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문화재탐방



사남면

우리면이야기

문화재탐방

효자문

사남면 월성리 시도1호선에 비각이 하나 있다.

옛날 사남면 예의동에 은순이란 효자가 살았는데 어릴때 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그의 아버지가 죽자 밤낮으로 슬피울며 집안이 가난하여 장사를 지내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었는데 마을에 불이 났다. 그때가 농사철이라 어른들은 들판에 모두 일하러 나가 없었고 아낙네들만 우왕좌왕하면서 불을 끄려 하였으나 불길은 잡히지 않고 더욱 더 마을에 번져 은순의 집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난하여 장사를 치르지 못한것도 한인데 화재마저 일어나 아버지의 시신을 불태울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워 마당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대성통곡하였다. 하늘이 그 효성에 감동하였는지 뜻밖에도 소낙비가 쏟아져 불을 끄게 되었다. 장사를 치룬 은순은 죽을 끓어 먹으면서도 시묘(侍墓)를 알뜰히 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이 효자의 지성에 감동하여 효자문을 세우게 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효자문은 정조 10년(1786)에 중건한 기록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문화재

도지정기념물 제141호 연천숲

이 숲은 연천마을내 소재하며 마을 뒷산은 제비(연)가 날아가는 형상이고 마을앞 강 건너 산은 제비집으로 마을명을 연천이라 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제비집인 앞산이 석산으로 마을에 강한 영향력을 준다하여 조화를 이루기 위해 직수를 한 것이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28), 팽나무(21), 발채나무(8)등 57그루가 풍치림 처럼 보이며 마을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1994년 7월 4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도지정기념물 제233호 우천도요지

이곳에서 지표채집된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 전기의 분청사기와 조선시대 후기(17~18세기)의 백자와 옹기를 생산하였던 지방요로 추정되고 있다. 사남면 우천마을의 구룡못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부는 구룡못 물속에 잠겨 있다. 가마터는 구릉면을 따라 길이 200여m, 폭 약 30m로 구룡못의 물속에 잠겨 있는 부분까지 한다면 그 면적이 꽤 넓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에는 가마 벽체의 일부분과 분청사기, 자기, 옹기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어 이 지역의 도자기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2001년 5월 3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도지정기념물 제234호 사촌도요지

조선 후기의 자기를 굽던 가마터로 사촌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부터 가마터가 있었다고 전해져 왔던 곳이다.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흙을 채취했던 흔적과 갑발, 가마의 일부, 백자 조각 등이 확인된다. 도자기 조각은 완, 접시, 사발 등 기종이 다양하며 이 조각들로 미루어 볼 때 조선 후기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로 추정된다. 이 지역의 도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2001년 5월 3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능화봉

소재지 :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이 고적은 고려 安宗(郁)의 능묘가 있었던 유적으로 지금도 이 산아래 마을을 능화라 부른다.

고려 5대왕 경종비 황보씨는 일찍이 청상의 몸이 되어 사제로 나와 살았다. 비가 사는 집 근처에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 욱이 살았는데 이들는 상근하게 되자 급기야는 아들을 분만하고 비는 죽는다.

성종은 종실의 욱을 책한 후 사천으로 귀양 보냈으니 이때가 성종 11년 7월의 일이며, 유모에게 자란 아이는 두살 때 귀양지 욱에게 돌려주었으니 이 아이가 詢이다. 순은 배방사에 기거하게 되었고 아버지 욱은 귀양와서 4년째 되던 해인 성종 15년 7월에 죽으니 아들 순에 의해 이곳에 묻혔다.

그 후 어린 순은 천애고아가 된 채 사천에서 10년 동안 숱한 일화를 남기고 왕경으로 올라갔으나, 천추태후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고 중이 되었다. 이 때 천추태후의 충신 김치양의 무리가 정권을 농락하여 왕실의 위엄과 기강은 극도로 문란케한데서 온갖 화근이 발생한다. 사태가 이러하니 고려조의 뜻있는 모든 대신과 백성들은 순을 후계자로 지정하여 대량원군으로 봉하고,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이때가 서기 1009년의 일로써 이분이 제8대 현종이다.

이로서 현종의 황고 안종의 장지를 능화, 능화봉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지리풍수설에 이 장지에 "伏屍而葬하면 則感10年"이라 즉 "시신을 엎어서 장사지내면 10년 안에 그의 자손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는 뜻에서 그렇게 묻혔던 것이다.

그 후 현종은 재위 8년 4월에 문하평장사 최항과 중극부사 윤징고를 사천에 보내어 안종의 사관을 모셔 옮기게 하고 왕이 법말을 갖추어 동쪽 교외에서 맞이하여 건능에 이장하었다. 지금도 이구산 능선을 따라 많은 묘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민창

소재지 : 사천시 사남면 유천리

이 창은 조창과는 달리 춘궁기에 농미에게 대여해 쥐 위하여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로 조선조 영조 39년 (1763)에 좌의정 홍봉한의 주창으로 북방의 교제창을 본따서 삼남에 설치했는데 이때 영남에는 오직 한곳 사천밖에 없어다고 한다.

제민창에는 6만섬의 곡물을 저장하여 춘궁기가 되면 농민들에게 저리로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기에 받아 들였다, 따라서 이창의 속읍은 모두4개읍으로서 사천의 9면, 진주의 28면, 고성의 3면, 곤양의 6면 등이었다. 그리고 매년 3분의1씩만 분납하고 3년마다 한번씩 대상지역을 조정했다고 한다.

제민창이 어느때 폐지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므로 구한말로 추정된다. 전하는 바로는 곤양면 검정리 대구포에 제민창이 있었는데, 이 창의 이름을 도창이라 하였다. 도창이란, 전에 사남면 유천리 조동(제민창)마을에 있어던 제민창이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도창이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천일반산업단지로 편입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것이 아쉽다.)

가천용소

소재지 : 사천시 사남면 가천리

이 소는 면소재지에서 동남쪽 8㎞지점인 흥무산 기슭에 있다.

소 하면은 일반적으로 땅바닥이 둘러 빠지고 물이 깊이 괸 곳이어서 숱한 전설을 지니고 있다. 가천용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옛날 구룡저수지가 만들어지기 훨신 이전에는 명주 실꾸리 다섯개를 풀어 넣어도 닿지 않는다는 설과 소에 살던 이무기가 어느날 용이되어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생겼다는 설이 있고, 이 소에 빠져죽은 이들이 용이되어 갔다는 설이있으나 구전으로만 전하는 얘기다.

현재는 여름철 사남면의 중요한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하루 2,000 여명이 물놀이 등을 즐기며 휴가를 보내는 곳이며 휴가객의 편의 도모를 위해여 민박집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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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남면 총무팀 055-831-5070 / 팩스 : 055-831-6073
최종수정일
2016-07-12 13: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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