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金東里
  내가 곤명면을 처음 찾았던 것은 一九三五년 이른 봄이었다. 그해 신춘문예(조선중앙일보)에 내 소설이 처음으로 당선 되었기 때문에 조용한 곳에 가서 좀더 차분히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그곳(조용한 곳)이 바로 사천군 곤명면에 있는 다솔사였던 것이다. 나는 서너달이나 절간에 박혀 있으면서 나름대로 읽고 쓰고는 했지만 외부와의 접촉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곤명면에 대해서는 인물이고 지세(地勢)고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곳에서 해인사(海印寺)로 옮기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해 그러니까 1936년에 또 다시 소설이 당선(동아일보 신춘문예)되자 나는 서울에서도 쓰고 고향에서도 쓰고 하여 꽤 많은 작품을 발표 했으나 그것으로 생활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인 37년 봄에 또 다시 다솔사(多率寺)로 갔다. 다솔사와 인근 마을(봉계리)과 합동으로 운영하게 되어 있는 학원(學院)의 선생(先生)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봉계리 원전(院田)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던 광명학원(光明學院) 이었다. 나는 이 광명학원에서 낮이면 어린이들을 밤이면 처녀 총각들을 상대로 한글과 일본말과 가감승제(加減乘除) 사칙(四則)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것이 뜻밖에도 반응이 강해서 면내의 여러 분들과도 알게 되었다. 특히 한달에 한번씩 보름날(음력) 밤마다 열리던 학예회(學藝會)에는 동네의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언제나 많이 모여들었고, 한 해에 한 차례식 개최되던 운동회(運動會)에는 면내의 수많은 유지(有志)들과 젊은이들이 모이곤 하였다.   특히 학원의 운영(運營)을 맡고 있던 다솔사(多率寺)에는 한용운(韓龍雲) 허백련(許百鍊)과 같은 명사(名士)들을 위시해서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지사(志士) 처사(處士)들이 늘 모여들곤 하였다. 그것은 내 백씨(伯氏) 범부선생(凡父先生)과 범산(梵山)선생 같은 이들에게 당시의 주지스님이던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스님이 은거처(隱居處)를 제공(提供)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곤명면은 사천군 안에서도 제일 외지고 조용한 곳으로 그만큼 인심도 어느 지방보다 순박한 편이었다.   나는 42년 겨울인가 43년 봄인가 곤명면을 떠난 뒤 맨날 별르기만 하면서 이날까지 그곳을 아직 찾아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면지(面誌)를 낸다니까 옛 일이 새삼 그리워진다. 부디 그 순박한 곤명면의 모든 자연과 모든 역사가 다 수록(收錄)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 특히 향토지(鄕土誌) 발간(發刊) 과정(課程)이 년로층(年老層)이 주축(主軸)이 되어 향리(鄕里)의 사라진 문물(文物)을 되찾아 후세(後世)에 남기고저 함이라 하니 그 장(壯)한 뜻에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는 바이다. 나의 곤명면 시절(昆明面時節) -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중심(中心)으로 -   나와 곤명면과의 인연은 다솔사로 인하여 맺어졌다. 내가 사천군 곤명면에 있는 다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천구백 삼십오년 이른 봄이었다. 이보다 두 해 전이니까 33년에 나는 서울서 내 백씨(凡父先生)의 소개로 최영환(崔英煥)씨를 알게되었다. 당시 다솔사의 주지스님이라 했다. 스님 티가 거의 없어 보였다. 나는 그때부터 약 일년간 서울에 머물고 있는데 이 스님은 가끔 서울에 나타나면 꼭 백씨를 찾아왔고 나도 그때마다 마나게 되고 했다.   35년 신춘문예(중앙일보)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 된 나는 좀더 차분히 글을 쓰기 위하여 이 다솔사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최영환 스님은 다솔사의 주지인 동시 본산(本山) 해인사(海印寺)의 법무감을 겸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솔사보다 해인사에 머무는 기간이 더 많은듯 했다. 그해 여름 나는 해인사로 옮겨갔다. 최영환스님이 해인사에 강원(講院)을 개설키로 하고 내 백씨와 범산(梵山-金法麟) 선생을 강사로 초대 했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해인사의 강원은 그해 가을부터 개설 되었다. 나는 백씨와 함께 그 해 겨울을 해인사에서 지내며 다시 소설 한편을 썼다. 그것이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또 다시 당선 된 [산화]였다. [산화]가 또 다시 당선되자 나는 일단 고향으로 갔다가 서울로 가서 한 반년 동안 하숙생활을 하며 소설을 썼다. 그러나 원고를 써서 생활하기가 힘들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봄 다시 다솔사로 갔다. 다솔사도 같은 곤명면 소재였지만 절에서는 한 십리 가까이 떨어지는 곤명면 원전(院田-鳳溪里)에다 효당(曉堂)이 학원을 개설키로 했으니 나더러 맡아 보라고 했다. 본디 원전 뒷산에 포교당을 내기로 하고 절에서는 건축 자재를 내고 동네에서는 인력을 공급키로 하여 집을 한 채 지은것이 있었다. 그러나 포교당을 내기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는다 하여 학원(사설학술강습회)을 내기로 마을측과 합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경남도 학무과의 인가(허가)는 사설학술강습회란 명목이었고 절에서는 광명학원이라 불렸다.   낮에는 학령(學齡)이 초과했거나 미취학된 아이들이 약50명 모여왔고 밤에는 부근일대의 머슴들과 처녀들이 한 20명 모여 들었다. 가르치는 과목은 일본말과 한글과 산술(사측)이었는데 그 성과는 대단했다.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한글을 읽게 되고 사측을 할수 있게 되자 얼마 가지 않아 면내에는 문맹(文盲)이 없어 지겠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밤낮으로 학원에 매어 달리고 보니 내 건강이 견딜 수 없었다. 거기다 아이들이 자꾸 많아지니 내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수가 없었다. 절에서는 적당할 강사 한 사람을 더 구해 보기로 하고 물색한 끝에 절에서 멀지 않는 동네에서 적임자를 얻어 내었다고 했다. 그 분이 이상권(李相權 - 現新亞通信社長)씨였다. 이상권씨는 아침마다 자전거로 학원까지 와서 강의를 마치면 역시 자전거로 돌아가고 하였다. 이렇게 낮에는 두 사람이 함께 강의를 하고 밤이면 20살 전후의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나 혼자 소위 야학이란 것을 계속 했는데 한 일년 가까이 되니 원전을 중심한 곤명면 일대엔 최소 편지 읽고 쓰고 하는 정도 못하는 젊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소문과 함께 이웃 면인 곤양면과 이웃 고을인 하동에서 까지 나에게 강사 교섭이 오곤 했다.   한편 학원의 평판이 정상으로 달릴 무렵 같은 면의 공립 초등학교에서는 이 학원이 장애물이란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학령된 아이들까질 초등학교보다 이쪽 학원을 더 원한다는 현상 때문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소위 조선어 과목이 폐지 되었기 때문에 졸업을 해도 편지한장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불만들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한편 저항과 보복을 불러 오게 되었다.   첫째 같은 면의 공립초등학교 교장(일본인)이 도(경남) 시학(視學)에 이 사실을 보고 했는데 그 내용은 비밀이었으나 원칙은 뻔한 것이었다. 또 당해(當該)면의 주재소(파출소)에서도 본서(사천경찰서)로 보고가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잠간 밝혀둘 것은 당시의 당 면의 주재소 주임(소장)은 물론 일본인이 었지만 노인인데다 불교신자라 다솔사의 주지(최영환 - 효당)스님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지식도 없이 늙는다면서 못된 짓을 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을 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 밑에 있는 수석경관(순경)이 역시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다. 성명이 강덕진씨 었는데 이분 역시 애기가 없었다. 이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학원이 5년간이나 유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 밑에 또 두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에 잡음들을 덮어 주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도시학(道視學)이 나와 조사를 했다. 자기들 나름대로 조사를 마친 뒤 학원측 관계자들과 국민교 교장을 동석시키고 의견을 교환키로 했다. 이것은 물론 이 학원이 이 지방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해서 취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간단한 의견들을 청취한 뒤 시학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었다.   [이 사설학술강습회(광명학원)은 그동안 면민들의 문맹 퇴치를 위해 적챦은 성과를 올렸다고 본다. 따라서 도(道)로서는 이를 승격 시켜서 간이학교로 만들 방침이다.] 학원(강습소)를 학교로 승격시켜 주겠다는데 이의가 있을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 학원을 이끌어 온 강사의 거취인데 이에 대해서도 자기로서는 응분의 대우를 하고 싶다고 전제를 하고 나서 [이 기회에 자격을 따도록 하시죠]하며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도 이미 내가 작가란 것은 듣고 있는 눈치었다.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나의 학원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나에게 귀띰해 준 바에 의하면 학원이 폐쇄된 직접 이유는 이 학원 아이들이 한글과 산술(가감승제)은 잘 하는데 국가(일본국가 “기미가요”)를 잘 못부른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매월 8일을 조서봉대일(詔書奉戴日)이라하여 그 일대의 부락대표자들과 각 기관 대표자들이 학원의 뜰(운동장)에 모여 식을 거행했는데 그때 학원 아이들도 정렬해서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들이 국가를 잘 못불렀다는 것이다.   내가 학원의 일을 보고 있는 동안 우리집은 경찰의 박해로 폐가가 되고 말았다. 백씨는 가족과 함께 다솔사로 들어와 숨어 살게 되었다. (당시 까지 주지스님의 이름은 영환, 법명은 금봉(錦峯) 당호는 석란(石蘭)으로 되어 있었다. 해방후 본명 범술(凡述)을 쓰고 도호를 효당(曉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38년 가을인가 39년 겨울인가 부터는 범산(梵山 - 金法麟) 선생도 가족과 함께 다솔사로 은거하게 되었다. 당시(39년) 내 나이는 27살이었는데, 주지스님은 36살 범산선생이 38살 내 백씨가 43살이었다. 그때 나이 순서대로 호형호제를 하게 되니 내 백씨가 제일 형이고 내가 제일 동생이 되었다. 범산선생이 아직 다솔사로 솔권해서 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38년 봄이던가. 내가 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절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서 만해(卍海 - 韓龍雲) 선생이 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학원 일을 끝내는 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솔사로 갔다 만해선생과 내 백씨가 나란히 앉고 맞은 편에 주지스님이 앉아서 엽차를 끓이고 있었다.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뜻으로 손수 차를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백씨의 지시로 만해선생께 인사를 드렸다. 백씨는 [애도 글을 쓴다고 합니다. 형님께서 많이 가르쳐 주셔야 하겠습니다.]했고 주지스님이 잇달아 [신춘문예에 연거푸 세 번 당선을 했습니다]하여 나를 추켜 세웠다. (사실은 최초의 시는 당선이 아니고 입선이었지만)   주지스님은 엽차를 끓여서 만해선생께부터 차례대로 한잔씩 주었고 나에게는 특히 찻잔 잡는법부터 마시기까지 취하는 자세와 방법등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 날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내가 학원에 있는 동안 다솔사를 다녀간 수많은 인물들 특히 민족주의 계통 지사(志士)로서 잊히지 않은 분으로 만해선생과 함께 의제(毅齊 - 許百鍊)선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의제선생은 한복 차림으로 한 20일 가량 절에 머물면서 낮에는 스켓치를 다니고 저녁때엔 백씨 주지스님 그리고 서예가 하성파(河星坡) 노인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이 밖에도 진주서 하동서 사천(남양)서 다년간 분들이 꽤 여렷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백씨는 경기도 경찰과 경남도 경찰에 의하여 두 차례 검속이 되고 나까지 계속 가택수색을 당하게 되자 절에서도 더 머물수 없게 되었다.(학원이 폐쇄된 것도 중요 원인이었다.) 따라서 백씨는 양산(梁山) 지영진선생의 후의로 일광면에 있는 농막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백씨나 나나 가장 어려운 시기를 사천군 곤명면 내지 다솔사에서 보낸 셈이 된다. 이 역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韓國文人協會 理事長 金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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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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