶聯盟國)을 두루 다니면서 불법(佛法)을 폈으니, 가야제국 중 사물국(史勿國)이 지금의 사천지방에 있었으므로 사천(곤명면을 포함)의 불교는 이분들에 의하여 시작되었거나 아니면 이분들의 뒤를 이어받은 스님들에 의하여 싹이 텃을 것으로 보여 진다. 다음으로 지금의 사남면 화전리 산26번지에 구룡사(九龍寺)의 전신인 귀룡사(龜龍寺, 뒤에 歸龍寺라 함)의 사적(事蹟)이 그것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사적에는 우리나라의 북방 불교가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처음 들어온 경위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 눌지왕(訥祗王 : 417~457)의 둘째 왕자가 출가하여 사주(泗州, 泗川) 땅 남면의 관음전(觀音殿 : 금용산(金龍山)>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백천골(<白川谷>로 추정)에 머물다가, 때마침 중국에서 건너온 운집대사(雲集大師)를 만나 그 인연으로 삭발하고 도를 닦아 뒤에 옥보(玉寶)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다시 궁궐로 들어가 모왕후(母王后)를 효심으로 깨우치게 한 후 탐욕(貪慾)을 버리게 하고 많은 재물을 모아 사천으로 왔는데, 영험(靈驗)한 곳을 택지(擇地)하여 절을 세우니 이 절이 구룡사라 한다. 그 뒤 옥보선인(玉寶禪人)은 서봉사(捿鳳寺 : 다솔사 서봉암의 전신), 용암사(龍巖寺: 소재지 미상)를 거쳐 지리산에 들어간 후 이른바 운상원(雲上院: 七佛庵)을 짓고 7왕자와 함께 마침내 득도성불(得道成佛)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구룡사의 사적은 칠불암의 창건설화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러나 후자의 사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여러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없질 않다. 그것은 옥보선인(玉寶禪人)이 신라 눌지왕(訥祗王)의 둘째 왕자가 아니라 위에서 말한 허왕후의 동생인 보옥조사(寶玉祖師)를 잘못 기록한 까닭에서다. 왜냐면, 신라 눌지왕 때의 사천지역은 아직 신라영역(領域)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초기가야연맹체(初期伽耶聯盟體)의 한 소국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룡사의 사적이 비록 허탄(虛誕)하여 아직도 전설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으나, 사천이 옛 땅이었던 사물국에 전해졌다는 불교문화는 중국계통의 북방불교가 아닌 인도(또는 남쪽)쪽의 남방 불교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가야제국을 병탄(倂呑)하므로 해서 가야사(伽耶史)는 모두 늪으로 깊숙이 빠져 버리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가야시대의 불교를 살필만한 문헌이나 유물유적 등의 사료는 찾다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초기가야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논리이겠고, 앞으로 우리가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여겨진다. 이리하여 만일 가야시대 불교문화 전래 사실이 고증(考證)된다면 한국의 불교 전래 역사는 지금까지 밝혀진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서기 372년보다는 적어도 300년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문헌상에 나타난 사천의 동부지역 사찰을 살펴보면 귀룡사(龜龍寺)·적선사(積善寺)·흥보사(興寶寺)·배방사(排房寺) 등이 눈에 띄인다. 이 중에 귀룡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룡사의 후신으로 귀룡산(歸龍山, 지금의 구룡산)에 있다 하였고, 나머지 세 절은 모두 와룡산(臥龍山)에 있다고 하였다. 이때의 와룡산이란 표기는 지금의 와룡산(799m)이 아니라 사천의 동부지역 산악을 통틀어 망라한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면 적선사·홍보사는 지금의 흥무산(興霧山) 산줄기에 있었고, 배방사는 본 면의 봉대산(鳳臺山) 산줄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방사의 내력은 옛 이름이 노곡(蘆谷)인데 와룡산에 있고, 고려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절에서 우거(寓居)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노곡사의 창건 연대를 살펴보면 신라 경덕왕 22년인 서기 763년이 되므로 정동면의 불교문화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들어온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1700년대를 전후하여 기록된 향지(鄕誌)에 의할 것 같으면 귀룡사, 배방사는 아직 존재하고 있으되 적선사·홍무사의 두 절은 석유금무(昔有今無)라 하였으니 이미 1700년대 이전에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개흥사(開興寺)를 비롯한 도성암(道成庵)·수도암(修道庵)·정수암(淨水庵) 등의 사암이 새로이 기록에 보이는데, 이 중에 도성암이 수청리 뒤 이구산(尼丘山)에 있었다. 그런데 1800년대 초엽에 나온 읍지(邑誌) 불우조(佛宇條)를 보면 사천의 사암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돼 있다. 왜 그랬을까? 이는 필시 억불정책(抑佛政策)의 영향으로 그 은성(殷盛)했던 사천의 불교문화는 쇠퇴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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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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