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마을명칭유래



축동면

우리면이야기

마을명칭유래

본래 진주군의 지역으로서 축동면이라 하여 예동, 사다, 하동, 길평, 신기, 양동, 배춘의 7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축곡면과 가차례면의 하동과 사천군 북면의 토촌 등 일부와 진주군 부화곡면의 가산, 학수, 하구, 반룡, 구호, 성산, 탑동, 신촌, 관동의 9개 동리를 병합하여 다시 축동면이라 하여 사천군에 편입되어 가산, 구호, 탑리, 반룡, 사다, 길평, 배춘의 7개 동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사천 비행장의 확장으로 하동마을은 사남면 유천리에 정착하고, 원동마을 일부주민은 진주시 가호동에 정착하였으며, 길평마을은 진주-삼천포 국도변인 배춘리로 이주하였다.

동쪽은 사천읍과 진양군 정촌면, 남쪽은 사천읍과 사남면, 서쪽은 곤양면, 북쪽은 진양군 내동면, 정촌면과 접하고 있다.

가산리

본래 진주군 부화곡면의 지역으로서 가산 또는 나라의 조세를 받는 조창(가산창)이 있었으므로 조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학수동과 하구동, 반룡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산리라 해서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되었다.

가구머리
용수 동쪽에 있는 산
가산
마을 가운데 산이 당산으로 조선 영조 36년(1706)에 구해창(구호리에 있었던 장암창)에서 이건되어 1894년 동학란 뒤에 조창이 파할때까지 조세를 경창(왕경=개성)으로 운송하던 아늑한 항구였다. 북에 용수산, 동에 안산, 서에 도가산, 남으로 하구포가 열려 있다. 안산 너머에는 코끼리 지형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인근의 수원지로 유명한 방갈샘이 있다. 도가산은 이곳 사투리로 "똥뫼"라 하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이 마을의 모양은 소가 동쪽을 향해서 있는 형국이라 하여 가산이라는 이름도 이런 근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고시랑당
가산 동북쪽 2㎞지점에 있는 산. 봉우리에 있는 돌밭에 큰 돌로 된 문같은 바위가 있어 돌로 치면 소리가 난다 함. 동학란 때 동학군이 먼당에 진을 치고, 왜군이 공격하자 웃통을 벗고 "지아천지조화지"라고 주문을 외우며 대항했으나 수백명이 그을려 죽었다 함
김부인 효열비
용산 남쪽에 있는 김해김씨의 효열비
꽃당
화당산 밑에 있는 마을
내화당
안꼬당(안꽃당) 마을
당산
조창 서쪽에 있는 나무. 포구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동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마을의 이주로 지내지 않고 천룡제만 지낸다.
도창
가산 서쪽에 바닷가에 있는 마을. 가산창에서 조곡을 운반하던 나룻터
똑메등
조창 서쪽에 있는 산. 송아지가 누워 있는 형국으로 따로 떨어져 있음
바깥꼬당
꽃당의 바깥마을
벅수골
가산 동쪽에 있는 서낭당. 사람모양을 돌로 만들어 두 곳에 두고 천룡제를 지냄
살뿌딩이
용수 동남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경남도립정신병원이 있음
성지골
용수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서당이 있었다 함
숯골
용산 동쪽에 있는 마을. 숯 굽던 곳이라 함
시비고리뒷산
조창 동쪽에 있는 산
시비골
가산 새동네가 있는 골짜기
아랫골짝
용수마을
안꼬당
내화당. 꽃당의 안쪽마을
애고개
가산 북쪽에 있는 험한 고개. 함양, 산청 등지에서 조세를 지고 100여리를 와서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해서 애를 먹었다.
외화당
바깥꼬당
용산
용수 동쪽에 있는 마을
용수
가산 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용의 머리와 같다는 형국임
용수천
용수 서북쪽에 있는 내. 진양호 배수로임
인절미
용수에서 구호리로 가는 고개
장곡
조창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 함
화당산
용산 동북쪽에 있는 산. 지리산 줄기가 사천만 쪽으로 뻗다가 우뚝 솟은 해발 200m의 야산으로 북서쪽은 반룡리, 동쪽은 탑리, 남쪽은 가산리를 경계로 하는 산으로 예부터 명산으로 한발이 계속되는 가뭄에는 면민이 모여 기우제를 올리는 산으로 하산하기 전에 소낙비가 내리는 산이며, 산정상의 동쪽(탑리쪽)에 동굴이 있는 바, 이 동굴이 얼마나 긴지 돌을 던지면 구호 앞 바다 사천만까지 간다는 말이 전하여 오며, 이산 아래에서 4성 장군(대장)과 많은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어 국가에 이바지하였음
방갈새미
코끼리산 중간 지점에 있는 우물로서 가산창이 번창할 때 300여호의 식수를 공급하였고, 조운선까지 식수공급의 중요한 우물이었다. "진주조창이 살기는 좋아도 물장사 등살에 못 살겠다."는 구전은 물이 부족한 당시의 정황을 말해준다.
코끼리산
가산 동쪽 방갈새미의 위산, 코끼리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함

구호리

본래 진주군 부화곡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때 옛 해창이 있었으므로 구해창 또는 구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구동 일부를 병합하여 구호리라 하여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되었다.

통양창지가 이곳으로 창지가 옮겨져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나 영조 36년(1760)에 가산으로 옮기기까지 번창한 서부경남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1914년 행정개편 때 이곳에 면사무소 있다가 1928년 11월 9일 길평리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사천비행장의 확장과 남해안 고속도로 신설 또는 두원중공업 등 공장이 들어서면서 세력이 점차 쇠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갓등
구호 남쪽에 있는 산
강지도
강지섬(사천만)
강지섬
하구 동쪽에 있는 섬이였으나 비행장 공사로 없어졌음
개논
구호 남쪽과 동쪽에 있는 간척지. 염전이였으나, 매축하여 논이 되었음
거랭이들
구호 서쪽에 있는 골짜기. 논에 물이 항상 마른다는 뜻
고동살밍이
구호 북쪽에 있는 산. 소라가 사린형이라 함
구해창
장암창이라고도 함
당산 할아버지
쾌재정에 있는 당산나무. 포구나무로 둘레 약 5m가 됨
목넘
평당골
박씨걸
구호 북쪽에 있는 마을로 큰 바위가 있음
배껏살밍이
고동살밍이 바깥쪽에 있는 산
살미골
구호 북쪽에 있는 골짜기. 뱀이 사려있는 형국이라 함
살푸댕이 먼당
구호 서쪽에 있는 산
샛강
구호 동쪽에 있는 강. 사천읍 중선리와 구호리 사이가 됨
새앵골
구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안산
구호 남쪽에 있는 산
안살밍이
고동살밍이 안쪽에 있는 산
앞강
구호 앞에 있는 내
인절미재
구호와 용수의 사이에 있는 고개. 전에 구해창으로 가는 길에 쉬면서 인절미를 먹었다 함
열녀문
구호 서쪽. 함박산 밑에 있는 비. 이경모의 어머니의 비인데 1907년 4월에 가산에서 남강댐 공사 때 옮겼음
은절미재
인절미재
장곡재
구호 서남쪽에 있는 고개. 가산리로 가는 재
칼맞은 터
구호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벼락을 맞아 골짜기가 생겼다 함
쾌거리
하구와 가산리 사이에 있는 골짜기
쾌재정
구호 안산에 있는 정자. 예날에는 바닷물이 밑에까지 들어와 경치가 아름다워 명사, 현인들이 즐겨 찾았으며, 고기도 쾌재정에서 낚았다 한다. 이퇴계 선생이 이정 선생의 초청으로 이곳으로 찾아와 쾌재정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고려때 남병사와 복병사를 지낸 이순 장군이 지었다는 설이 있음. 황폐되어 이 터에 세미창이 있다가 1938년 김성환의 특지로 중건하였으나 정자는 낡았고 비문과 놀이터만 남아 있다. 이곳 출신인 이정선생이 남면 조식선생과 이곳에서 낚시를 하던 중 고기색깔이 빨간색을 띤 고기가 걸려 오는 것을 보고 나라에 국상이 난줄을 알고 각자 행장을 차려서 십수다리에서 짚신을 뒤엎는 것을 신호로 만나 상경키로 하였으나 구암 이정선생은 기다려도 안와 혼자 상경하여 조정에 입궐하여 보니 남명선생이 먼저와 있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정자 바로 앞 난간에 약 500년 된 푸조나무가 지금도 외로이 서 있다. 이 정자가 일제시대에 구호간이학교로 활용하다가 구호국민학교로 개칭되어 오던 중 1960년대 태풍으로 허물어지고 구호국민학교는 새로 지어 옮기고 이 정자는 지붕에 스레트로 개축하여 현재까지 문화재로 등록을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순장군 묘소
고려시대 남병사와 복병사를 북방의 여진족을 섬멸하고 삼남지방(진주)을 수시로 약탈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하여 이곳 쾌재정에 주둔하여 남해바다를 지키다가 불행히도 전사하여 구호 뒷산의 명지에 안치하여 오던 중 일제시대 때 도굴로 장군의 묘소는 도굴 당하고 비각 등은 주위에 흩어져 있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하구
바닷가의 마을로 내외 끝부분 지금은 두원중공업 자리임
함박산
구호서쪽에 있는 산 공동묘지가 있는데 묘자리를 파니 함박꽃이 나왔다 함

길평리

본래 진주군 축곡면의 지역으로서 길호강가가 되므로 길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동 일부를 병합하여 길평리라 해서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되었다. 구호리에 있던 면 소재지가 1928년 11월 9일 면청사 신축으로 이곳으로 옮겼으며, 오행설에 의한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으로서 앞은 거시미 등이 밥상을 차려놓은 형국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 마을 앞 길호천 양강변 둑에는 수백년 된 수령의 정자나무 및 수양버들과 잡나무가 이 마을의 경광을 아름답게 조화시켜 길가던 나그네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다. 이 마을에는 구한말에 진주강씨가 많이 거주하여 한 집안에서 3사람의 군수가 배출되어 지방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은 일제 말에 사천비행장 공사로 인하여 이 "거시미등"이 없어지고 자연 경관도 훼손되면서 마을의 정기도 점차 쇠퇴하던 중 비행장 확장공사로 하동 마을은 사남면 유천으로 마을 전체가 이주하였다. 동시에 군사시설의 확장과 공군비행장의 체력단련장 시설로 길평마을 전체가 배춘리로 이주케 되었다.

길평숲
길평 남쪽 길호강가에 있는 숲. 폭 10m, 길이 200m
깻들
길평 서쪽에 있는 들. 옛날 바닷물이 올라오던 곳을 둑을 막아 논을 만들었음. 들판이 기름지고 벼농사가 잘되어 수확이 많고 쌀이 깨맛과 같다고 함
난등논
하동 동쪽에 있는 논. 높은 곳에 있어서 하늘받이로서 못먹는 해가 많았음. 지금은 골프장임
널바구
길평 남동쪽 길호강 옆에 있는 넓은 바위. 널 바구 근처에 있는 놀이터
당산몬당
하동 뒤쪽에 있는 밭. 당산이 있었음. 지금은 골프장임
도가터
하동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술 도가가 있었는데, 동학군이 군자금인 엽전 한가마니를 맡기고,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여 찾아가지 않았으므로 도가집은 부자가 되었다함. 지금은 골프장임
동쪽골
하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골프장임
동쪽골새미
동쪽골 우물 역시 골프장
북골
길평 북쪽에 있는 산
사로선
사천~노량가는 길로서 길호천의 서쪽에 있는 길
서쪽골
하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부대 탄약고임
앞내
길평 앞쪽의 내로서 구암, 두량, 사다 및 정촌면 한골, 강지에서 합수된 내
외밭골
하동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외밭이 있었으나 지금은 골프장
은환들
길평 남쪽에 있는 들 관할은 사천읍 중선리였으나 경작은 길평리 사람들이였으며, 지금은 비행장임
장터
하동 서쪽에 있는 장터. 장암창이 구호에 있고 십수교에 배가 정박할 때 시장이 있었음. 지금은 골프장
제민창
하동마을에 규모가 작은 제민창이 있었다.
포구나무
뒷산과 길호강에 있는 나무
하동
길평 동쪽 지금 골프장에 있었으나 공군비행장 체력단련장 시설로 지금은 사남면 유천리로 전체 이주하였다. 원래 십수교에 바닷물이 차고 화물선이 도착할 시 생긴 지명으로 화물하취장과 보관 창고가 있어 지어진 지명임
헛뻔덕
하동 동쪽에 있는 산. 지금은 골프장임
휴게소
길호강가의 포구나무 아래에 있는 놀이터

반룡리

본래 진주군 부화곡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용이 서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반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동, 관동을 병합하여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되었다. 신촌, 관동, 반룡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갓골
반룡 서북쪽에 있는 마을. 일명 관동이라 함. 즉 풍수지리설에 사람이 쓰는 갓의 형국이라 하나 지명사에 보면 가장자리의 마을이나 산 밑 마을들에 이런 땅이름이 많다. 여기에서도 가장자리의 마을로 표기한 것 같다.
다하실골짝
새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일명 당하실이라고도 함
당하실못
당하실에 있는 못
당화지
당하실 못
도가리골
신촌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논이 여러 도가리를 나뉘어 있고, 배나무가 많음
들새미
점골 남쪽에 있는 우물. 옥수가 항상 난다 함
마편동
말채골, 모체골, 신촌 서쪽에 있는 골짜기
모체골
말현공
미륵골
점골 동북쪽에 골짜기. 미륵이 있다 함
반룡재
반룡 남쪽에 있는 마을. 갯바닥이었다 함
배남골
도가리골
배력산
비약산
비리고개
비약산 동쪽에 있는 고개
비약산
갓골 동쪽에 새로 된 마을
새터
신촌이라 함. 갓골 동쪽에 새로된 마을
수치골
반룡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신촌
새터
양산고개
모체골 서남쪽에 있는 고개. 돌이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인재가 태어남을 막기 위해 끊었다 함
여시굴
배남골 위편에 있는 굴. 바위에 구멍이 나 있는데, 여우가 살았었다 함
용다리 골짝
용달치에 있는 마을
용달치 고개
신촌에 있는 고개. 용이 용소에서 나와 이 고개를 넘었다 함
용머리
용쏘 위에 있는 산. 용머리 형으로 우뚝 솟아 있음
웃보
원터에 있는 보
원반룡
반룡의 본래 마을
원터
모체골 남쪽에 있는 들. 신라 때부터 이곳에 원의 집이 있었다 함
이감사묘
갓솔 서북쪽 뒤에 있는 봉분이 큰묘. 남해이씨의 묘로써 꽃이 새겨진 좌판이 있음
작은골리고개
갓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조개 화석이 나왔다고 함
작은비리고개
신촌 서쪽에서 갓골로 넘어가는 고개
장밧골
갓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무연탄 종류가 나온다고 함
장사바우
참새미 우에 있는 바위. 힘센 사람이 바위 위에서 수도했었다 함
장치리
점골 남서쪽에 있는 내. 거문고의 형상이며, 옛날엔 고을이었으나 댐공사로 인해 내가 되었음
장칠현
장치리
재비설
모체골 서남쪽에 있는 산. 제비집 모양으로 되었음
전골
모체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 사기점이 있었다 함
정원수 양묘장
화동마을 입구에 있는 양묘장. 500여평 되는데 사천자영고등학교의 실습소임
장자나무
갓골 남쪽에 있는 서나무. 둘레 5m, 임진란 때 피난온 김해김씨의 15대손이 심었다 함
참새미
참새미골에 있는 샘. 돌사이에서 항상 물이 나고 큰 게가 살고 있어 비가오면 나온다 함
천황산
모체골 남쪽에 있는 산
큰골
갓골 서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큰비리고개
신촌 서북쪽에서 곤명으로 넘어가는 고개
탈미
반룡 서북쪽에 있는 고개
팔왕당 골짝
모체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서낭터의 고개. 흔적이 있으며, 20여년전 다색의 넓은 주발이 나왔다 함
화당산
가산리의 화당산
화동
반룡리에 있는 마을

배춘리

본래 진주군의 축곡면의 지역으로서 예전에는 배가 들었으므로 배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동, 양동과 가차례면의 하동과 사천군 북면의 토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배춘리라 해서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되었다. 신기, 양동, 배춘, 동치, 원계, 길평 6개의 자연마을과 면사무소, 축동초등학교, 농협 등이 이곳으로 옮겨 면의 중심지이다.

가무작실
원동
갈고개
배춘 북쪽에서 사천읍 두량리로 가는 고개. 개의 혈이라 함
누른골
신기와 배춘 사이에 있는 골짜기
동치
배춘 서쪽에 있는 마을. 꿩이 움직이는 형국이라 함. 비행장의 소음으로 이주계획
뒷골
동티 뒤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골프장에 편입되었음
멘더레미
배춘 북쪽에 있는 골짜기
배춘
배춘리를 이름. 전국 지명에서 "배말" 등은 산촌의 뜻인 "뱃말"이 변한 지명으로 보나 이곳의 배춘리는 "뱃말"과는 다르며, 십수교라는 교량이 바닷물이 열물이 되면 이 교량까지 바닷물이 든다는 곳으로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번답
동치 서남쪽에 있는 들
복두정터
사천읍 구암리와 배춘 경계 작은 산 위에 있는 복두정의 터, 고려 때 무인들의 궁술연마장으로서 9사람의 무사가 배출되어 어사화를 받았으므로 사화대라 함. 1950년 6.25사변 때, 배춘, 토촌, 신기 등 세마을 부녀자들이 이곳에 모여 피난하는데, 마을 남자들이 호위하여 이틀 동안 밤새워 보호하던 중 9월 25일 연합군이 북진함에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하며, 마침 그날이 추석이었다.
섬들
동치 남쪽에 있는 논, 옛날에는 숲이었으나 개간하여 논이 되었다 함
성지골
양동 동쪽 사천읍과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
신기
새터, 배춘 북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
십수교
열물다리, 열무다리, 동치 남쪽에 있는 다리. 바닷물이 열물이 되면(물이 많이 들면) 이 곳까지 화물배가 들어와서 하역작업을 했던 곳
아랫땀
배춘 아래쪽에 있는 마을
안골
신기동남쪽 안에 있는 골짜기
양동
신기 북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 일명 양개골이라고 함
운계
원동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원동
가무작살. 운계 서쪽에 있는 마을. 원집이 있었다 함
재마당
원동과 운계 사이에 있는 터. 타작마당 있었음
짓칫골
신기 뒤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 암자가 있음
참새미
짓칫골 중턱에 있는 샘
핏다리
원동 북쪽에 난리 때 피를 많이 흘린 곳이라 함. 길이 약 10m
한골도랑
진주시 정촌면에서 흘러 내려오는 내. 한골에서 흘러 내림
허에기모팅이
양동과 멘더레미 사이에 있는 모퉁이. 도둑이 많았다 함
검은 구름이와 양개골 전설
축동면 배춘리 운계(검은 구름)와 양동(양개골)은 음양 오행설의 음과 양으로서 한쪽마을이 흥하면 한쪽 마을이 쇠한다는 말이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이 두 마을은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사다리

본래 진주군 축곡면의 지역으로서 사다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예동, 하동 일부와 가차례면의 하동 일부를 병합하여 사다리라 해서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되었다.

가라골
예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길다는 뜻임
가장골
예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가매장을 했다 함
감골재
사다 서쪽에 있는 고개
구름실
예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구름만 끼이면 물이 생긴다 함. 결로현상이 일어나서 물이 흐른다.
너덜바구
베루골 북쪽에 있는 너설이졌다 함
둔티재
사다 서쪽에 있는 고개
베루골
예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베루의 생산지였다 함
부채골
예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밭에 절터와 탑이 있음. 부채는 방언으로 부처골이 정당함
사안골
예동 동쪽에 있는 마을
새미골
예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샘이 있음
새짓골
사다동쪽에 있는 골짜기
수문골
웃담
싸리골
예동 북쪽에 있는 들. 쌀이 많이 난다고 함
쐬골
사다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안산
예동 앞 남쪽에 있는 산
양달
예동의 양지쪽 마을
어엄골
예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동
사다 남동쪽에 있는 마을. 예의를 잘 지키던 선비가 많았다 함. 일명 예의골이라 함
오룡골
예동 동쪽에 있는 등성이
운곡
구름실
웃땀
수문골. 예동 북쪽위에 있는 마을
음달
예동 동쪽 음달에 있는 마을
차골
예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폐들
예동 남쪽에 있는 들

탑리

본래 진주군 부화곡면의 지역으로서 탑이 있으므로 탑골 또는 탑동이라 하였느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산동을 병합하여 탑리라 해서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 되었다. 상탑, 중탑, 하탑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축동파출소가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골짜기에는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경제사정이 좋은 편이다.

골안
하탑 동쪽에 있는 골짜기
깐치골
하탑과 중탑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
돌문
화당산(반룡리) 밑에 있는 바위. 바위가 문같이 양쪽으로 서 있음
둔티
상탑 위편 북쪽에 있는 산. 고개
물통골
중탑 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이 움팍하게 생겼음
바깥오리동
오리동의 바깥마을
범등골
상탑 서쪽에 있는 골짜기
상탑
탑골의 웃마을
성지골
중탑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엥골
예엥골에 있는 마을. 중탑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움푹하여 전란 때 피난지였다 함
안오리동
오리동의 안에 있는 마을
오리동
탑골 동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공장이 있어 마을은 보이지 않음
용달치고개
신촌과 반룡리 신촌의 경계에 있는 고개. 탑이 있음
이깨골
이깨골에 있는 마을이며, 평바구 밑 골짜기
잠방선
중탑의 본 마을
장구산
하탑 동쪽에 있는 산으로 장고같이 생겼다 함
절골
하탑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 함
중탑
탑골의 중간지점의 마을. 지금은 삼거리에 파출소가 있음
쪽밭골
하탑 서쪽에 있는 골짜기
큰범등
중탑 북쪽에 있는 등성이
퇴미
하탑 동쪽에 있는 마을
평바구
장구산 서쪽에 있는 바위가 있으며, 마을을 이렇게 부른다.
하탑
중탑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지금은 늪에 삼성물류센타가 있다.
준치고개
지리산 줄기가 뻗어 내려오다가 한줄기는 동남쪽으로 다른 한줄기는 북쪽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뻗어가는 이곳 지형의 준치고개는 진주시와 사천시를 경계하는 능선으로서 북서쪽은 진주시 내동면이요, 남동쪽은 사천시 축동면인 바 옛날 교통이 발달되기 전에 진주에서 곤양가는 조창(가산창)을 통하는 대로로서 진주~곤양간 관현과 조창으로 조세를 납부하는 서부경남 사람들의 왕래와 남해안 해산물을 내륙지방으로 운반하는 유일한 산업도로로서 물동량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이 준치고개가 약 10리 길이라 야산이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도둑떼가 극성을 부렸다는 도적골도 있으며, 큰 느름나무가 고개 먼당에 있어 느름나무골도 있다. 지금은 산업도로의 발달로 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옛 산길의 흔적만 남아 있는 이 지방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고개길이다.
서재골과 박석거리
탑리(상탑) 준치고개 아래에 위치한 서재골을 지방 유생들의 유일한 교육전당으로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는 설이 예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지금도 서재터에는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서재터 입구의 박석거리는 반석이 깔린 넓은 계곡으로서 서재에 다니는 학생들의 왕래가 잦아 도랑을 건너는 양쪽 반석이 사람의 발길로 홈이 파여져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는가를 지금도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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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7-12 14: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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