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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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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탐방

안점산 봉수대

안점산 봉수대 안점산 봉수대

용현면 신복리 지금의 안점산(鞍岾山)에 위치한 이 봉수는 고려때 봉수인 침지 및 서낭당봉수를 폐지하고 세종 때 새로 설치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각산에 응답하고 북쪽은 진주 망진봉수에 응답한 보조선의 간봉으로서 우리면 신복리와 사남면 화전리 경계로서 와룡산에서 뻗어내린 해발310m의 끝봉우리에 봉수터와 둘레 약 100m의 성지가 남아 있고 봉수대 5기가 설치 되어있으며, 매년 시민이 참여하여 통일기원과 시민화합을 위한 안점산 봉화문화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덕곡리 지석묘(도지정 기념물 제49호)

덕곡리 지석묘 덕곡리 지석묘

용현면 덕곡리 일대의 민가 근처와 농경지 등에 흩어져 있다. 이른바 '고인돌무덤'이라고 하는 이 지석묘는 모두 15기나 되며 이를 한데 묶어서 1979년 12월 29일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조명군총(도 지정 기념물 제80호)

조명군총 조명군총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선조 31년(1598) 9월, 진주의 망진채, 동쪽의 영춘채, 그리고 곤양과 사천성을 차례로 빼앗은 조명연합군은 10월 초하루, 왜적의 최후 거점인 선진성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였다. 싸움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불행히도 아군 진중 탄약궤의 폭발로 일시에 전열이 흩어져 전세는 크게 불리해 졌다. 때마침 이를 지켜 본 성안의 왜적은 재빨리 성밖으로 뒤쳐나와 총을 쏴 대었다. 아군은 적의 역공을 받아 결국 수많은 전사자만 남기고 후퇴하였다. 전투가 끝난후 왜적은 아군의 전사자를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호국 원혼이 잠든 뼈아픈 상처의 전혼이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20칸(36m)의 방형분묘(네모 반듯한 무덤)로서 일명 '당병무덤'이라 하였다. 일제때 일인들이 무덤위에 <당병공양탑>이라 쓴 높이 1m가량의 빗돌을 세워 두었으나 해방후 없어졌다. 그리고 무덤 자체는 약 400년동안 거의 본래의 모습 그대로 방치된채 돌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사천시민의 한결같은 염원은 이 무덤의 원혼을 현창(밝게 나타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천문화원을 중심으로 사회단체와 힘을 모아 임난 전적지 위령사업을 벌였으며, 1983년 12월에는 사천시민과 출향인사들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무덤앞에다 거대한 빗돌을 세워 이름지어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라 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14일에는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전몰 제386주기를 맞는 위령제를 지냈다. 뿐만 아니라 매년 기일(음력 10월1일)이 다가오면 연례행사로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의 향사를 지내고 있다. 1985년 11월14일에 기념물로 지정되어 종전의 <당병무덤>에서 <조명군총>이라 이름하였다. 그후 1991년 12월에는 도비 5,000만원을 문화원이 지원받아, 이 곳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군총위의 개인 무덤 1기와 숲을 이룬 나무들을 베어내고 본래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위치 :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경백사(도 지정문화재 제234호)

경백사 경백사

경백사는 비문과 기문에 의하면 1925년 신상(申相), 신환(申桓), 신건(申楗)과 지방 유림(儒林)의 발의(發意)로 창건되어,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목은(牧隱) 이색(李穡),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문정공(文貞公) 신현(申賢) 등 네분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으며 1959년 경백서원(景白書院)과 강당(講堂)인 영수재(泳洙齋)를 유림(儒林)들의 발의(發意)로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소재지 : 용현면 온정리 517, 518-1번지
  • 지정일자 : 1997년 1월 30일
  • 규모 : 3,627㎡
경백사
  • 건립년대 : 1926년
  • 규묘 : 정면 3칸, 측면 1칸반
  • 형태 : 맛배 지붕의 목조 와가
경백서원
  • 건립년대 : 1959년(기해)
  • 규묘 : 정면 4칸, 측면 1칸반
  • 형태 :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영수정
  • 건립연대 : 1961년(신축)
  • 규모 : 정면 4칸
  • 중정일 향사(享祀)시 원거리에서 오시는 유림(儒林) 제관(諸官)의 제 숙소로 활용
내삼문
  • 건립년대 : 1926년
  • 규묘 : 정면 3칸, 측면 1칸
장충문
  • 건립년대 : 미상
  • 규모 : 정면 5칸, 측면 1칸
  • 형태 : 목조와가이면서 3층 형태로 된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음
배향된 인물
신숭겸

초휘(初諱)는 능산(能山)이요, 전라도 곡성(谷城)에서 태어났다. 서기 918년(무인) 6월에 기장(騎將)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더불어 왕건을 추대(推戴)하고 고려를 창건하여 개국원훈대장군이 되었고 뒤에 평산으로 관적(貫籍)을 받았다. 태조10년 정해년(918) 9월에 신라 경애왕의 구원요청으로 태조가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출병 중 이미 신라 서울을 노략하고 돌아가는 견훤을 맞아 대구 팔공산에서 싸우다가 포위를 당해 전세가 몹시 위급하게 되자 얼굴모양이 태조와 흡사한 공은 태조를 피신케 한 후 어차에 갈아타고 나아가 김낙과 더불어 끝까지 싸우다가 대사 순절하니 벽상호기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익대강위이보지절저정공신으로 추봉 되고 장절이라 증시(贈諡) 되었다가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지금의 춘천 소양강 북쪽 비방동에 례장을 했는데 금두(金頭)를 보호하기 위하여 삼분(三墳)의 의총(疑塚)을 만들었다 한다.

묘하(墓下)에 수묘군(守墓軍) 3000호(三千戶)를 두고 묘소후록(墓所後麓)에 원당(願堂)을 두었으며 순절지인 대구에 지묘사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태백성에는 상충사(태사사)를 창건하고 철상을 주조하여 봉안했다. 고려 태조 묘정과 숭의전에 배향되고 태사사, 덕양사, 동양서원, 표충사, 도포서원, 율리사, 경백사, 순절단, 용산단, 영각유허, 춘천방동영당 및 장군단에서 향사한다.

이 색

1328(충숙왕15)~1396(태조5) 고려말의 성리학자 려말삼은(麗末三隱)의 한사람. 호는 목은(牧隱). 14세에 성균시에 합격, 중서사전부로 원에 있던 부친으로 인해 원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가 유학, 부친상으로 귀국하였다. 1353년(공민왕2) 괴과(魁科)에 들었으며 다시 정동성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에 임명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에 올랐으며 밀직제학동지춘추관사가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1367년(공민왕16)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 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의 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1375년(공민왕22) 정당문학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1377년(우왕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고, 그후 오사충의 상소로 장단 등지에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피봉, 예문 춘추관사로 임명되었다. 정몽주와 관련되어 다시 금천등지로 유배되었다. 조선개국 후 태조는 그의 인재를 아껴서 1395년(태조4) 한산백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였다.

다음해 피서 차 여강으로 가던 도중 급사하였다. 후에 서애는 후한의 양표를 비겨서 그 절개를 특필하였다.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으며 한편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어 고려말기의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존재였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원천석

고려말기의 은사(隱士). 자는 자정, 호는 운곡(耘谷). 고려의 정계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이색 등과 교유하면서 시사를 개탄했다. 일찍이 방원을 가르친바 있어 조선 건국후인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작품으로 망국 고려를 회고한 시조 한 수가 전하며 야사 6권을 저술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랐다고 한다. 원주의 칠봉서원에 제향 되었다.

신현

1298년(충렬왕24)~1377년(우왕3). 고려말기의 학자. 자는 신경, 고려개국공신 숭겸의 후손, 우탁의 문인.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공천, 허겸 등 유명한 학자들과 사귀며 더욱 깊이 학문을 연구하여 당시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명제(明帝)로부터 스승의 대우를 받고 불훤재(不 齋)라는 호를 받았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경백사 창건일자 및 사실(事實)

경백사는 갑자년(1914)에 후손 영릉참봉(英陵參奉) 상(相)이 그의 사종(四從) 환(桓)·건(楗)과 더불어 평산태백산성(平山太白山城) 태사사(太師祠)에 가서 장절공 철상(鐵像)을 묘사(描寫)해 오고 병인년(1926) 봄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봉안(奉安)하면서 편액하기를 경백(敬白)이라 하니 무릇 태백산성을 경앙(敬仰)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 후 무진년에 사론(士論)으로 진선(進善) 신공(申公) 휘(諱) 현(賢)과 목은(牧隱) 이공(李公) 색(穡)과 운곡(耘谷) 원공(元公) 천석(天錫)을 추배(趨拜)하여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향사를 받들고 영수제를 지어 원거리에서 오시는 유림제관을 제숙시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유교인 뿐만 아니라 전 종원(宗員)이 장절공(숭겸)을 비롯 세 선생님을 모시고 경모함이요, 순국대의의 위업을 얼양(揚)함과 동시에 후손들에게 숭조정신을 함양시켜 오고 있다.

경백사 관련단체로는 경백서원(원장 최대경, 유계장 허상)과 평산신씨 경백사 보존회 (회장 신재희)가 있으며 경백사 관련 자료로는 경백사중수기, 경백사지, 영수재강당기, 경백사정비명, 평산신씨문헌록, 국사 대사전 등이 있다.

선진리성(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74호)

선진리성 선진리성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東岸)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구능(丘陵)의 지형(地形)을 이용하여 구축(構築)한 평산성식(平山城式)의 토축으로 된 창성(創城)이다. 이 創城은 본래 서남북(西南北)의 삼면(三面)이 바다에 임(臨)하고 東쪽 一面만이 육지(陸地)로 通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수륙요새(水陸要塞)였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사업(干拓事業)으로 인하여 남북의 이면(二面)은 모두 농경지(農耕地)로 변하고 서쪽 일면(一面)만 바다로 연해 있으며 성지(城址)는 모두 밭으로 개간(開墾)되어 고지(高地) 일부(一部)만 공원(公園)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성(城)은 왜성(倭城)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정유재란(精油再亂)때 왜군(倭軍)이 사천지역(泗川地域)을 장악한 후 이곳을 중요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왜장(倭將)이 었던 모리길성(毛利吉成)으로 하여금 성(城)을 구축했다는 일본측 기록(記錄) 즉 도진가기(島津家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성(城)에 관한 우리의 관계문헌(關係文獻)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고적(古跡)을 고찰(考察)해 보면 결코 왜성(倭城)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성(城)이 위치한 지명(地名)부터 살펴 보면 고려초(高麗初) 남도수군(南道水郡(軍)에 설치한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자리한 곳으로 조창이 설치될 무렵 이곳의 지명(地名)을 통양포(通陽浦)또는 통조포(通潮浦)라 하였다. 이어 조선초기에 통양포(通陽浦)가 다시 통조포(通潮浦)로 변했는데 조창명(漕倉名)도 이에 따라 통양창(通洋倉)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 의하면 이때가 태종(太宗) 3年(1403)의 일로써, 이후 통양창(通洋倉)은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侵入)으로 조운(漕運)이 폐지되고 조세운송(租稅運送)은 육로(陸路)로 전환(轉換)되었다. 임진란(壬辰亂)이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곳의 지명(地名)을 법질도(法叱島), 선창(船滄), 신채(新寨), 동양(東陽), 그리고 동양창(東陽倉)따위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가운데 동양(東陽)과 동양(東洋)의 오사(誤寫)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채(新寨)라 함은 泗川古城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울로 된 왜채(倭寨)를 뜻한다.

조선후기에는 수군(水軍)의 진보(鎭堡)인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고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병합(倂合)에 따라 연포동(連浦洞), 통양동(通洋洞)일부를 편입시켜 오늘의 선진리(船津里)가 되었고 성명(城名)도 선진리성(船津里城)이 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문헌(文獻) 가운데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와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與地勝覽) 고적조(古跡條)에 의하면, 고통양창 재현남십칠리통양포상 고려초설창수부근주현조세조지경즉12창지일금유토성기지주3816척(사천현고적조) [古通陽倉 在縣南十七里通陽浦上高麗初設倉收附近州縣祖稅漕至京卽十二倉之一今有土城基址周三千八十六尺泗川縣古跡條] 즉 "고려초(高麗初)에 설치한 고통양창(古通陽倉)은 현(縣)의 남쪽 17里 통양포상(通洋浦上)에 있고 부근(附近)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당시는 開城)로 조운(漕運)하였으니 곧 12조창(漕倉)의 하나로 지도도 둘레 3,086尺의 토성(土城)터가 남아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記錄)에서 세가지의 공통점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거리 17里규모이고 둘째는 조세(租稅)를 거둬들인 창(倉)이 있는 점, 셋째는 토성지(土城址)3,086尺의 규모이다. 여기 거리 17里(1里는 약 400m)는 지금의 6.8㎞가 되므로 당시 현청(縣廳)의 소재지 사천읍에서 조창지(漕倉地) 선진(船津)까지는 7㎞가 된다. 그리고 셋째의 토성지(土城址) 는 창성(倉城)으로서 지금도 그 형적(形跡)의 일부가 역력히 남아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지껏 이 토성지(土城地)는 옛 당병성(唐兵城) 터, 또는 왜성(倭城)으로 잘못 알려져 온 것 이다. 조창(漕倉)의 기능(機能)은 원래 국가(國家) 경영(經營)의 재정적(財政的) 세원(稅源)인 조곡(漕穀)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해로(海路)를 통해 중앙(中央)에 조운(漕運)한 기지(基地)였으므로 그 중요성(重要性)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중앙(中央)에서 판관(判官)이 파견(派遣)되어 이를 관장하였고, 한편으로는 해구(海寇)의 침입(侵入)과 약탈(掠奪)을 막기 위해 창성(倉城)을 쌓고 수군(水軍)이 방어(防禦)하였으니 군사적(軍事的)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와 같이 조창(漕倉)이 고려초부터 이곳에 택지(擇地)된 까닭은 지정학상(地政學上)으로부터 이 지역은 일찍이 수도경작(水稻耕作)이 시작되어 물산(物産)이 풍부하였고 또 바닷길이 열려 삼한(三韓)때부터 무역(貿易)관계를 개설하여 포(布), 철(鐵)등의 물자를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 교역(交易)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임진란시(壬辰亂時) 이 성(城)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해전(海戰)으로서 선조(宣祖) 25年(1592) 5月 29日 함선(艦船)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麗水本營)을 떠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은 선진(船津) 앞 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을 앞세워 왜적과 치열(熾熱)한 싸움 끝에 적선(賊船) 13척을 모조리 쳐부수는 전과(戰果)를 올렸으니 이 싸움이 李忠武公의 제2차 사천해전(泗川海戰)이며 이때 해전사상(海戰史上)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登場)하였다.

다음은 육전(陸戰)으로서 정유재란(丁酉再亂)때인 무술년(戊戌年 1598) 10월 초하루 明나라 중로제독 동일원(中路提督 董一元)은 마병(馬兵), 보병(步兵)으로 구성된 전병력(全兵力)을 동원(動員)하여 이 성(城)을 공격했다. 적은 8,000여 병력(兵力)으로 아군(我軍)의 1/4정도였다. 이때 보병유격장(步兵遊擊將) 팽신고(彭信古)는 적의 성채(城寨)를 공격하던 중 진중(陳中)에서 화포(火砲)의 오발로 탄약궤(彈藥櫃)에 인화(引火)되어 화염(火焰)이 치솟고 아군(我軍)이 혼란에 빠지자 효기(效機)를 포착한 성채(城寨)의 적이 역습(逆襲)으로 나와 먼저 팽신고의 포진지(砲陣地)를 유린하였다.

이때 유격장 모국기(茅國器)와 엽방영(葉邦榮)이 성채(城寨) 북쪽의 고지에서 잔병(殘兵)을 수습 적 출격대의 배후(背後)로 돌아 성으로 돌진(突進)하여 성에서 나온 적을 괴멸직전까지 몰아 넣었으나 아군은 먼저 기병제장(騎兵諸將)의 전열(戰列)이 흩어져 북으로 패주(敗走)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我軍)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당시 치욕(恥辱)의 전흔(戰痕)이 지금의 선진리성(船津里城)어귀에 위치한 조명군총(朝明軍塚)이다. 「(전략) 채삼면임강 일면통육 인해위호 해 박채하천계 축금해 고성위좌우익 일원분마보래공 보병유격팽신고부대 쇄기수처중군진핍적호 웨기책홀영중포열 연염창천 적승세충격 고성원적역지 기병제장선분 일원역환진주 「(前略) 寨三面臨江 一面通陸 引海爲濠 海 泊寨下千計 築金海 固城爲左右翼 一元分馬步萊攻 步兵遊擊彭信固部隊 碎基數處 衆軍進逼賊豪 毁基柵忽營中포裂 煙焰蒼天 賊乘勢衝擊 固城遠賊亦至 騎兵諸將先奔 一元亦환晉州……」 <사천현여지승람(四川縣與地勝覽)> (1699년간)에 의하면 숙종조(肅宗朝)때 선진리(船津里)에는 수군(水軍)의 전선소(戰船所) 즉, 진보(鎭堡)가 설치되어 전선(戰船), 병선(兵船) 각 1척과 사후선(伺候船)=정탐선(偵探船) 2척이 상시 배치되어 해안방어(海岸防禦)에 임하고 있었다.

성내(城內)에는 비후당(備候堂)과 수전군기고(水戰軍器庫) 그리고 관해정(觀海亭)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병력(兵力)으로는 수군(水軍) 40주사사(舟師射) 및 포격(砲格) 도합 156명이었다. 목태림(睦台林)이 쓴 동성부(東城賦)에 의하면 능노군(能櫓軍) 145, 포수(砲手) 34, 화포수(火砲手)10, 사궁(射弓) 30명 등이 상주(常駐)하고 영조(英祖) 36년(1760)년에 설치한 진주(晉州) 가산창(駕山倉=漕倉)의 방어 임무 뿐 아니라 수시로 부조(赴操)할 때 호위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대원군(大院君)은 연해지방(沿海地方)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방어(海岸防禦)의 요충(要衝)과 변방의 중요(重要)한 곳에 많은 진을 설치했다.

이때 외적(外敵)방어에 효과가 많은 포군(砲軍)을 많이 양성(養成)했는데 포군은 조총(鳥銃)을 주로 사용한 총수(銃手)와 화포(火砲)를 사용한 포군이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舊韓末) 때인 1895年(高宗 32) 통제영(統制營)을 비롯하여 각 도의 수영(水營)이하 모든 군영(軍營)을 해체하고 배를 비롯한 모든 장비(裝備)는 군부(軍部)로 넘어 갔는데 선진(船津)의 진보(鎭堡)도 이때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앞서 1894(高宗 31) 동학난(東學亂)이 일어났을 때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선진리성내(船津里城內)에 있던 군기고(軍器庫)의 무기(武器)일부를 탈취하여 하동(河東) 고승당산(高僧堂山)에서 일본(日本)과 싸웠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선진리성(船津里城)은 일제(日帝)때 일제당국(日帝當局)에 의해 임진난시(壬辰亂時) 일본군(日本軍)의 전승지(戰勝地)라 하여 관심을 끌은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지(城址)를 고적(古跡) 제 81호로 지정(指定)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 50호로 지정되었으나 다시 1998년 9월 8일자로 지방문화재 자료 274호로 지정되었다.

무술전투(戊戌戰鬪)당시 왜장(倭將)이었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1918년경 이성터의 일부를 매수(買收)또는 기부(寄附)받아 공원(公園)으로 조성(造成)하고 공원정상에다 사천신채전첩지비(四川新寨戰捷之碑)라 새긴 비석(碑石)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日軍) 장성(將星)들이 그들 조선(祖先)의 전적지(戰跡地)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碑石)은 해방(解放)되던 그해 주민(住民)들에 의해 파괴(破壞)되었다. 다만 그때 심은 벚나무 천여주(千餘株)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본시(本市)에서는 1978년 사업비(事業費) 4,700여만원을 들여 공원경내(公園境內)에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李忠武公 泗川海戰勝捷碑)를 세우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이 곳 선진(船津)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倭船)을 격파한 국난극복사(國難克服史)의 현장(現場)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일본사람들이 세웠던 비석(碑石)자리에는 6.25 전쟁(戰爭)때 산화(散華)한 공군장병(空軍將兵) 전몰자(戰歿者)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기리는 충령비(忠靈碑)가 우뚝 서 있다. 현재 경내(境內)에는 편의시설 2동(棟)과 돌계단 70m가 설치되어 있고 공원입구(公園入口)에는 넓은 주차장(駐車場)의 편의 뿐 아니라 공원(公園)으로서의 면모(面貌)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야외공연장(野外公演場)도 마련하여 공원을 찾는 단체 및 학생들의 공연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또한 새천년을 기념하고 우리 사천시의 번영과 화합을 다지는 매향비와 자연보호헌장비가 있다.


담당자
용현면 총무팀 055-831-5114 / 팩스 : 055-831-6074
최종수정일
2016-07-19 13: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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