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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면

우리면이야기

마을명칭유래

구평리

구평
구평(주막거리)

구평의 중심은 주막거리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자혜, 염전 등지에서 소금을 만들어 곤양, 진교장등에 가기 전에 말 수십필이 쉬어 가기도 하고 팔고 와서는 두툼한 주머니로 시원한 막걸리 한잔 들이키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곳이 바로 주막거리였다. 자혜, 대포 등지에서 염전, 선창, 비토 등지에서 나오는 이들이 꼭 지나야 하는 양개마을로서 어쩌면 자연스럽게 주막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통정
통정(桶井)

구평 서북쪽에 있는 문촌, 정문거리, 통새미 등을 합한 것이 통정이고 1984년 1월 1일 통정이란 동네 이름이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마을의 유래는 통새미가 우리동네 대표선수다 하여 통정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하는데 이 통새미는 다른 곳은 가뭄이 들어 새미가 다말라고 통새미는 마르지 않고 서포면민을 다먹일 정도로 물이 좋았다고 한다.

대포
대포(大浦)

대포를 전에는 두리(豆里), 두리개, 둘개라고 불렀다. 구역 구분은 웃골, 새미골 두땀이 두포(豆浦), 가운데굼턱, 아랫굼턱, 샘빛골(새미골), 뛰밭골, 대동안의 다섯땀을 대평(大坪)이라 하였으나 1944년, 대평의 "대"와 두포의 "포"를 따서 대포마을이 되었다.

구랑리

구랑리
구랑

면소재지에서 지방도를 따라 3㎞지점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해안, 서쪽으로는 외구리, 구평리 남으로는 구평리, 북쪽으로는 조도리와 접하고 있으며, 바다매립으로 평야지대가 많으나 바다와 접하고 있어 수산물 생산이 있는 농촌마을이다. 본래 양포면에 속하여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도동 일부를 병합하여 서포면 구랑리로 되었으며 현재 구랑, 조교로 형성되어 있다.

명칭의 유래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이라 하여 회관 뒷편의 산이 거북형(龜形)이고 현재 함안 조씨 묘를 기준으로 거북이가 물을 먹으러 내려오듯 고개를 내미는 형용(形容)이라 하여 구랑(龜浪)이라 하였다. 즉, 거북이가 물결을 맞는 형국이라 하겠다. 곤명면 작팔리의 구몰(龜沒)마을과 동일한 유래라 할 수 있지만 龜浪이 어찌 九浪으로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른 설로는

  • 당초 마을 중심지에 어린 거북이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 앞에 물이 있다하여 구양(龜良)이었으며 일정시 매립으로 농토가 넓어지고 마을이 커지면서 구(龜)자를 구(九)자로 양(良)자를 랑(浪)자로 하여 구랑리가 되었다는 설(구양 → 구랑)
  • 구랑동네의 "산 봉우리가 9개다 하여 구랑이다" 라는 설
  • 구랑동네에 포구가 많다 하여 구랑(九浪)이다라는 설
  • 일제시대 전에는 龜浪, 일제시대 후에는 격하하는 의미 九浪이라고 했다는 설

이 있다.

구랑은 놀래와 조교마을로 이뤄져 있고 구랑본동은 1940년경 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조교
조교(助橋)

잔드리 마을이었으나 조교로 바뀌었다.

수문통거리에서 잔드리로 가다 보면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삼천포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작은배들이 많이 닿았는데 배를 대놓고 다리를 연결하여 육지와 오갔다 하여 잔드리라 한다.

금진리

동으로는 내구리, 서쪽으로는 하동군 진교면 송원리 화포이고, 남으로는 일부 해안과 내구리 굴포이고, 북으로는 곤양면 맥사리와 서포면 외구리에 접하고 있다. 처음은 서부면에 속하여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천군 서포면 금진리로서 금진, 후포로 마을을 형성하여 농업을 주로 하는 마을입니다.

금진
금진(金津)

쇠느리, 돔한잔디(돔 한가운데)라고도 하며 웃몰, 간댓몰, 아랫몰로 구분되어 있다. 금진은 소의 머리에 해당하고 현재의 금진교회가 진비등이라 하여 소여물에 해당되는 곳이며 뒷개는 몸통, 소모진은 소의 꼬리에 해당됩니다(소의 누운형상) 금진이라는 지명이 사용된 이유는 전에는 쇠느리였으나 일제강점기때 쇠(牛)를 쇠(金)로 바뀌어졌고 전에 쇠느리도 바닷가이면서 나루가 있다하여 나루진(津)을 사용하여 현재의 금진이 되었다.

후포
후포(後浦)

뒷개(후포1반), 밤개(2반), 소모(3반)마을을 합하여 후포라고 한다.

내구리

내구
내구(內鳩)

내구, 외구의 원래 이름은 비도리(非刀理)였다고 한다. 이 비도리가 이두식으로 "비둘기"로 바꿔지고 다시 한자인 비둘기 구(鳩)로 바뀌었다. 비둘기는 암수가 있는 것이라 하여 해방 후 숫비둘기는 외구리, 암비둘기는 내구리라 개칭되어 지금까지 불리우고 있다. 안비드리, 안삐들이라도 한다.

굴포
굴포(龜浦)

굴포마을은 자혜 구포(九浦)와 구별하기 위하여 한문으로는 거북구자를 쓰지만 한글로는 굴포로 하여 자혜와 구분하고 있다. 굴포마을이 형성된지는 약 500년 이상이라 전하여 오고 있고 이마을은 거북이가 3마리가 있다는데 그중의 큰 거북이가 왕개등이다. 언을 막기 전에는 왕개등밑으로 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굴포저수지가 그 물을 대신하므로 거북이가 살아 있다라고 굴포사람들은 말한다.

신흥
신흥(新興)

신흥의 원래 지명은 도토곶(跳兎串)이였다. 나루곶과 마찬가지로 곶이 고지가 되다 보니 도토고지가 되었는데 지명의 유래는 동네 앞에서 마을을 보면 동네뒤의 산형상이 토끼가 다른 곳으로 뛰기 위해 준비하는 형상이라 하여 "도토곶"이라 하였다.신흥이라는 지명 전(前)에는 굴포마을과 합해져 있었고 1970년, 굴포와 분리하여 신흥이라고 하였다.이 지명을 처음 지은 분은 이곳 서지골에 서당이 있었는데 이곳 접장이 "신흥" 즉 새롭게 일어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다평리

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3㎞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구평리, 서쪽과 남쪽은 바다이며, 북은 구평리로 산에 접하고 있고 양면이 바다로 인해 해산물 생산이 많으며 농업과 함께 어업을 하는 가구가 많은 지역입니다. 본래 양포면에 속하는 다맥(多脈), 독소(獨所), 구소(舊所) 일부를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맥과 신평의 이름을 따서 다평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다맥, 신소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맥
다맥(多脈)

다맥은 바닷가를 끼고 있는 마을로 다평교회, 서당 등 다른 동네에 비해 문화를 빨리 받아 들이는 동네이다. 다평은 노씨, 정씨, 안씨, 진씨가 처음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진주 수곡에서 이주해 온 여양 진씨가 많은 동네이다.

신소
신소(新巢)

신소의 지명은 신평의 "신", 독소의 "소"를 합하여 신소마을이라 하였다.

선전리

면 소재지에서 서포-단성선 지방도를 따라 2㎞지점에 위치하고 동·서·남은 바다에 접하고 북은 구평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수산물 생산이 많으나 농사일을 더 많이 하는 마을이다. 본래 양포면에 속하였으며 선착장에 창고를 지어 농산물 운송을 해상 교통에 의존하였던 성창(城倉)마을이었으나 이후 선창(仙倉)으로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선창과 염전을 합하여 서포면 선전리로 하여 현재 선창, 염전, 아포로 형성되어 있다.

선창
선창(仙倉)

선전리 중심 마을로, 선착장과 창고가 있었으나 현재 창고는 없다.

염전
염전(鹽田)

염짓개라고도 하며 옛날에 염전이 있어 염전이라 한다.

아포
아포(牙浦)

언개라고도 한다.

외구리

동구
동구(東鳩)

작도정사 옆의 도래몰과 경로회관이 있는 고래실(古來室)을 합하여 동구라고 한다.

서구
서구(西鳩)

전에는 배비드리라 하였다.

남구
남구(南鳩)

지금의 원머리와 미역골을 합하여 남구라고 한다.

조도리

조도리

면소재지에서 동북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 5㎞ 지점에 위치하며, 동은 바다, 서쪽은 외구리, 남쪽은 구랑리, 북쪽도 바다로서 곤양면 대진리와 접하고 있으며 본래 양포면 조도 또는 조섬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구랑동 일부를 병합하여 조도리라 해서 사천군 서포면에 편입되었다.

조도리

조도는 주로 농업으로 생활을 영위하나 부업으로 어업과 재첩사업을 한다. 즉, 서포에서 유일하게 재첩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 조도마을이다. 이 재첩은 맛과 질이 우수하여 전량 도회지로 팔리는데 하동 재첩 중매인의 말을 빌자면 재첩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하동 섬진강 재첩보다도 품질이 우수하다고 한다.

조도리

서포재첩의 특징은 해그럿내(해그럿내는 해산물에서 흙냄새가 나는 것을 말한다)가 나지 않고 맛이 아주 깨끗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민물은 남강물이 곤양으로 해서 이곳으로, 바다물은 구랑에서의 깨끗한 물이 조도마을에 합쳐지니 말이다. 재첩은 5월경부터 10월까지 생산하는데 2물~4물 까지 채취를 한다고 한다.(바다는 1~15물까지 있고 7물을 한시라 하고 15물을 조금이라 하는데 이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7개월 중 몇 번 작업하지는 않지만 소득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서포는 정말 천혜의 혜택을 입은 동네라 아니 할 수 없다. 하지만 오래전 부터 진주 남강물의 토사로 인해 이곳 바다 가운데가 들로 변하고 있다.

조도마을에 처음 살기 시작한 사람은 김씨(안동)이고 다음이 송씨(은진), 김씨(김해)이나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 왔다고 한다.

자혜리

구포
구포(九浦)

원래의 지명은 구우진(九牛振), 구신머리라고도 한다. 동네 산의 형태가 아홉 마리의 소가 누운 형상이라는 설과 소 아홉 마리가 들어와서 흩어져 동네가 형성되었다는 설(說)이 있지만 동네 어른들의 얘길 들으면 후자에 힘을 더 실어준다. 실제 쇠모가지의 도로가 소멍에 형상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마을 이름을 구우진이라 하였으나 일제강점기때 한자표기법에 따라 구포(九浦)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중촌
중촌(中村)

중촌은 동네중간에 있다하여 중촌이라고 한다. 중촌동네에서 대단한 인물이 많이 났다고 하는데 곤양향교의 초대장(직원이라는 벼슬)을 지낸 분이라던가 부산 동래 초대 경찰서장등등의 고향이 중촌이라 한다.

비토리

비토리

면 소재지에서 서포-단성선 지방도를 따라 남쪽으로 비토 연육교를 건너 6㎞ 지점에 마을 중심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4면이 바다와 접하고 있는 도서지구로서 유인도 5개 섬과 무인도 4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안 순환도로의 관광산업 도로가 1998년말 확·포장이 완료되어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는 아름다운 지역이다.

비토리

본래는 양포면에 속하는 섬으로서 남쪽의 한려수도 경관이 수려하고 섬 전체가 동물 형상을 하고 있는 곳이 많아 토끼섬, 거북섬, 별학섬이 있고 제일 큰 섬은 토끼가 비상하는 형상이라 하여 비토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지역은 경관이 아름다운 관계로 일정시대 때 일본인 5가구가 비토에 살았고 해방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2차례나 비토리에 다녀 갈 정도로 정이 깊었다고 한다.

비토는 상촌, 중촌, 사창, 세곡, 낙지포, 중봉, 하봉 7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비토 연육교가 놓이기 전에는 150호 정도가 살았으나 현대화로 인하여 지금은 옛날보다 가구수가 더 적다.


담당자
서포면 총무팀 055-831-5234 / 팩스 : 055-831-6078
최종수정일
2018-09-05 11: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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