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읍 정의리 일부와 선인리, 그리고 수양공원일대를 포함하는 전 지역이 옛 읍성지이다. 조선 세종 24년(1442)에 병조참판 신인손(辛引孫)이 왕명에 의해 성을 쌓았다. 이로부터 4년뒤 봄에 공청(공무를 보는 집) 등 모든 건물을 짓고 읍(군청)을 정동면 고읍에서 옮겼다.
처음의 기록에는 성둘레 3,105척(자), 성벽의 높이 10.5~1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세 곳이라 하였다.
그 후의 기록에는 성둘레 5,015척, 성벽의 높이 15척, 성가퀴 630곳, 성문 및 옹성이 각 세 곳에 있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추가하여 증축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본래 백성을 보호하고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으나 임진난 때 짓밟히는 수모를 격었다. 특히 선조 32년(1598) 9월 28일경,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려 왜적을 몰아 내었다. 이 때 명나라의 유격장 노득공(盧得功)이 전사하였다. <자료출처:향토문화유적>
사천의 옛 이름이 사물(史勿), 사수(泗水), 동성(東城) 등이었는데 조선 태종 때부터 사천이라 하였다. 세종 24년(1442)에 영의정 등이 주청해서 이곳에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후(1445)에 완성시켰다.
성의 둘레 5,015척 높이 15척을 쌓았고 우물 4군데, 못 2군데가 있었다. 성문은 동문, 서문, 남문이 있었는데 재양문(載陽門), 숙금(肅金門), 주안문(朱安門)이라 하였다.
성 안에는 동헌인 부경헌과 객관을 비롯하여 제경루(齊景樓), 침오정(枕鰲亭) 등 많은 공공건물들과 민가와 시장이 있었다.
이 읍성은 순조 때까지 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성벽과 시설물이 급격히 훼손되어 산 부분만 겨우 읍성터로 남아 있게 되었다.
당시의 동문은 선인리, 서문은 정의리, 남문은 평화리에 위치했다. 이 읍성은 사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천현의 경계가 동쪽으로 23리, 서쪽으로 5리, 남쪽으로 25리, 북쪽으로 6리, 서울까지 973리였고 세종시대 인구는 370호 1,817명이었다. 당시는 농업과 어업이 중심이어서 성 안 시장에 농수산물과 공물로 보내는 인삼 등이 출하되었다.
사천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문인들은 눈을 들어 멀리 지리산으로부터 금오산, 니구산 등을 노래하였고, 눈을 내려 바다물결의 출렁거림을 읊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무예를 숭상하여 호연지기와 충의심을 길렀다. 읍성은 군사적으로도 왜구의 침입에 대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다. 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 정기룡 장군은 이곳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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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읍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옛 재래시장의 구수함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사천시 사천읍 소재 사천읍전통시장은 1970년 개설하여 현재까지 재래시장으로 존속하고 있으며, 사천시 사천읍민들의 유일한 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연면적은 10.165㎡이며 건평은 2.872㎡로 철근 콘트리트 슬래브 구조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 구암리 만죽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 명종 때의 학자인 구암 이정(李楨 : 1512~1571)을 기리기 위하여 1606년(선조 39)에 세운 서원이다.
1611년(광해군 3) 이정을 추모하기 위한 구산사(龜山祠)가 세워졌고 1645년에는 사당 아래에 구산사비가 건립되었다. 1676년(숙종 2) 구계라는 액호(額號)가 내려져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집정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31년 봄 전국 최초로 서원이 다시 세워졌고 1963년 사단법인 구계서원으로 등록되었으며 1974년부터 1988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유생들의 공부방과 회의장이었던 동재와 서재, 위패를 모셔놓은 묘당, 허목(許穆)의 글이 새겨져 있는 구산사비, 김덕함과 최관(崔瓘)의 기적비(紀蹟碑) 등이 세워져 있다. 목조기와집 5동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건물의 규모를 보면 구산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이고 동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이다.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고 풍영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이층집으로 고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해마다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낸다.
사천시는 1995년 5월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어 탄생했으며 시내 중심부에 남해 바다인 사천만이 깊숙히 밀고 들어와 시내가 크게 둘로 나뉜다. 이처럼 사천시는 해안평야 지대인 만큼 청동기 시대의 유적,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고인돌이 많다.
수양공원은 조선 세종 27년(1445)에 축성된 산성 일대에 마련한 공원으로 사천시민의 휴식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공원의 규모는 29.752㎡로 큰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의 혼합림이 우거져있으며 사철 새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또한 공원 내의 유서 깊은 수양루는 옛 군청 앞 대로에 있었던 것을 이전한 것으로 무더운 여름에도 누상에서는 시원함을 느낀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 3년(1421)에 세워 유교를 공부했던 곳이다. 세종 22년(1440)에 향교 관계자들의 거처인 치성재, 학생들의 거처인 동·서재, 공부하는 장소인 명륜당, 휴식공간인 풍화루를 새로 지으면서 이름을 '수학원학사서재'로 바꾸었다. 현종 5년(1664)에 안혜원이 유교진흥을 위해 성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을 세우면서 비로소 교육과 제사를 겸했던 향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여러 차례 보수했으며 현재는 동재를 없애고 풍화루를 폐쇄했으며, 외삼문을 통해 출입하게 하고 있다.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이 앞에, 사당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