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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용동

우리동이야기

마을명칭유래

벌용동(閥龍洞)

  •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 행정구역 개편때에 수남면 벌리라 하였다.
  • 1918년 5월 10일 수남면과 문선면이 합하여 삼천포면 벌리리가 되었다.
  • 1931년 11월 1일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그대로 벌리리였다.
  • 1956년 7월 8일 시로 승격되면서 벌리동, 용강동, 와룡동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1966년 용강동, 와룡동이 용강와룡동으로 통합되었다가 1969년 8월 8일 벌용동으로 통폐합하였다.
구녕바우도랑
벌리 북쪽에 있는 도랑
벌리들
벌리를 중심으로 동남쪽에 있는 들
선짓개들
벌리 남쪽 들. 지금은 문선초등교, 삼여중·고, 시청, 경찰서, 교육청, 소방서, 세무서 등 관공서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리
황새고랑
선짓개들에서 팔포에 이르는 들판으로 흐르던 도랑. 황새가 많이 와서 노닐었다고 함
새물
벌리 뒤쪽에 있는 마을
새몰들
새몰 앞에 있는 들
새몰큰고랑
새몰 앞으로 흐르는 내
찬새미
벌리 서쪽에 있던 우물
효자문(孝子門)
벌리 북쪽들 가운데 있던 비각. 장씨(張氏) 집안의 장참사라는 분이 다른 문중의 효자를 칭송하여 용두동에 세웠던 것들 벌리동으로 옮겨 왔음
손단새미
벌리 서쪽에 있는 우물. 부녀자들이 이 샘에서 머리를 감고 치성을 드렸다고 함
쇠방아실거리
벌리 동쪽편 마을. 전에 쇠방아가 있었다고 함
신촌
벌리동에 새로 생긴 마을. 1960년과 1970년에 은행융자주택이 세워졌음
쪽새미
벌용동의 한 개 법정동으로 시가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진삼도로변 선짓개들 벌판에 자리잡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동네로 교육기관(각급학교)이 많이 있으며 주위가 넓은 들판이라 벌리라 했다고 함
정종도가
일제시대 일본사람이 터를 잡고 삼천랑(三千郞)이라는 정종을 생산한 곳임. 현재 삼천포종합여자고등학교 자리임

용강(龍江)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수남면 강청동, 봉전동, 남양면, 용두, 이치 각 일부를 통폐합하여 용강이라 하였다.
  • 1918년에는 수남면과 문선면을 통합한 삼천포면 용강리라 하였고, 1931년에는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용강리로 그대로 사용하였다. 1956년 7월 8일 시로 승격되면서 용강동이라 하였다. 1966년 와룡동과 합하여 용강와룡동으로 하였다가 1969년 8월 8일 벌룡동에 통폐합 되었다.
감나무도랑
중촌에 있는 도랑. 주위에 감나무가 많이 있었음
강청(江靑)
용강동에서 으뜸되는 마을
강청양계단지
강청 서북쪽에 있는 단지. 양계를 위하여 양 100호로 집단을 이루고 있음
독뫼
강청 동북쪽에 외따로이 있는 산
숯뫼
강청 동북쪽에 있는 언덕
아래땀
강청 아래쪽에 있는 마을
양새미
북쪽에 있는 마을에 양새미가 있었으며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고 함
용두(龍頭)
용두 동쪽에 있는 산. 높이 254m이며 와룡산이 용의 형국이므로 그 머리에 해당된다고 함
못땀
강청 위쪽에 있는 마을
이천둠벙
강청 북쪽에 있는 둠벙. 그 당시 돈으로 2,000원을 들여서 팠다고 함
장포새미
강청마을 뒤쪽에 있는 우물
중촌
강청 가운데 있는 마을

와룡(臥龍)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남양면 와룡동과 수남면 요호동 일부를 통폐합하여 수남면 와룡리리 하였다.
  • 1918년에는 수남면과 문선면을 통합한 삼천포면 와룡리라 하였고, 1931년에는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와룡리라 그대로 사용하였다. 1956년 7월 8일 시로 승격되면서 와룡동이라 하였다. 1966년 용강동과 합하여 용강와룡동으로 하였다가 1969년 8월 8일 벌리동에 통폐합 되었다.
가마뚜덩
절땀 앞에 있는 마을. 절에서 가마솥을 걸었다고 함
가지고랑
와룡 동쪽에 있는 골짜기
굴바구
상사바위
꼬깔바구
널띠밭등모랑에 있는 바위. 머리에 고깔을 쓰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함
널띠밭등몰랑
와룡 동쪽에 있는 바위. 높이 507m이며 띠가 많았다고 함
마당논
마전땀 아래 쪽에 있는 논
마전땀
와룡동에 있는 마을
벅수골땀
와룡동 숲땀. 장승이 있었다 함
민재봉
와룡동 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 높이 798m 제일 높은 봉우리
베널바구고랑
새 섬바위 밑에 있는 골짜기
비짐등
마전땀 위쪽에 있는 산
사자바우
널띠밭등 상봉에 있는 바위. 모양이 사자같다고 함
천황바우
상사바위 위에 있는 바위. 가운데 지름 1.8m, 깊이 3m의 큰 굴이 있음
상투바우
새섬봉 밑에 있는 바위. 상투처럼 생겼음
손단새미
일명 약물샘이라고도 함. 와룡입구에 있는 우물이며 물이 맑아 부녀자들이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린 곳이라고 함
수정광산(水晶廣山)
와룡동 동북쪽에 있는 광산. 옛날에 수정을 캤으며 지금도 수정이 있다고 함
숲땀
일명 벅수골목이라고도 하며, 와룡 가운데 있는 마을. 숲이 많이 우거져 있었으며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함
약물새미
손단새미
와룡저수지(臥龍貯水池)
와룡 입구의 골짜기를 막아 만든 저수지 1953년 12월 31일 준공. 넓이 362.9 정도
와룡정자나무
와룡 입구 동편에 서 있는 느티나무
은(銀)골고랑
민재봉 밑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은을 캐던 광산이 있었다고 함
작은재
큰재 어깨 아래편에 잇는 고개. 이홀동으로 넘어감
절고랑
와룡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현재 절터가 남아 있음. 와룡동사지
절땀
절고랑에 있는 마을. 현재 절터가 있음
큰재어깨
와룡동 동북쪽에 있는 고개 . 고개를 넘으면 사남면 계양으로 감
호랑바우
와룡동 서쪽에 있는 바우. 호랑이처럼 생겼음
큰돌팍
와룡동 동네 입구에 있는 큰 바위. 도깨비가 나와 춤을 추며 논다고 하여 일명 도깨비바위라고도 함
양새미
와룡동 입구 정자나무 아래에 있는 우물. 현재는 저수지가 생겨 수몰되었음
옥정수
와룡동 위쪽 들에 있던 샘으로 보통사람이 이 샘에 손을 대거나 물을 마시면 즉사하거나 미치광이가 된다고 하여 손을 못대고 있던 중 근년에 와서 이 샘을 메워 버렸는데 메운 사람이 곧 병들어 죽었다고 함. 이 샘물은 왕이 아니면 마실 수 없으며 김수로왕의 왕자 7명이 이 물을 마시고 득도했다고 전함
큰새미
와룡 마을 동쪽에 있는 우물
약새미
와룡동 동쪽 산기슭에 있는 샘. 지금도 물맛이 좋아 약수로 이용되며 많은 시민이 이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하고 있음
마전들
지금은 동리가 되었음
수반들
와룡마을 회관 북쪽
장승배기들
와룡마을 서편 들
작답들
지금 변화산 기도원 앞에 작은 들
물방아실거리
와룡마을 회관 밑 터
못안들
와룡저수지가 생기기전 못안들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저수지로 수몰되었음
와룡(臥龍)
와룡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와룡산의 나무가 이 마을의 삶의 밑천이었으나, 지금은 산을 가꾸는 한편 목장도 조성하고 농사에 주력하고있음. 마을 입구에 저수지가 생기고 청룡사가 세워짐으로 낚시꾼과 사찰을 찾는 신도의 내왕이 잦은 마을임
  • 와룡산(臥龍山)의 봉우리 : 새섬봉, 천황봉, 민재봉
  • 와룡산의 등골 : 안골, 동안골, 큰재, 작은재, 합당리 등, 산제당고랑, 큰재등, 작은재등, 바새등, 안새등, 작은마당, 복골등, 배나무등, 가는골
  • 와룡마을의 땀 : 새까땀, 새땀, 수땀, 절땀, 서지굼턱, 동사땀, 비렁걸땀, 탑걸땀, 못둑골땀, 건너땀
  • 절터 : 장군절터, 도암터, 제석당터, 불당골, 성불암터, 전불안터, 상자암터, 낙사암터, 호방절터
  • 고랑 : 절고랑, 금장고랑, 새재암고랑, 뒷고랑, 복골등고랑, 고개밑고랑, 도안골고랑, 배나무고랑, 손고랑, 무르배기고랑, 도암재고랑

와룡동사지(臥龍洞寺地)(도지정기념물 제179호)

와룡사는 와룡골 안에 있었던 삼한갑찰(三韓甲刹)로 전해온다. 삼국유사(三國遺史), 가락국기(駕洛國記), 낙동강문화사(洛東江文化史)등에 나오는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설화에 의하면 가락국 수로왕은 그의 넷째 아들로부터 열째아들까지의 일곱왕자는 허황후의 동생 보옥선사(寶玉禪師)를 따라 김해의 궁성을 등지고 출가하는데, 처음에는 합천 가야산에서 수도하다가 3년 후에는 의령 수도산으로 옮겨가고 다음해에는 사산(泗山 : 현 사천)의 와룡사와 구룡사(현재 사남면 소재)에서 불도를 닦고 드디어 자리산에 올라 득도한 곳이 곧 칠불암이라 전하고 있다. 물론 이 설화는 가락건국의 신화라 하더라도 와룡사가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는 와룡사의 이름이 없고 와룡사의 후신으로 전해오는 옥정사(玉井寺)도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불교사외의 역사문헌(경남도지, 진양지, 東城勝覽臥龍山記)에는 많은 암자이름과 함께 와룡사, 백천사(白泉寺), 적선사(積善寺), 홍보사(興寶寺)가 와룡산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은 고려말까지 번성하다가 조선조 때의 배불숭유(排拂崇儒)정책으로 점차 쇠퇴하고,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백천골의 백천사마저 임진왜란때 불탔다고 전해온다. 와룡골안의 사찰들이 얼마나 융성하였는가는 <불티골>의 지명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가마뚜등>은 절을 찾아오는 선남선녀가 너무 많아 식사를 제공키 위하여 이 가마뚜등에다 솟가마를 걸고 식사를 제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고 <불티골>은 스님들이 즉으면 화장하던 골짜기다. 골 안의 산 중턱에는 수많은 사찰지(寺刹址)가 지금도 완연히 남아있어 찬란하던 불교문화의 성쇠를 말해주고 있다. 이 와룡사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고려8대 현종(921~1031) 등극 이후의 일이라 하겠다. 현종은 기구한 운명의 왕자로서 이곳 와룡사와는 인연 깊은 왕자요 임금님이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址勝覽)에는 와룡사(臥龍寺)는 와룡산(臥龍山)에 있으며 고려(高麗)의 현종(顯宗)이 잠용(潛龍)시에 놀던 곳이라 적고 있다.(臥龍山 : 在臥龍山, 高麗顯宗潛龍時所遊處)

여기서 잠용(潛龍)이라는 말은 왕이 등극(登極)을 하기 이전의 태자(太子)시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진양지에는 比山 高麗顯宗 潛龍時 所遊處故名之, 즉 이 산은 고려 현종이 왕자때 때를 기다리며 유유히 계셨던 곳으로 산 이름을 와룡산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說)은 일본 역사학자 靑柳南冥이 지은 조선의 전설에도 더욱 소상히 소개되어 있다.

이 설화에 의하면 어느 길가던 나그네가 와룡골을 바라보니 5색이 찬란한 서기가 뻗혀 있음을 보고 심상찮은 일로 생각하면서 필시 와룡골에는 장차 이 나라 임금님이 되실 분이 강보에 싸여 와서 자라고 있다 하였다. 후일 왕자 순은 고려 8대 임금인 현종이었다고 한다. 가락국기(駕洛國記), 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기록이 신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현종보다 150년 앞서 신라말기의 명승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와룡산을 찾아와 남긴 남양동(南陽洞)설이 생생하게 이 고장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 대사의 발길이 와룡에 이르고 절에서 몇일을 쉬다가 배고개를 넘어 떠나간다. 고개에서 와룡산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동천(洞天)과 청청히 흐르는 한내의 물줄기도 살펴본다. 대사는 드디어 와룡산의 생김새에 감탄한다. 訪水深山 無限景 臥龍上下 南陽洞, 즉 산수를 찾아 헤매니 경치는 한이 없고 남양동이 어딘가 하였더니 남양동 자리는 와룡산 아래에 있었고나 하며 크게 절을 하며 ─ 拜賀去 ─ 떠났을 것이다. 이리하여 <배하거>의 곳이라 하여 고개의 이름도 <배하거>더니 차차 변음되어 오늘의 배고개가 되었다. 이 도선대사가 퍼뜨린 남양동 설로 인하여 우리 사천이 더욱 유명해 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담당자
벌용동 총무팀 055-831-5354 / 팩스 : 055-831-6184
최종수정일
2020-04-28 17:05:08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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