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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

우리면이야기

마을명칭유래

추천리(楸川里)

본래 가리골 또는 추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추천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오사, 추동, 신산 3개 마을로 형성되었다.

오사(梧紗)
곤명의 최남단으로 곤양성내에서 북쪽으로 2.5㎞이며 면소재지에서 3㎞지점이고 곤명과 곤양의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본동(本洞)과 오봉으로 형성된 마을로 뒷산이 장재산이고 동네쪽으로 뻗은 능선이 "새우등"이다. 남쪽에는 오봉산이 있고 "까마귀등"은 장재산 남쪽으로 뻗은 묘산이며 그 아래의 마을이 오봉동이다. 지명은 한자로서 두가지로 사용하였는데 "까마귀가 비단을 즐긴다"하여 오사(梧紗)라 하고 또 "새우"는 "모래"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오사(鰲沙)라 하였다. "새우등"과 "까마귀등"에 둘러쌓인 마을임으로 동명(洞名)이 이에 맞춘 것이라고 본다.
추동(楸洞)
다솔사에서 약 2㎞ 지점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소재지에서 3㎞지점이고 추천리의 중심지에 터전하고 있다. 옛날 부락 뒷산에 가래나무(=추목(楸木))가 많이 있었던 연유(緣由)로 추동의 동명(洞名)이 붙여졌고 일명 "가래골"이라고 하였다.
신산(新山)
다솔사 입구의 양조장에서 절 아래까지 이어져 있는 마을로서 추천리의 새동네마을과 용산리의 절골 마을을 합한 동리(洞里)이니 새 동네의 신(新)자와 용산의 산(山)자를 넣어 신산(新山)이라 한 것이다.

용산리(龍山里)

본래 산이 용처럼 생겼다 하여 용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리라 하여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둘러쌓인 능선이 구리(=뱀,蛇)나 용처럼 형국되어 있어 동명(洞名)을 "구리실"라 불리어 오다가 100년전 용(龍)의 산형이 옳다 하여 용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장리(助場里)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동을 병합하여 조장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300여년전 율목정(栗木亭)이 있었으므로 율목정 마을로 불리어 오다가 본 마을이 지리풍수설로 "챙이설" "빗자루설" 등으로 "방앗간"이 있어 "새"가 많이 모인다 하여 조장(鳥場)으로 동명(洞名)이 되었다가 조장리라고 개칭되었다.

연평리(蓮坪里)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평동과 진주군 축곡면의 연향동을 병합하여, 연향과 조평의 이름을 따서 연평리라 하여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봉계리(鳳溪里)

봉계리의 유래는 앞산의 봉알자리(飛鳳包卵)와 초량천(草梁川)의 내가 흐르고 있으므로 봉계로 명명(命名)된 것이다. 원전, 오저(俉苧) 2개 마을로 이루고 있다. 일명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는 원이라 하여 십오리원(十五里院)이라고도 한다.

원전(院田)
조선조 때 완사역에 딸린 봉계원(여관)이 있었으므로 원골 또는 봉계원, 봉계라 하였는데 일명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는 원이라 하여 십오리원(十五里院)이라고도 한다. 충무공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삼가(三嘉)에서 노량(露梁)쪽으로 행여(行旅)할 적에 수군패보(水軍敗報)를 들은 십오리원(十五里院)이란 곳이 오늘의 원전(院田)이다.
오저(俉苧)
오저는 봉계리(鳳溪里)에 속한다. 초량천을 사이에 두고 오천, 저동(苧洞)의 양 마을을 합한 것이 오저 부락이며 구한말 때 초량면사무소가 소재하고 있었다.
오천(梧川)
뒷산이 봉황산이고 봉은 오동나무에 깃든다 하여 산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하고 마을앞에 초량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오천(梧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저동(苧洞)
옛날 모시(苧)가 많이 생산된 연유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초량리(草粱里)

본래 새들 또는 초량이라 하여 초량면의 이름이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거리를 병합하여 초량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조선조 때 초량면의 소재지가 되었던 것을 연유하여 초량리로 부르게 이르렀다 한다. 원래의 동명(洞名)은 "구시골" "손도(孫道)" "손량(孫良)"으로 불리어졌으니 "구시골"은 마을 형태가 "쇠죽그릇"을 닮았다 한데서 유래된 것이고 "손도"는 용산리에 있는 진양정씨 묘에 당시 상주(喪主)가 시묘(侍墓)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손자가 조석식반을 6년간 나르는 내왕 길이었기에 후인이 길 이름을 손도라 부른 것이 동명(洞名)도 이에 따랐다 한다.

삼정리(三亭里)

본래 곤양군 소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탑동, 방광, 서전을 병합하여, 세 마을 앞에 각기 느티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세 정자의 뜻을 따서 삼정리라하여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은사리(隱士里)

예전에 난(亂) 때 선비들이 이곳에서 숨어서 살았으므로 은사동이라 하였고, 은사마을과 옥동마을이 있다.

옥동
소가 밥그릇(구시)을 안고 배부르게 누운 지형곡(地形谷)이라 하여 동명(洞名)이 "구시골"이라 불리어 오다가 그 후 구시(槽)가 구슬(玉)로 바뀌어져서 옥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마곡리(麻谷里)

마곡의 동명내력은 뒷산이 "매봉산"이고 응실형국으로써 "매실"이 "마실"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하고 또한 갈마 음수정이 들 가운데 있었음으로 마곡이라고 하다가 구한말 때 마곡으로 개칭하였다.

송림리(松林里)

송비산(松飛山) 기슭이 되므로 송림이라고도 하고 도선사의 지리비기(地理秘記)와 정감록비기(鄭鑑錄秘記)에 "흑룡(黑龍=壬辰亂)은 이여송송(利如松松)이니 병화불침(兵火不侵)의 십승지처(十勝之處)"라는 구절의 송(松)자와 당시 정파의 극한의 대립과 잇단 사화(士禍)로 뜻있는 선비는 한적한 임천(林泉)을 찾아 은둔하는 시대였음으로 ‘임’자를 넣어 송림으로 지칭한 것이라 본다.

성방리(城方里)

본래 곤양군 성방면의 지역으로서, 성방면의 소재지가 되므로 본촌 또는 성방이라 하였는데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교동을 병합하여 성방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작팔리(作八里)

작문팔수(作文八首)의 문장으로 병풍형(屛風形)의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라 작팔(作八)이다. 또는 선인(仙人)이 독서하였다는 자리가 흡사 상(床)을 놓고 공부하는 형국이고 골짜기의 이름이 형국에 맞추어 붙여졌으니 즉, 신선이 강림(降臨) 하였다는 "강선(降仙)곡(谷)" 배움터가 있었다는 원학당(元學堂)골, 벼루의 연석(硯石)골, 벼루의 연수(硯水)골, 붓(筆)골, 먹(墨)골, 장지(張紙)골, 글을 읽은 독(讀)골 등 8골이 있으니 혹설(或說)은 작팔 동명(洞名)이 여기에 연유라고도 한다.작팔과 구몰 2개 마을로 형성되었다.

구몰(龜沒)
동명(洞名) 유래는 비리고개에서 뻗은 산이 거북형(龜)이고 이 거북이 앞 시내를 보고 들어가려는(沒) 형용(形容)이라 하여 구몰이라 한다.

신흥리(新興里)

새로 이룩된 마을이란 듯으로 신흥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 지내, 고월, 석고를 병합하여 신흥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진양호의 확장공사로 주민들이 이주하여 완사시장과 새로운 소도시의 면모를 갖춘 마을이다.

고월(顧月)
고월의 명칭 연원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뒷산이 반월형(半月形)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 하고 또 일설(一說)은 임란 때 충무공이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기 위하여 소곡면 원계(元溪)를 거쳐 이 마을 앞을 지날 적에 이미 달이 서산 너머로 기울어 어둠이 짙어짐에 우국지정(憂國之情)을 금치 못하여 눈물을 지우면서 달의 무정함을 탓하며 노량쪽으로 발길을 재촉한 바 있다 하여 동명(洞名)이 지어졌다고도 한다.
만지(滿地)
동명(同名)의 유래는 못안의 소류지(小溜地)가 축조년대(築造年代)를 모을 정도 오래된 못으로 이 못물로 영농을 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언제나 못에 물이 가득 차 있기를 염원하는 심정으로 동네 이름도 만지로 부르게 됨이 그대로 이어졌다 한다.

정곡리(正谷里)

그릇점이 있었으므로 점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정곡이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완사, 사창, 신기, 곡내 수변을 병합하여 정곡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완사(浣紗=빨래를 함)
명칭은 옥녀봉 전설에 따라 "비단"을 짜서 씻었다고 한데서 나온 말
옥녀봉전설
옥녀라는 아가씨가 용모도 아름답고 품행도 단정한데다 베짜는 솜씨까지 훌륭했다 이 아가씨는 베를 짜서 덕천강에 씻어(浣紗=빨래를 함) 팔아 살았다. 마침 인근을 지나던 민도령이 옥녀에게 반하여 청혼하였으나 옥녀는 과거에 급제하면 허락하겠다고 한다. 민도령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길에 오르고, 옥녀 또한 민도령의 과거급제를 예견하고 옷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 고을 사또 행차중 옥녀를 탐하여, 민도령을 위한 옷감을 모두 잘라버렸다. 이에 낙담한 옥녀는 덕천강에 몸을 던지고, 사또 또한 급사, 민도령도 과거급제후 금의환향중 이 사실을 알고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한다. 이후 이 벼랑끝을 지나는 혼인행차는 어김없이 화를 당했고 이를 위로하기 위해 옥녀봉과 완사라는 지명이 생겼다한다.
신기(新其)
새터마을과 골안마을 묶은 것이 신기리이다. 1938년 곡내 신기의 양부락으로 있다가 1956년 통합되어 신기리가 되었다.

본촌리(本村里)

곤명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본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촌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본촌과 양월 두 마을로 이우어져 있다.

양월(陽月)
양달 마을이었던 것이 한자로 표기로 된 것이고 일명 "장자터"라 함은 부자가 많이 살았다는 뜻에서 생긴 동명이다.

금성리(金城里)

금성 밑이 되므로 금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성리라 해서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됨. 금성, 장신 2마을로 이루고 있다.

금성(金城)
신라가 가락국을 귀속 시킨 후 신라국사(新羅國師)가 이곳을 둘러보니 대강(大江)이 주위를 싸고 절벽과 험산에 둘리어 가히 천혜의 요쇄지(要塞地)였으므로 축성(築城)하였으니 성명이 금성(金城)이고 동명(洞名)이 이에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신(長新)
금성리의 분리(分離)마을로서 장흥골마을과 새터마을의 2개 마을로 합쳤으나 1957년 지방자치제시행 때 장신이라 호칭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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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 총무팀 055-831-5204 / 팩스 : 055-831-6077
최종수정일
2016-07-12 16: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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