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동

우리동이야기

마을명칭유래

백천동

백천재
백천골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진보와 사보
옛날 남양은 진주관할 남면 말문리였다. 뚝을 쌓아 도랑을 내었는데 남양 배천 쪽으로 흐르는 도랑을 진보라 하고, 용현 덕곡쪽으로 흐르는 도랑을 사천땅에 뚝을 쌓았다 하여 사보라 했다.
해오개(해오름 고개)
아침해가 이 고개에서 먼저 떠오른다고 해서 해오개라고 부른다 함
노루고개(노리고개, 장티고개)
지형이 노루의 형국, 노루가 많은 고개, 옛날 백운암의 중들이 올라와 쉬어 갔다고 해서 노리고개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백천골
백천동 일대의 깊은 골을 총칭하여 부르던 옛이름
공알바우
노리고개에 위만 뽀족하게 보이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동네 사람들을 문란케하고 부녀자들이 바람을 피우게 한다고 하여 이를 막는다고 배천 사람들이 흙을 져다 붓고 잔디를 입혀 바위를 숨겼다 한다. 1960년 초반까지 있었던 풍속이라 한다.
주산등
심적암에 조실이 주석하면서 붙혀진 이름(1830년대에 용담선사의 스승, 이신영월 홍제선사가 주석하였다한다.)
빈대절터
시주 구하러 출타했던 이 절의 스님이 돌아와서 법당 문을 열어보니 방 가운데 전에 없던 기둥이 하나 있었는지라 만져보니 빈대가 층을 이루고 포개져 있었다 한다. 빈대를 죽이고자 엉겁결에 불을 지르고 절을 떠났다 한다.
도솔암터
도솔골 끝에서동쪽 상봉 아래 평평한 산허리에 축대와 대숲이 있다. 옹기와 기와장 등이 보인다. 이 절터를 일러 도실방터라고 부르는데 방장 스님이 계셨던 곳이라고 한다. 부도탑들이 즐비하고, 채전밭엔 억새가 무성하다. 이 능선을 "도실채련밭"이라고 한다.
마혼담(귀신뚬벙)
전설에 진주의 한 처녀가 이곳으로 출가 입산한 사모하는 사람을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돌아가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이곳에 빠져죽었다. 한다. 이 여인의 원귀가 이곳을 지나는 신혼길 처녀들을 홀려 물에 빠져죽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고성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멀리 돌아가곤 했다. 옛 백천사에서 산중회의를 하고 재를 올려 영혼을 천도케 하고 나서 아무 일이 없었다 한다. 그 후 이곳을 귀신뚬벙이라고 불렀다.
기와굴
이곳 부근에 옛날 기와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 현재까지 이 재등 부근에 가면 당시의 기와굴을 인정하는 많은 기와조각들이 있다.
재등
기와굴이 있던 등성이 일대를 재등이라 부른다.
은밀폭포
백천동 백운마을 백천사 우측 주산등 너드렁밭을 지나 심적골 계곡 상부에 주위의 너드렁밭을 세굽을 거쳐 있으며 입구가 크고 높은 바위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아 옛 부터 존재했으나 수백년간 사람들에 발견되지 않았고 최근 1994년에 사천시 클라이밍 동호회 김봉호 회장에 의해 발견 되었다고 한다. 남방의 산야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빙벽을 형성하며 서쪽을 향하고 있어 냉기는 밀양의 얼음골을 연상케 한다. 주위를사람이 지나도 앞에서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은밀폭포라하며 겨울에 30m 내외의 완경사 빙벽에 직각경사 15m 폭4m의 빙벽이 형성된다. (전. 남양동 이인구 계장 제보)
희내(白川 : 흰내)
백천은 상류에서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온통 흰돌로 이루어져 내 전체가 하얗게 보이고,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하여 백천이라 하였다. 와룡산 상봉은 기후적으로 갑자기 폭우가 내리는 지형인데, 개울이 가파르고 물살이 급하여 개울에 이끼 낄 틈이 없이 항상 깨끗한 돌개천이다. 어떤 얘기로는, 백천골 안의 암자와 동리에서 쌀 씻는 물이 하얗게 흘러내렸고, 임진왜란 때는 이 쌀물을 이용해 백천골 입구에 주둔한 왜병들에게 승군이 많음을 보여주고자 전술적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문바위
백천 저수지가 생기기 전 입구의 큰바위. 바위 중간 지점에 구멍이있었고, 돌을 던져서 들어가면 재수가 있다고하여 돌을 던지기도 했다.
독새얍답
얍답(얍닿)은 야트막 하게 하늘과 땅을 이어 준다는 의미로 비탈진 땅을 말함
두리새미
두레샘터=공동우물
백운
백천골 어디에 백운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
삼서자(삼정자)터
삼은 우리만족이 좋아 여긴 길수이다. 세 그루의 좋은 나무를 심어 신성시 하고 다신교에 바탕하여 마을 동쪽에 해 뜨고 물 근원지인 곳에 성황나무 겸 쉼터나무가 있던 곳
절바우
상주가 절하는 형국이라고 함
애기발때죽거리
바위 앉은 자리에 작은 발자국이 찍혀있음
약물고랑
칠월 칠석과 백중날에 물을 맞으면 피부병이 나았다 함
용굴
용이 살았다고 하는 대밭 속의 작은 굴
새주막거리
1910년경 국도 3호선 도로가 생기면서주문나루와 사천, 진주, 고성을 이어주던 옛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양조장이 생기고 주변에 두 세 주막집이 있었다.

신벽동

모사이
지산
벽골
벽동
새터
신촌
양달땀
신촌의 신백천 건너 송법산 아래 있는 부락을 말함
성지골, 성지골 너드랑
남평문씨 가문이 난리 때마다 재물을 숨기고 피신하던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치를찾지 못함. 굴을 찾으면 일평생, 일하지 않고 먹고 지낼 재물이 있다는 옛말이 있음
깐치머리
벽동 마을 앞 까치머리 같은 작은 동산
다래먼당
약간 평평한 먼당이 마치 하늘로 달아 올린듯이 보인다고 하여 다래먼당이라 불렀다.
양정기들(梅花落地들, 밭들, 버들들)
들 가운데에 5개의 바위가 있고, 그 바위 가운데 큰 버드나무와 정자가 있었다고 함, 그 모양이 마치 매화 꽃잎이 땅에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함
난고개, 송법산
왜란 때 격전지, 난리를 치루었다고 난고개라 함
칼바우
1959년 태풍 사라호 때 곧게 서있던 바위가 부러져 현재는 그 아래 부분만 남아 있음
고인돌(꽃나무거리)
신벽동 지석묘(도 지정 기념물 제 39호)는 일곱기가 북두칠성 형태로 놓여있다. 남방식 지석묘로 일제 때 모두 도굴되었다. 칠성바우는 고인돌 일곱개를 일컫고, 꽃나무거리는 주변에 백일홍이 많아서 불리는 이름

노룡동

효자동
미룡의 옛지명
깨꼴등(꾀꼬리등), 아래 난고개
이 산 위에 있던 어느 가문의 묘를 옮기고자 묘를 파는데, 관을 여는 순간 하얀 꾀꼬리 한 마리가 남쪽으로 날아 갔다고 함. 지관이 이를 보고 몹시 아쉬워 했다고 한다.
정니 천륭
마을 안녕을 지키는 당산 나무
석곤이 뜸붕터
일제 때 창선에서 이사 온 김석곤이라는 사람이 진굼텅을 간척하고 물을 대기 위해 판 샘
진굼텅(정굼텅)
옛 수군 진지가 있었다며 붙여진 이름
한샘이
물이 좋아 겨울에도 얼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고사를 지낼 때면 새벽에 이 물을 떠다가 머리도 감고 정한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복진개
광포 옹기굴 불빛의 액을 막기 위해 미룡 앞 해변가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던 곳

대포동

지픈개
심포, 신풍
새동네
1980년 대례 당산나무를 쓰러뜨린 거센 회오리 바람으로인근 주택들이 파괴돈 곳에 융자와 정부의 보조로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동네이다.
개새미
비가많이 오거나 가물어도샘이 일정하게솟고, 겨울에는 물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다. 물맛이 좋아 약물이라고도 한다. 개샘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1) 물이 좋기로 이름 나서 문둥이가 이 물로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고 소문이 나서 각지의 문둥이들이 몰려와 샘물을 더럽히게 되자 문둥이들이 목욕을 못하게 개를 잡아 샘물에 넣었다 하여 "개샘"이라고 부른다는 설, (2) 개샘이의 아랫골 논을 "개샘이 골"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바다가 이 샘까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 지픈개에 있는 샘의 의미로 "개샘"이라고 하는 설, (3)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마치 게가 물을 품는 모양과 비슷하여 "게샘"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개샘"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는 설이 있다.
왜꼴
임진왜란 후 귀화한 일본인 10여 가구가 거주하면서 붙여진 이름
몰밑등(멀미등)
동네사람들은 대게 "멀미등"이라고 부른다.
유한들
동네 사람들은 대게 "이한들"이라고 부른다. 옛날, 유환이라는 사람이 주문리 망갈들에풀베러 갔을 때, 넓고 좋은 돌이 있어서 풀짐 속에 지고 와서 지픈개와 미용개의 경계지점(미룡소류지 아래)에다리를 놓으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초분터
지푸라기 무덤.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완전히 탈육 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으로 덮은 임시 무덤이 있던 곳
진치개(모자랑개, 모치강)
진(陳)이 있었던 곳. 모자랑개를 모지랑개, 모치강으로도 불렀다는데,'모치'라는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서 모치강이라고도 했다. '모지랑 빗자루'로 통하는 도깨비가 나타나는 곳이라서 모지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감나무 집
이 집에서 밤에 방문만 열면 광포의 옹기굴에서 지피는 불빛이 마치 호라이 불 같아서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 불빛이 집에 비치지 않게 집 앞에 감나무와 시누대를 심어 불빛을 막는 울타리로 삼았다. 후에 감나무 집으로 부리게 되었다.
하니 당산(천륭)터
1980년 7월의 큰 태풍 때 이곳에 있던 600~700년 된 큰 나무가 뽑혔다고 한다. 이 나무는 영험이 있는 나무라서 어는 자식이 없는 부인이 치성을 드리는데, 천륭 귀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동네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니 마을 뒤로 옮겨달라"고 하는 꿈을 꾼 후 그 부탁대로 나무를 옮기고 자식도 얻었다고 하는 옛 이야기가 있다.

송포동

앞산
남양, 용현 사람들이 각산을 앞산이라고 부른다. 높은 무제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영복원
나병환자들이 살고 있는 집단촌이다.
광포
너른개, 아랫개
송천
솔내
중촌
사촌과 중촌의 중간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
사촌
숙종 15년 고성에 의검부 본청을 두고, 지금 사촌 마을 회관 자리에 지부를 두었다. 또한 서당이 있었다. 일제 초기 남양면의 첫 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돌천내
임내에서 송포동으로 흐르는 내이다. 제방을 정비하기 전에는 큰물이 질 때마다 개울주변이 돌천지가 되었다고 한다.
나무접시 샘
물을 떠먹는 그릇이 자주 깨져서 나무로만든 그릇을 놓아 두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몰구부리(말구부리)
옛날 말타고 장가가던 총각이 처녀 귀신에 의해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이후 장가가는 사람은말에서내려 걸어 갔다고 한다.
낭창골
옛날 낭창이란 남자의 기도처로 전해진다.
광포양달
남양면에서 서쪽으로 바다쪽에 돌출된 부분이 아침에 해가 일찍뜨며 하루종일 태양을 볼 수 있음
광포음달
새리등과 주산등쪽이 높아 해뜨는 시간이 늦음

죽림동

장지골
구 한말, 풍수지리를 잘 아는 어떤 사라밍 터를 잡은 후, 또 함안 조씨 양번 집안을 이주케하여 동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때 세도가였던 함안 조씨 집안을 장자가라 했고, 따라서 이 동리를 장자골로 불렀는데 어느새 장지골로 변음 되었다고 한다. 장동이란 이름은 5·16 이후 4H클럽이 동네마다 조직될 때 4H클럽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다. 당시 한자표기는 정하지 않았다.
죽계
대밭골, 옛날엔 죽전과 죽계에 대밭 천지였다고 한다.
정자새미
국도3호선과 지방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국도 3호선 북쪽으로 약 100m 지점. 물맛이 좋고 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마당산
나라에서 관리하던 남해 창선의 말 목장의 말들이 실안 선창으로 들어와서 마당산 밑 문하(文河→文化)역으로 오면 마당산과 마구들에서 머물게 된다. 말을 지키고 관리하던 망루가 있었다 해서 마장산(馬場山)이었다가 마당산으로 부른다는 설과, 마신으로 모신 신당이 있었다고 해서 마당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과못나, 과나골
말을 양성·관리하던 관아와 활터가 있던 곳이라서 "관아"를 이르는 것으로 추측한다.
새선바우(새섬바위, 새선봉)
와룡산 제 1봉이다. 그 동안 민재봉이 최고봉이라고 알려졌지만 국가기관의 실측결과 새섬바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옛날 큰물이 져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새 한 마리 앉을정도의바위 꼭대기만 남았다고 해서 새선 바위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상사바우
봉우리는 천황봉이고 봉우리 동편 절벽이 상사바위이며, 그 옆에 벼락바위가 있다. 상사바위의 전설에는 옛날 사랑하던처녀, 총각이 있었다. 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못하자 총각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그 총각이 뱀이 되어 사랑하는 처녀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이 딱한 사정을보고 어느 스님이 처녀를 데리고 이 바위에 올라가서 염불을 한 후 이르기를, "처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처녀 몸에서 냉큼 떨어져라. 그렇지 않으면 처녀와 함께 바위 아래로 떨어져서 모두 죽게 된다. 그러면 너는 사람을 죽인 죄로 지옥에서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여 뱀을 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이다.
새로골
옛 묘석에 시례곡이라는 이름이 있고, 골 동쪽의 '세보탄(시보탄) 즉 과녁을 의미하는 말과 '진번덕'의 이름에서 진을 의미했다. 군사의 주둔과 훈련이 관련있는 지역으로 본다.
도암재(대암재)
새로골에서 와룡골로 넘어가는 고개. 큰바위 밑 고개여서 대암재인지, 옛날 암자가 많았던 고개라서 도암재인지, 두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배아골
배틀 하나 놓을만한 배아등에서 시작하는 작은 골
모시밭골
모시(募矢)란 화살을 보관하던 곳을 뜻 한다고 함
무지개골
새로골에 무지개가 서면 오른쪽 뿌리는 무치고랑, 왼쪽 뿌리는 배아골에 서 있음을 종종 보았다.
진뻔덕
옛날에 진지가 있었던 곳이여서 진뻔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도실곡
도실곡쪽 임내저수지 뚝에 고롱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나무짐을 기대 놓고 쉬어가기도 하고, 아이들이 소 먹이러 가다가 소를 메어놓고 멱을 감기도 했다. 봄에 보라색 꽃이 피고 가을에 노란 열매가 탐스럽게 열리면 고롱새가 날아와 열매를 따 먹었다. 흔치 않은 나무인데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골매등
천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옛날 한풍수지사가 후한대접과 보수를 기대하고 어느 가문의 조상의 유해를 안장했다. 그러나 기대에 못 미치는 푸대접에 배신감을 느낀 풍수지사가 지나가는 초동들의 입을 빌어 골매이등이라고 하게 했다는 구전이 있다. 골매는 곯아떨어진다, 곪는다는 뜻이다.
새들등
새 풀이 돋는 이른봄의 밤, 임내에서 도실곡으로 가는 새들등 고개에 도깨비불(인불)이 자주 보였고 바람에 날아 가기도 했다. ※새들등 명당설 새들등은 새가 날개를 펼친 형국의 산이다. 구한말 어느 지관이 새들등 고개를 넘어가다가 명당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 작대를 꽂고 지나갔다 한다. 임내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한 머슴이 이 사실을 알고, 곤양에 있던 자기 조상의 묘를 이곳에 몰래 이장했다 한다. 그 후 이 머슴은 부자가되었고, 임내 동네에 초상난 집이 있으면 술을 몇 말씩 제공하기를 여러해 했다고 한다. 그 후 임내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새 날개 한쪽이 잘려 나가게 되어서 새들등의 형국이 사라졌고, 임내 거주하는 여러 가정에 우환과 불구자들이 많이 생겨서 더러는 장짓골 등 인근 동네로 이사를 가는 사람이 늘어 났다고 한다.
노죽골
오래된 대밭이 있었다고 하고, 한편 곡식을 저장하는 노적가리가 있던 곳이라서 붙은 이름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불당골
불당은 불을 지피는 곳. 도자기 가마가 있어서 그 연기와 불을 늘 보던 대밭골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라 한다.
판바우(여시바우)
위는 넓은 바위가 있고 아래는 여러 개의 작은돌이 절벽위에 있어 작은 돌 사이로 사람이 다닐 수 있어 여우들이 다니는 것 같아 넓은 위것은 판바위 아래굴 속의 여러바위는 여시바위이다.

담당자
남양동 총무팀 055-831-5414 / 팩스 : 055-831-6086
최종수정일
2016-07-15 15:57:27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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