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5. 수청리(洙淸里)   정동면(正東面)의 최고봉인 흥무산(興霧山)을 주봉으로 많은 산들이 줄기를 이루며 서향으로 뻗어 나갔다. 그 어떤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힘찬 산파도를 이루며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키를 재며 이어져 나갔다. 그러다가 사천읍을 바라보며 멈춰 선 산, 이름하여 이구산(尼丘山)이다.   수청리는 병풍처럼 동서로 길다랗게 뻗은 이구산 주능선(主稜線)의 북향비탈 아래 사천강(泗川江)가를 따라 자리잡은 마을들로 이루어진 법정이동이다. 수청리를 구성하는 부락들은 동으로부터 웃땀(上村, 聖人洞), 가운데땀(中村, 獨釣洞), 아래땀(下村, 竹潭洞)의 3개 부락이 연달아 사천강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수청리도 역시 조선조 때 사천군 상주내면(上州內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청동(洙淸洞)을 수청리(里)라 하였다. 수청리란 이명(里名)은 산출이구(山出尼丘)하고 수류사천(水流泗川)이라 하여 마을 앞을 흐르는 사수(泗水, 또는 洙水)와 산의 풍광(風光)이 명미(明媚)하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자수려(山紫秀麗)한 이구산의 북쪽으로 길다리게 펼쳐진 산기슭에 자리한 수청리. 그 아래로 역시 고성 무량산(無量山)에서 시원(始源)한 물줄기가 삶의 젖줄되어 면의 중앙부를 관류(貫流)하고 중류인 노천(魯川)에서 굽이돌아 수청마을을 감싸 흐른다. 활자형(弓子形) 강둑에는 울창한 풍치림(風致林)이 마을을 가리어 사시장춘(四時長春) 아늑하다 못하여 한폭의 산수화처럼 느껴진다.   사천읍에서 동쪽으로 십리거리에 위치한 수청리는 풍정리의 아파트촌을 조금 지나서 남향으로 수청교(洙淸橋 : 길이 50m)를 건너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 열린다. 동으로는 이구산의 여러 골짜기들 사이로 장산리(獐山里)와 경계하고 북으로는 면 소재지인 대곡리의 신기(新基)부락과 마주한다. 남으로는 이구산의 주능선을 경계로 사남면의 화전리(花田里)와 인접하고, 서북으로는 예수리, 고읍리가 사천강가에 인접해 있다.   또한 수청리는 구 사천군 최우수 마을로 일찍이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마을 진입로는 물론 안길 등이 완전 재포장되어 있으며, 대통령의 훈표창(勳表彰)을 비롯하여 82년도에는 취락구조 개선사업, 돌담개량사업 등 경상남도의 외국인 홍보마을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감 과원(果園)이 산자락에 잘 조성되어 본 면에서 소득이 제일 높은 마을이다.

  • 부락명의 유래   수청리를 구성하는 마을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자락의 동쪽에서 서향으로 웃땀, 가운데땀, 아래땀의 3개 순으로 이구산의 북향 비탈아래 연달아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그 취락의 형태상 위치에 따라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본래는 신동(新洞), 독조동(獨釣洞.獨智洞), 죽담동(竹潭洞.대밭땀) 등의 지명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사천읍지>에 의하면, 이구산 밑에는 두 동리(洞里)가 있는데 하나는 성인촌(聖人村.聖子洞이라고도 함), 또 하나는 성재동(聖齋洞)이라고 하였다. 이로보아 지금의 웃땀 지역이 성재동이고 가운데땀인 독조동이 성인촌(성자동)에 해당 지역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리고 죽담동이 지금의 아랫땀(下村)이다.   그러면 지금의 수청(洙淸)이란 땅이름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구전(口傳)이나 마을에 사시는 고로(古老)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하지만 숙종(肅宗) 35년(1699)에 펴낸 <사천현 여지승람>에 의하면 오늘날 수청(洙淸)이란 지명이 뚜렷하게 기록돼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로보아 본래는 성재동, 성인촌으로 나누어 부르다가 조선 중기 이후부터 수청(水淸)이란 음운이 수청(洙淸)으로 훈차(訓借)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고장 산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구산(尼丘山)과 사수(泗水.泗川江)이다. 옛날부터 ‘산이 있으니 이구산이요, 물이 있으니 사수라’고 하였다. 물론 연장 26km에 달하는 하천인 사천강이지만 여기에서의 사수는 이구산 밑을 흐르는 강을 말한다. 그래서 사수를 말할 때 수석형철(水石瀅澈)하고 감인모발(鑑人毛髮)하다는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수청이란 지명은 거울(鏡)처럼 사람의 머리카락도 물에 비칠 만큼 맑디 맑은(水澄) 사수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왜 ‘泗淸’이라 하지않고 ‘洙淸’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洙>와 <泗>는 동의어로 본 데서 비롯된다.   예컨대 사천 지역의 여러 지명 가운데 사수강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에 있는 면을 사남면(泗南面), 수남면(洙南面 : 옛 삼천포 지역)이라 하였고, 강북에 있는 마을을 수북동(洙北洞 : 현 풍정리의 일부 지역)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한편, 지금도 성지골이라 부르는 성재동(聖齋洞)은 수청마을 동남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옛날에 첨추공(僉樞公) 최두남(崔斗南)의 숙부인(淑夫人) 진주정씨(晋州鄭氏)가 이 골짜기 중턱에 단(壇)을 쌓고 성심기도(誠心祈禱)하여 연생(連生) 6남하였다는 고사(古事)가 전한다. 그 단아래 영천(靈泉)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린다.      • 부락의 연원(淵源)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구산을 배경으로 태고(太古)적 신비(神秘)를 간직해온 이 아늑한 사수가에 그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이 수청 부락도 여느 마을과 같이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年代)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부락 남서쪽에 위치한 공동묘지로 가는 고개턱에 이르면 동쪽 비탈진 숲속에 커다란 고인돌(支石墓)이 눈에 띄인다. 이 외에도 사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가나 구릉진 곳에는 수많은 무덤 유적이 산견(散見)된다. 이는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묘제(墓制)이고 보면 아득히 먼 상고(上古) 때부터 사람이 이곳에 살았다는 흔적이자 연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부락의 연원을 말할 때 대다수의 마을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전해오는 기록문서나 참고될만한 문헌이 없어 확실한 내력(來歷)을 알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그래서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아온 집안의 가보(家寶)나 묘석(墓石), 그리고 고로(古老)들의 구전 등으로 추정해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봉친피적(奉親避賊)타가 피로(被擄)되어 왜채(倭寨 : 현 船津里城)로 끌려 갔을 때에 탈검살왜(奪劍殺倭)하고 이귀(而歸)하여 출천지효(出天之孝)로서 이름난 첨추공(僉樞公) 최두남(崔斗南)의 손자 영(永)이란 분이 약 320년전 이곳에 시거(始居)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부락의 주종(主宗) 성씨인 삭녕최씨(朔寧崔氏) 문중의 입향조의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만 현재의 삭녕최씨 입향조(入鄕祖)가 부락을 연 후, 토지를 개척하고 최씨 동성(同姓)마을을 형성해 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유는 고려말 왜구(倭寇)의 침범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산성(山城)의 유구가 이구산 정상에 남아 있고 고려시대의 인물로 이 고장 출신인 찬성공(贊成公) 목인길(睦仁吉 : 泗川睦氏 贊成公派祖)의 묘소가 수청부락 뒷산에 있기 때문이다.   기록상으로 입향 순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삭녕최씨에 이어서 김해김씨(金海金氏), 합천이씨(陜川李氏), 진주강씨(晋州姜氏), 진주하씨(晉州河氏), 칠원제씨(漆原諸氏), 김녕김씨(金寧金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경주김씨(慶州金氏) 등의 성바지들이 입주하여 촌락을 이루어 내려왔다. 현재 서짓골(書齋谷)이라 일컬어온 가운데땀(독조동)에는 삭녕최씨의 후손들이 세운 이산재(尼山齋)가 있어 해마다 누대(累代)를 향사(享祀)하고 있다.

  • 새마을 훈.표창(勳).(表彰) 마을   마을 뒤로 높은 이구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짙은 물감을 짓이겨 푼 듯한 검푸른 송림과 하늘, 그 산자락에 자리잡은 수청마을. 아늑한 마을 앞을 지나는 강가에는 형형색색의 풍치림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골마을이다.   숙명적인 빈곤과 인습에 벗어나 밝고 푸른 마을이 된 산골마을. 오랜 세월 가난에 찌들었던 마을이 가난을 물리치고 풍요로운 행복을 가꾸게 되기까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숱한 사연과 마을 선구자(先驅者)들의 개척정신 그리고 뜻있는 마을 유지와 젊은 지도자들의 숨은 공이 깃들여 있다.   정동면 여느 마을에 비해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이 마을에서 위의 유지와 지도자들의 사명은 그 무엇보다 큰 것이었다. 이들 유지 및 지도자와 주민 자신들이 얼마만큼 성실한 자세로 자기 능력과 기능을 발휘하고 창의력(創意力)과 개척의 정신을 강한 성취동기(成就動機)로 발휘하느냐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수청마을은 인근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산자락이나 강변에 일굴어 놓은 농토에서 오로지 미맥(米麥)만을 위주로 하는 전통영농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입지조건상 사천강이 마을 앞을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대수(大水)가 지며는 때대로 침수피해를 입어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와 같은 환경의 악순환에서 탈피하고 잘 사는 마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민 스스로가 협동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주민계도가 앞서야 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자조자립(自助自立)의 기풍을 간직하게 되었고, 마을 앞의 하천둑을 높게 쌓아 거기의 저습지를 문전옥답(門前沃畓)으로 만드는 한편 산지를 개발하여 과원을 일구어 놓은 것이 그것이다. 수청마을은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의 하나의 정책으로 펼쳐지기 이전부터 그와 비슷한 성격의 잘살기 위한 주민 자발의 운동이 일찍부터 일어났슴은 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수청부락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요람(搖籃)’이라고 곧잘 주장한다. 그것은 말로서 뿐 아니라 실지로 마을에 들어와 보면 확연하게 느껴진다. 수청리가 새마을운동이 제창되기 전부터 소득사업 및 안길 넓히기 등의 사업을 추진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면의 시초는 위에서 말한 다음 선구자들의 개척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최씨문중(崔氏門中)의 문장(門丈)이며 사천문묘 당장(泗川文廟 堂長)을 역임한 춘포(春圃) 최인병(崔寅炳 : 字 士文)은 한학자로서 이미 작고(作故)하였지만 인본.도의 교육(人本 道義 敎育)에 힘써 예절 바른 마을이 되게 하는데 공헌이 큰 분이며, 또 일찍이 진주농업학교(晉州農業學校)에 들어가 졸업을 앞두고 3.1운동 당시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퇴학당하고 해방 후 정동면장을 지내면서 지역사회에 헌신한 실포(實圃) 최인호(崔寅浩 : <나의 길> 저자)와 독농가(篤農家) 최원경(崔源卿)이란 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분 다 이미 작고하셨지만 일찍이 1930년대에 근대농업의 선구적 위치에 있었던 분들이다.   특히 최원경은 자신이 앞장서 이 마을 뒷산 일대에 산지를 개발, 과수단지를 조성하는데 효시(嚆矢)가 되었다. 오늘날 복숭아, 밤, 단감 등 사천시 관내에서 과원의 고소득 선진지로 정동면이 으뜸으로 손꼽히게 된 시발(始發)은 이분들의 계도와 개척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1950년대에는 돼지(버크샤 Berkshire)를 농가 부업으로 다량 사육하여 농가 소득을 높혔으며, 특히 우리나라 장려 품종으로서 전국적으로 많이 보급(普及)되었다.   이와함께 마을 주민들이 이룩한 과수재배로 일찍부터 부촌(富村)의 꿈이 어느정도 실현하게 됨에 따라 주민들은 자연히 생활환경 개선도 남달리 자발적으로 서둘렀다. 그리하여 1969년 무렵에는 마을의 모습이 깔끔하게 정비돼 전국시범마을로서의 대통령상(大統領賞 : 당시 마을 지도자 金河坤)까지 수상한 훈.표창(勳.表彰)마을이 되었다.   그 후로 수청마을은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전국각지에서 새마을 지도자들의 견학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성과는 그동안 온 부락민이 한마음이 되어 역대 이장(里長)과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열성적인 지도로 이룩한 결과이며 오늘날 쉬지않고 열심히 땀흘리고 있다.   이 마을이 전국 시범마을로 교육장이 되기 까지는 주민들의 호응도 대단했지만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김하곤(金河坤)씨의 열성과 희생적인 노력이 담겼슴은 말할나위도 없으며, 새마을 성공사례를 전국 시.군 순회발표회를 가졌던 것은 새마을운동의 횃불이라 할 것이다.      • 서짓골(서재골, 書齋谷)   현 수청마을 가운데땀(獨釣洞)에 서재서당(書齋書堂)이 있었다. 그래서 서짓골이라 일컬어 왔는데 고로(古老)들의 말을 빌리면 못을 만들 때 기왓장과 인골(人骨) 그리고 꼭지에 ‘천전(天田)’이라 새겨진 헌겊이 나왔다고 한다. 서재란 옛날에 책을 갖추어 두고 글을 읽고 쓰며 공부하는 방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서당(書堂) 또는 글방이라고 하였다.   서당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널리 보급되었던 재향사족(在鄕士族)의 서재서당이 있었고, 여기서 말하는 서당은 조선후기 이래 전국 각 촌락에 널리 보급된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공동체적인 한문촌숙(漢文村塾)을 말한다. 옛날의 교육이 다 그렇했듯이 서당은 양반 자제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문자교육이나 예의범절(禮儀凡節) 교육은 물론 향촌(鄕村)의 향풍(鄕風)을 바로잡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에 수청마을에는 서재서당이 없어진 후 조선 후기에 보급된 서당이 또한 있었다. 서당의 설립은 기본자산이나 인가(認可)를 요하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나 뜻있는 사람이면 훈장(訓長) 한 사람과 방(房) 한 칸으로써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었다. 참고로 서당설립의 종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나뉘어 운영되었다.      (1) 훈장자영(訓長自營) 서당은 훈장 자신이 자기의 생계 혹은 교육 취미로 세운 서당이다.   (2) 유지독영(有志獨營) 서당은 마을에 가세가 넉넉한 이가 자기 집의 자제 및 그 친척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훈장의 급비(給費)를 단독으로 부담하고 세운 서당이다. 때로는 이웃집의 자제에게도 무료로 수업케 했는데 이 혜택이 아름아닌 <동냥공부>이다.   (3) 유지합동(有志合同) 서당은 마을의 유지 몇 사람이 합동으로 훈장을 초빙하고 교실을 마련하여 그들 자제에게만 교육시킨 서당이다. 물론 훈장의 의, 식, 주 및 경비는 그들 유지들이 부담했다.   (4) 촌락합동(村落合同) 서당은 마을 전체가 마련하여 훈장을 두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친 서당이다.      이상에서 보듯 촌락합동 서당은 집성촌(集姓村)의 동성(同姓) 마을에 흔했던 서당으로 수청 서당이 이에(촌락합동서당) 속했다.   서당의 학생은 7~8세부터 15~6세의 아동들이 그 중심이 되었으며, 교육의 내용은 한문읽기(講讀), 글짓기(製述), 쓰기(習字)의 3교과를 중심으로 교수하는데 이곳 수청리 서당에는 경서(經書)에 통달한 훈장이 있어 글을 배우려면 ‘수청 밭둑 밑에 가서 배워라’ 할 정도로 인근 마을의 아동들까지도 많이 와서 글을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수청리 서당에서 수학한 사람들 중에서는 학문과 덕행이 깊고 높은 분들이 많았었다.   서당에서 처음 배우는 교과 가운데 천자문(千字文)은 한문글자 1천자 들어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4글자씩 짝을 지은 사언시(四言詩)가 250구(句)가 이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문글자 1천자로 250구의 시를 짓는데 하도 애를 쓴 나머지 머리가 희어졌다고 해서 천자문을 일명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한문 1천자로 시를 지을 수만 있다면 모두가 천자문이 되는 것이다.   또 서당의 한 구성인으로 접장(接長)이 있었다. <접>이란 원래 <무리(衆)>라는 뜻을 지녔지만, 서당에서는 동급의 학도를 지칭한다. 고려시대의 12도(徒)인 徒에서 접장제도가 발달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接은 단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접이 큰 서당에는 훈장 한 사람으로 학생들을 일일이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훈장은 연령이 높고 학력이 우수한 학생을 接의 長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학생회장 구실을 하는 서당의 상급생을 일러 접장이라 했다.   오늘날 생존해 계시는 마을의 古老들에 의하면 지금부터 60여년전에 서당글을 배웠다고 하며 신학문(新學問)이 들어오고 사천읍에 사천공립보통학교(泗川公立普通學校 : 1911년 설립)가 개교된 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하다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청리의 서당은 동성 마을인 까닭에 자제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는 데에 그 교육적 의의(意義)가 있으며, 여느 마을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았던 마을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집집마다 서책(書冊)이 많아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즉 한말 때 유학자(儒學者)로 1919년 3.1운동 때 파리장서(巴里長書)로 유명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선생의 처향(妻鄕)이 수청리라 하였다. 어느날 처가에 들였다가 서책(書冊)이 많은 것을 보고 이를 자기집으로 빌려가려고 간청을 하여 승낙을 받은 후, 하인(下人)을 시켜 지게에 싣고 곤양(昆陽)땅 가는고개(細谷)를 넘어가는데 고개를 넘기 전에 모두 읽고난 후라서 더 이상 필요치않다 하여 중도에서 되돌려 보냈다는 일화(逸話)가 전한다.      • 이구산(尼丘山)   면의 남쪽 하늘을 병풍처럼 드리운 산등성이가 동서로 쭉 뻗어 자리잡은 수청(洙淸)마을의 배경이 되는 산. 해발 360m의 우람한 산이다.   아직도 인적을 모르는 듯, 태고(太古)의 일월(日月)을 벗하여 그대로의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한 우리의 수려한 명산, 이구산. 비록 천년의 비경(秘境)을 간직한 태산준령(泰山峻嶺), 장엄한 영산(靈山)이 아닐지라도, 조상의 뼈가 묻혀 있고 어릴 때의 꿈과 낭만이 깃들어 있기에 더욱 정겨움을 느낀다.   군봉기수(羣峰奇秀)한 가운데 산출이구(山出尼丘)하고 수류사천(水流泗川)이라 했던가. 요산요수(樂山樂水)란 산을 즐기고 물을 즐김이라. 곧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즐김을 일컫는 말이다.   산에 오르면 가파른 산등성이와 골짜기마다의 소담하고 아늑한 숲속. 대낮에도 햇빛을 가릴만큼 우람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사이로 이름모를 야생화(野生花)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반기고 있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돌이끼 옷을 입은 바위에 걸터 앉아 물빛 고운 사수(泗水)를 바라보며 청아(淸雅)한 산새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구산을 우러러보니 옛 성인의 자취가 생각나고 사수강 물가에 다다라 참다운 근원을 느끼노라’고 읊은 옛 선인(先人)들의 음풍영월(吟風咏月-맑은 바람을 읊조리고 밝은 달을 보며 詩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며 자연을 즐김)하는 풍류(風流)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가파른 산등을 따라 정상(頂上)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동으로는 소곡리의 여러 마을들이 굽이쳐 흐르니 냇가나 산자락에 자리잡았고, 골안 들녘을 지나 하늘 아래에는 봉대산의 산준령이 시야에 다가오는데, 믿음직한 맏형처럼 주위의 산등성이마다 봉긋 솟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으로 향하니 사남면의 들녘이 넓다랗게 펼쳐져 있고, 들을 지나 바닷가엔 임진년의 국난극복(國難克服)의 처절한 싸움터의 함성(喊聲)이 햇빛에 바랜 채 역사의 향기가 넘실거리는 푸른 물굽이와 선진리성(船津里城) 숲속의 해전승첩비(海戰勝捷碑)가 하늘을 찌를 듯 하얗게 빛을 내고 있다.   남으로는 와룡산(臥龍山)의 산줄기가 북향으로 달려와 물결처럼 흐르다가 갑작스리 멈춰 선 듯한 구룡산(九龍山)이 눈 앞에 다가와 서 있고, 산기슭 아래 구룡 저수지(九龍貯水池)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맑고 아름다운 거울면 같은 물 위에는 양쪽 산기슭의 푸른 송림(松林)이 거꾸로 비쳐 일렁이고 있다.   북으로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아름답고 한적(閑寂)한 대곡리와 풍정리의 마을들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 국도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동으로 서로 달리고 있으며, 드넓게 서쪽으로 펼쳐진 들녘에는 한낮의 강렬한 햇살을 받은 벼들이 영글어 한자락 바람이 지날때마다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앞뒤가 산으로 둘어싸여 주위가 아늑하고 평화로우며 공기가 맑고 깨끗하여 그윽한 전원(田園)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장. 태초에 생겨난 그대로의 아름다운 산과 골안의 들녘 그리고 시대들, 정말 때묻지 않은 그림 같은 풍경이다. 이름하여 이구산, 글자 그대로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공부자(孔夫子)가 나신 성역(聖域)에서 따온 산 이름이다.   이구(尼丘)란 산 이름은 본래 공자의 자호(字號 : 이름은 丘, 字는 仲丘)로서 산동성의 곡부현(曲阜縣) 동남에 있는 산으로 공자가 탄생한 곳이며 이를 이산(尼山)이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산동성의 추현(鄒縣)은 공자의 도(道)를 이은 맹자(孟子)가 나신 곳으로 이 두지역은 성인이 태어난 신령(神靈)한 성역이라 하여 옛날부터 우리나라 유학자(儒學者)들의 존앙(尊仰)의 대상이 되어 온 곳이기도 한다.   따라서 산동성의 성역에는 두 갈래의 강이 흐르는데, 하나는 수수(洙水), 또 하나는 사수(泗水)라 하였다. 두 성인이 수수나 사수가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설교하였다는 연유에서 이를 수사지학(洙泗之學) 곧 공맹학(孔孟學 : 儒學)을 뜻하기도 한다. 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창 풍미(風靡)할 때 산수의 유래가 성역과 닮은 우리 사천을 동방의 명지(名地)로서 심지어는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까지 일컬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따온 것이 이구산이요, 사수강인 셈이다.   그렇다고 중국의 곡부나 추현은 산수가 좋아서 이름난 고장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공자나 맹자 같은 성현(聖賢)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2천년의 긴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곡부나 추현의 성역을 찾음은 경치를 보려함이 아니라, 공맹(孔孟)의 덕(德)을 우러러 사모함에서일 것이다.

  • 이구산의 기우제(祈雨祭)   이구산에 오르면 옛날부터 기우제(祈雨祭)를 모시던 제단과 고려말 왜구에 대비키 위해 쌓았다는 산성(山城)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기우제란 농경의례(農耕儀禮)의 하나로써 날이 가물 때에 비 내리기를 비는 제사를 말한다.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는 농경생산의 풍요를 결정짓는다고 믿는 초자연적인 존재 즉 농신(農神)을 신앙하고 있으며, 농경의례의 과정과 내용에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설, 가배, 유수, 선농(先農), 중농(中農), 후농(後農), 풍백, 운사 등의 정기적인 의례와 기우, 앞구, 벽기 등의 부정기적 의례가 행해져 왔다고 전해진다.   옛날부터 사람의 힘으로 이루지 못하면 신(神)에 의존하였고 그것을 운수라고 했다. 그래서 전해온 것 중에 하나가 기우제이다. 이러한 기우제도 천신(天神), 지신(地神), 사직신(社稷神), 명산대천신(名山大川神), 서낭신(城隍神), 용신(龍神)이 그의 제신(祭神) 대상이 되는 것이다.   비는 우리 인간생활에 절대로 없으면 안될 자연의 섭리(攝理)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 농경사회에서 농사철에 가뭄이 계속되어 씨 뿌리기와 모내기 그리고 농작물이 타 곤경에 처하게 되면 어김없이 비 내리기를 비는 의식이 기우제이다. 오랜 가뭄이 계속되면 백성들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도 사직단(社稷壇 :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제단)에 기우제를 올리고 각 고을에서도 사직당이 있어 그 지방에 알맞은 날짜를 정하여 관아(官衙)에서 주관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우리 정동(正東)이라고 다를바 없었슴은 물론이다. 이처럼 관의 기우제가 아무런 효력이 없으면 민간에서도 행해진 것이 기우제이다.   이구산은 옛날부터 영험(靈驗)한 영산이라 하여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들 염려가 있을 때는 생기복덕(生氣福德)이 있는 면장(面長)이나 동리의 원로(元老)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는 산이다. 이구산의 기우제는 1960년대 후반까지도 가뭄이 극심한 해에 지낸 바 있다. 정확한 연월일은 기억되지 않으나 강시 최홍민(崔泓敏) 면장이 제관(製罐)으로 추대되어 여러 사람들의 호위로 이구산 중턱(수청리 지싯골 뒷산)에 올라 제단에 향을 피우고 축문(祝文)을 읽으며 제를 지냈다. 이와 함께 면민들은 공동체의식으로 집집마다 새끼줄로 된 금줄을 대문에 다 걸어놓고 문밖에는 붉은 황토를 점점이 깔아 놓는 한편 길쭉한 병에다 물을 넣어 마개대신 솔잎을 기워 거꾸로 매달아 놓고 지성으로 비 내리기를 기원하였다.      ○ 바랑고개 <고개> : 수청 서쪽에 있는 고개. 바랑이란 배낭의 변한 말로써, 중들이 길 갈 때 등에 지는 큰 주머니인 바랑과 같은 형국이라 함. 이곳에는 고려말 우왕(禑王) 때 사천 출신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목인길(睦仁吉)이란 분의 묘소가 있는데 이를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이라고 하였다.   ○ 상사바우 <바위> : 수청 동남쪽 골짜기 안에 있는 바위. 바위가 기둥 위에 얹혀서 지붕 같이 나와 있고 밑은 절벽인데, 상사란 처녀총각이 정사(情死)했다고 전함. 옆에는 기우제단(祈雨祭壇)과 맑은 샘물이 있는데 그 물로 머리를 감고 소원성취를 빌었다고 한다.   ○ 베락바구 <바위> : 수청 남쪽에 있는 바위.   ○ 부 엉 덤 <너덜> : 수청 동쪽에 있는 바위.   ○ 새 터 <마을> : 수청 남쪽에 새로 된 마을.   ○ 이세미골 <골> : 수청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작답(作畓)들 <들> : 수청 앞에 있는 들. 강둑을 멀리 돌리고 만들었다 함.   ○ 공동묘지 <묘지> : 수청 남쪽 고개너머 서낭당산 동쪽 비탈에 있는 묘지로 1939년 5월에 설치함.   ○ 새 장 터 : 서낭당 수청쪽의 지룡(支龍) 끝에 위치한 옛날 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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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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